도박 빚에 마누라를 잡혔다고? <허니문 인 베가스>

뮤지컬 영화 <인투 더 우즈>의 열기로 시작된 뉴욕의 2015년
새해 뉴욕은 연말 개봉한 뮤지컬 영화 <인투 더 우즈(Into The Woods)>를 보려는 뮤지컬 팬들로 영화관마다 들썩이고 있다. 대작 <호빗>과 같은 시기에 개봉한 탓에 스티븐 손드하임의 동명 뮤지컬 <인투 더 우즈>가 크게 빛을 보지 못하겠거니 예상했었는데 이게 웬일? 토요일 저녁 여유 있게 예매도 안 하고 나섰다가 어퍼 웨스트사이드에서 미드 타운까지 극장을 몇 군데나 들린 끝에 어플로 예매해 겨우 두 자리 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호빗>이 자리가 남아돌았다. 역시 뉴욕 사람들은 뮤지컬을 사랑하는구나! 역시 스티븐 손드하임의 명성은 대단하구나!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영화도 좋았다.


같은 4계절, 다른 느낌의 뉴욕의 겨울
우리나라처럼 뉴욕에도 4계절이 있지만 겨울이 좀 더 길다. 10월 말부터 추워지기 시작해 4월 말은 돼야 날씨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뉴욕의 겨울밤도 우리나라보다 길다. 오후 4시면 완전히 깜깜한 밤중이 된다. 하지만 뉴욕의 밤이 어둡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단지 불야성 같은 타임스퀘어 때문만은 아니다. 당당히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현지 사람들은 밤낮없이 꿈을 향해 열정을 불태우고, 뉴욕을 찾아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들 또한 여기에 있는 이 순간 만큼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돼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기에, 밤이 되면 맨해튼 도시 전체가 더욱 화려한 뮤지컬의 한 장면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이 주인공들의 도시에서 올해 토니어워즈의 주인공을 꿈꾸며 올 겨울 프리뷰를 시작한 따끈따끈한 신작 한 편을 소개할까 한다.

도박 빚에 마누라를 잡히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
도박 빚에 마누라까지 잡힌다. 막장 드라마 소재 같은 이 이야기가 뉴욕에서 뮤지컬로 만들어져 관객몰이 중이다. 제목 때문에 뉴욕으로 허니문 온 신혼부부들이 공연 후 객석 곳곳에서 키스하는 게 눈에 많이 띄는 이 작품의 제목은 <허니문 인 베가스>. 니콜라스 케이지, 사라 제시카 파커가 연인으로 출연한 1992년 동명의 로맨틱 코미디영화를 뮤지컬로 옮겼다.

잭은 5년 사귄 사랑하는 여자 친구 베찌와 결혼하고 싶지만 그럴 엄두를 못 낸다. "나보다 널 더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없으니까 절대 결혼하지 말아라"라는 어머니의 유언 때문에! 그러다 잭은 베찌와 내일 당장 결혼하고 말리라 결심하고 곧장 라스베이거스로 결혼 겸 신혼여행을 떠나는데, 두 사람 앞에 토미 콜맨이 나타나 결혼을 방해한다. 베찌가 피부암으로 죽은 토미의 아내와 판박이이기 때문이다. 잭은 6천만 원 가까운 도박 빚을 탕감해 준다는 말에 토미에게 예비 아내 베찌와 주말여행을 해도 좋다고 허락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원작의 대본을 쓴 시나리오 작가 앤드류 버그만이 뮤지컬 대본을 맡았는데, 음악극에 맞게 수정한 영화와 같으면서도 다소 다른 이야기 전개와 새로 추가한 장면이 원작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흥미 있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여심을 녹이는 미국 TV 톱스타 토니 단자의 로맨틱한 악당 연기
<허니문 인 베가스>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감상 포인트 세 가지를 소개해드리면, 먼저 로맨틱한 악당 토미 역의 토니 단자(Tony Danza)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1970년대 미국 인기 시트콤 <택시>와 미드 <후즈 더 보스?(Who's the Boss?)> 히트로 전 미국인이 사랑하는 유명 TV 스타가 된 토니 단자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객석 곳곳에서 그를 반기는 박수가 터진다. 우리나라로 치면 꽃할배 이순재씨 인기 정도! 사별한 아내와 꼭 닮은 잭의 약혼녀 베찌의 마음을 훔쳐 주말동안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 펼치는 그의 구애 작전은 로맨틱한 연애의 정수를 보여준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여유 있으면서도 열정적인 그의 연기는 관객들의 마음까지 녹여버릴 정도인데, 특히 2막에서 베찌를 위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를 때 선사하는 우쿨렐레 연주 솜씨는 깜짝 놀랄 수준이다. 그 큰 네덜란드 씨어터를 하와이 바닷가 달빛 아래로 순간이동시켜버리는 마법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


사랑스러운 악당 토미 역의 토니 단자(왼쪽)

작곡가 제임스 로버트 브라운도 토니 단자의 이 우쿨렐레 연주 솜씨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악기를 배우게 된 사연도 재미있다. 한 인터뷰에서 “매일 좋은 글귀가 적혀있는 달력을 하나 갖고 있는데 4월 24일에 ‘우쿨렐레와 우쿨렐레 교본을 사서 30일 동안 매일 30분씩 연습을 하면 평생 동안 연주하게 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정말 그 이후로 계속 연주하게 됐다.”고 밝혔으니, 전직 프로복서이기도 했던 토니 단자가 자신이 출연한 뮤지컬에서 우쿨렐레로 여심을 녹이게 될 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제임스 로버트 브라운표 코믹음악은 이런 것!
이 뮤지컬의 두 번째 감상 포인트는 역시 제임스 로버트 브라운의 음악. 최신작이면서도 1960년대 뮤지컬의 구조를 갖고 있는데 1막과 2막 시작에 거의 2~3분에 가까운 긴 서곡이 있다. 1막에서 서곡이 시작할 때 설마 진짜 옛날 뮤지컬처럼 길게 연주하지는 않겠지, 하다가 그 긴 서곡을 다 듣고 ‘이거 뭐지?’했다. 게다가 2막 서곡에서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인 각 악기 파트 솔로까지 한다. 그걸 보면서 또 ‘어, 진짜 이거 뭐지?’했다. 그런데 작품을 다 보고 나니 왜 그랬는지 짐작이 갔다. 제임스 로버트 브라운의 음악이 너무 좋아서 듣고 또 듣고 싶었는데 아마도 관객이 충분히 그의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일부러 제작진이 그런 배려를 한 게 아닐까?

<퍼레이드> <라스트 파이브 이어즈>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클래식하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감동을 줬던 제임스 로버트 브라운이 이번 작품에서는 전혀 다른 음악을 선사한다는 점도 독특하다. 바로 음악으로 하는 개그! 강약과 박자를 능수능란하게 바꿔가며 음악으로 농담을 하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웃음을 코믹한 멜로디로 바꿔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갖고 있는 고유의 아름다운 멜로디는 그대로 살아있어서 유쾌하고 즐거운 음악이 공연을 보는 내내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시원하게 만든다.

한국인 배우 레이먼드 리의 반짝이는 코믹 연기
특히 우리나라 관객들이 더 즐겁게 볼 수 있는 마지막 감상 포인트는 바로 배우 레이몬드 리(Raymond J. Lee)이다. 이씨 성에서 알수 있듯 그는 동양인 배우에게 문턱이 높은 브로드웨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한국인 배우다. 몇 년 전 <맘마미아!>에 코러스로 출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뜻밖에도 이 뮤지컬에서 그가 2막의 오프닝 곡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물론 2막의 배경이 하와이라 그에게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짝이는 연기로 당당히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사랑받는 그가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브로드웨이에서 동양인 배우가 솔로로 리드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허니문 인 베가스>는 브로드웨이 뮤지컬답게 볼거리, 즐길거리가 풍성한 작품이다. 제임스 로버트 브라운의 음악이 대중적이면서도 스티븐 손드하임의 정통을 따르고 있어서인지 흥행에만 포커스를 맞춘 기존 브로드웨이 뮤지컬들과 다르게 진정성이 느껴져서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코미디는 진정성에 바탕을 둘 때 더 웃기다는 웃음의 공식을 스토리, 음악, 연기, 안무, 조명에까지 고루고루 잘 적용한 작품이다.

신혼부부만큼 싱글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뮤지컬
이제 곧 구정이다. 결혼하라는 성화에 또 한바탕 시달릴 솔로들에게 또 한 명의 솔로로서 이 작품을 보고 느낀 유쾌한 교훈을 나누자면, ‘결혼해라’는 말이 ‘절대 결혼하지 말아라’ 내지는 ‘절대 결혼 못해’라는 말보다 분명 좋은 덕담이라는 것이다. 올 설날에는 꼭 결혼하라는 말에 “고맙습니다.”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월 15일 정식으로 오픈하는 <허니문 인 베가스>가 꼭 잘 돼서 레이먼드 리가 다음 작품에서는 더 큰 배역을 맡게 되기를 기원하며,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 강경애
뉴욕에서 뮤지컬극작 전공 후,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 <비 라이크 조> 등을 쓴 작가. 뉴욕에 살며 오늘도 뮤지컬 할인 티켓 구할 방법과 재미있는 작품 쓸 방법을 궁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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