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립 노 모어>, 유혹의 소나타

“Don't be shy.” 낯선 여자가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바에 함께 있던 낯선 남자는 술 한 잔을 마시고 올라가면 “핫”해질 거라고도 했다. 그들이 다양한 액팅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의 배우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건 그로부터 제법 긴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어디서부터가 극의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무대는 정확히 어디까지인가. 배우는 몇 명인가.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완공된 후 75년간 잠들어 있던 허름한 맥킷트릭 호텔에 입장하는 순간, 수만 가지의 질문이 떠다녔다. 언제 어디서든 총과 시체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무거운 분위기에 같은 마스크를 쓴 낯선 관객만이 유일하게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잠들 수 없는 뉴욕에서의 밤, <슬립 노 모어>는 모르는 것으로 가득해 유혹적이다.

<슬립 노 모어>의 유혹은 다채롭고 정교하며 치명적이다. 부부의 침실부터 사교의 현장이 되는 볼룸, 동물이 박제되어 있는 가게와 카드게임이 한창인 허름한 창고, 병원과 무덤까지 4층짜리 호텔을 빼곡하게 채운 100여개의 공간에서 수많은 사건이 벌어진다. 책상 위에 놓인 명함, 주문서, 편지에 쓰인 문구 하나도 실제와 다름없이 정교하다. 최소화된 조명은 불안하게 흔들린다. 바람소리와 종소리, 우아하지만 기괴하게 연신 귀를 자극하는 음악은 스산하기까지 하다. 층마다 다르게 설정된 공기는 또 어떤가. 공기는 그 어떤 소리나 움직임보다도 더 즉각적으로 분위기를 몸에 각인시킨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고, 심장박동수가 점점 높아진다. 독특한 공간에서의 몰입감 높은 작품을 선호하는 영국의 극단 펀치드렁크는 시·청각은 물론 촉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각을 통해 강조한다. 지금 당신이 서있는 곳, 1930년대 침묵으로 가득한 낯선 호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것은 ‘리얼’이다.


흰 가면을 쓰고 극을 만나고 있는 관객들

히치콕의 영화들처럼 내내 마음을 졸여야 하는 이 공간에서 만나는 배우들은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간호사는 보이지 않는 공포에 휩싸여 급하게 메시지를 남기고, 누군가는 죽은 까마귀를 위해 기도를 올린다. 찢어진 곰돌이를 꿰매며 눈물을 흘리는 남자도 있다. 대체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궁금하다면 그들을 향해 뛰어라. 공연을 관람했던 지난 8월 17일, 상처 입고 쓰러진 한 남자를 쫓아가다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던 남자의 인질이 되어 좁은 공간에서 심문을 당했다. 내가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임을 확인한 순간, 1평 남짓한 곳에서 그는 숨죽여 울었다. 밀실 밖에서는 남녀 모두를 탐하던 한 남자가 힐끔거리며 가까이에 있는 남자관객을 유혹했고, 누군가는 여배우의 키스를 받기도 했다.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실제로 손을 뻗어 온기를 느끼고 그 온기를 통해 감정과 극을 공유하는 진귀한 경험이 곧 <슬립 노 모어>다.

그리고 온기의 동력은 ‘욕망’이다. 펀치드렁크는 <슬립 노 모어>를 ‘1930년대 느와르 <맥베스>’라 지칭했다. 쾌락과 집착, 금기와 모순으로 가득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처럼 <슬립 노 모어> 역시 서스펜스와 치정, 파격적인 노출과 그로테스크한 퍼포먼스를 통해 욕망의 실체를 헤집는다. 관객이 쓰는 마스크는 ‘관음’의 욕망 그 자체다. 상하좌우를 초월해 현대무용부터 아크로바틱까지 잘 훈련된 배우들의 움직임 역시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물론 사건이 이어지지 않는 데다 대사마저 없는 이 공연을 보고 <맥베스>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조명, 디자인, 음악, 댄스라는 다양한 언어로 구현된 이미지는 오히려 그 어떤 말보다도 직관적으로 욕망을 이야기한다.


<슬립 노 모어>의 세트들

<슬립 노 모어>에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있고, 무엇을 상상하든 확실히 그 이상이 있다. 3시간 동안 장면은 3번 반복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여러 사건과 인물이 교차하는 <슬립 노 모어>가 준비한 것을 모두 다 확인할 수는 없다. 대신 관객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는다.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든 모든 것은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이 낯선 공간은 꽤 성실하고 세심하게 내 안에 감춰져있던 가장 솔직한 감정을 끌어내 놀랍게도 최선을 다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직면하는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정답은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이다. 인생의 진리가 여기 있을 줄이야. 그러니 구구절절 글을 썼지만, 미안하게도 ‘직접 체험하라’는 말을 뛰어넘는 영업글은 없는 것 같다.

<슬립 노 모어>는 2003년 영국의 극단 펀치드렁크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공연이다. 이후 이 작품은 미국으로 건너가 2009년에 보스턴에서 공연되었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 뉴욕 첼시에 위치한 허름한 호텔을 개조해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글: 장경진(문화 웹매거진 아이즈 공연담당 에디터)
사진: <슬립 노 모어>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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