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맨> 형제가 뭉쳤다! 남경읍, 남경주


서로를 보듬어 주는 사람들의 풍경은 아름답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주는 엄마와 시련에 고개를 떨군 이의 어깨를 다독이는 친구, 갈팡질팡하는 두 발 자전거를 밀어주며 아들에게 걱정 말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라고 외치는 아빠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여기의 형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해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던 연극 <레인맨>의 형제는 의도치 않게 빗나간 것만 같았던 마음의 방향이, 결코 한번도 아우와 형을 떠나지 않았음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번 무대는 국내 뮤지컬계 탄탄한 기둥으로 자리하고 있는 남경읍, 남경주 형제가 15년 만에 함께 서는 첫 연극. 무대 위에서 뿐만 아니라 무대 아래서도 형이자 선배, 동생이자 후배, 또한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서 서로를 보듬는 온기가 가득하다. 남경읍, 남경주의 모습과 연극 <레인맨>이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이유이다.

헛똑똑이 엘리트 동생과 자폐 형의 만남

연극 <레인맨>의 기자간담회장에서 두 형제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남경읍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한껏 신이 난 듯 했으며, 남경주는 사뭇 긴장한 태가 역력했다.

“몇 년 전에 연극을 한 편 했는데 과정이 즐겁지가 않고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그런 전철이 있어서 옛날 생각도 나고, 잘 해야 될 텐데, 하는. 긴장 많이 됐어요. 그리고 어떻게 준비를 해 나가야 하나,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다른 배우들 이야기도 들어오기 시작하고, 예전에 제가 조소를 했는데, 조소로 따지면 십자 뼈대에 크게 덩어리를 붙여놓은 상태거든요. 앞으로 이게 어떻게 형상화가 되어 나올 건지 너무 기대가 되요.”(남경주)


“오히려 지금 제가 긴장하고 있죠. 작품을 한다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은데, 과거 더스틴 호프만이라는 대 배우가 창조해 낸 인물이나, 국내서 했던 두 팀들, 또 해외에서도 했고. 그 사람들이 창조한 인물과 내가 창조한 인물이 뭔가 달라야 하고, 이 작품에 잘 녹아서 작품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얼만큼 만들어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니 자꾸 떨려와요. 또 대사량이 상당히 많으니까. 예를 들어 원주율이나 지명,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등 이런 수치들을 외우는 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어요. 기계적으로 막힘 없이 쫙 나가야 하는데, 내가 한번 틱 막히면 드라마 리듬이 툭 하고 걸리니까요.”(남경읍)

<레인맨>은 똑똑하나 까칠한 인터넷 주식 트레이더인 동생 찰리와 암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폐아 형 레이몬드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진짜 형제인 남경읍 남경주가 무대 위에서 형제 역으로 마주한 것은 1995년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이후 15년 만이라 더욱 반갑다. 최소 1년 이상의 일정이 짜여 있는 이 두 형제의 시간을 동시에 맞추기란 하늘의 별 따기. 이번에 그 별이 따 진 것이다.

“하면 참 아름답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 역을 하는 데 조금 부담은 있어요. 서로 너무 잘 알아서, 형 보면 벌써 얼굴에 섭섭한 거나, 담배 피우고 싶어하는 표정이 다 보이는데(웃음) 난 그게 불편하더라고. 그런 미묘한 것들이 공연하다 보이면 집중을 방해해요.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형제가 이렇게 같은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 좋은거죠. 그 어떤 곳에서도 맛 볼 수 없었던 충만한 느낌?(웃음)”(남경주)

“형제가 다 배우인 경우는 많이 있겠지만, 형제가 형제 역을 하는 건,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일 거예요. 이건 뭐 역사적인 일이 될 수도 있는 거고.(웃음) 동생은 불편하다고 하는데 나는 진짜 너무너무 좋아요. 저 놈하고 하면 내가 좀 기댈 수도 있고. 일단 믿음직 스러워서 마음의 안정이 딱 되죠.”(남경읍)

아버지 같은 형, 믿을 수 있는 동생

4남 1녀의 맏이 남경읍은 남경주 뿐 아니라 동생들 모두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는 형’이었다.
“동생들을 다 업어서 키웠어요. 학교 선생님이 어머니한테 “제발 경읍이 포대기 매고 학교 오게 하지 말라고.(웃음) 내가 파자마 입고 포대기 매고 학교 다녔거든요. 그런 장면들이 이 작품에 나와서 옛날 생각들이 막 떠오르는 거지. 동생도 공연 할 땐 안 그러겠지만, 연습하면서 매일매일 눈물을 쏟아내요. 아마 자기도 형과의 관계가 얽혀져서 그런가 봐.”(남경읍)

학창시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동생을, 다니던 서울예대에 종종 데리고 간 남경읍은 남경주를 배우의 길로 이끈 장본인이다.

“형의 모습 중 하나는 아버지 역할을 했다는 것. 그리고 평생 내가 이 일을 하게 끔 동기를 준 선배이자 선생님이자 친 형이라는 거에요. 나는 막 밖에 나가 놀고 싶은데 분장수업 모델 같은 거 시키고. 그러면 어린 나이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얼마나 싫었겠어요. 그런데 그런 경험들을 하게 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적성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하아… 안도의 한숨을 쉬는 거죠. 지금처럼 이렇게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었을 거에요.”(남경주)

5남매 중 배우 둘, 사진과 건축 관련 한 명씩, 그리고 스튜어디스 동생까지, 이 집안의 피 속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흐르는 게 아닐까?
“아주 웃기는 예로(웃음), 명절 때 형제들이 다 모이면 경주가 자꾸 고스톱 치자고 해요.(경주: 내가 맨날 그러진 않지) 형, 형, 형, 우리 고스톱 하자, 그러면 다른 형제들은, 아, 뭘 해, 하지 말자, 그러면서 결국은 해요. 그런데 경주가 다 따.(웃음) 어떤 기질은 경주가 제일 뛰어난 거에요. 나도 할 때는 하지만 평소엔 좀 닫아 놓는 쪽이고. 나머지 동생들도 다 똑같이 닫아 놓는 쪽이거든요. 동생은 그걸 빵빵 터트리는 쪽이고.”

군 생활 3년간 노래 하나를 제대로 다 못 배우셨다는 아버지 쪽은 분명 아닐 것이고, 조용하시지만 교회 성가대에서 열심히 노래 하신다는 어머니 쪽에 가능성을 둬 보는 두 사람이다.
“옛날에 라디오도 없을 때 이장 집에 앰프가 있었거든요. 아침마다 이미자 노래를 틀어주고 그러면 어머니가 그걸 다 따라 하셨거든요.”(남경읍)

역사를 쓰는 ‘현재진행형’ 두 배우

한국 뮤지컬 1세대(남경읍은 정작 1세대 선배들은 따로 있다며, 그 말을 써서는 안될 것 같다고 했지만)와 1.5세대로 탄탄하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이들 형제는, 사실 모두 연극으로 무대 데뷔를 했다.

“수업 시간에 동물을 몸으로 표현하는 게 있었거든요, 덤블링 같은 것도 제가 잘하고. 그걸 보셨는지 대학 1학년 때 교수님이 당시 동랑레퍼토리 극단에서 <보이체크>의 연출을 맡은 안민수 선생님께 저를 소개시켜주셨어요. 불려 가자마자 재주 넘어보라고 해서 네! 하고 딱 넘었는데 박수가 막 나오는 거야. 몸이 아주 좋은데? 그러시더니 원숭이 역 해볼래?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원숭이 역은 아니지만 악사와 보이첵을 쏴 죽이는 군인 역을 하게 됐죠.”(남경주)

당시의 동랑레퍼토리는 전설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존재였다며, 동기들이 다들 부러워했다는 남경주에게 “경주는 원숭이 역이지만 난 사람 역으로 데뷔했다”며 남경읍이 어퍼컷을 날렸다.

“저도 1학년 때 <하멸태자>라는 작품, 역시 동랑레퍼토리에서 한 건데 오디션을 봐서 광대로 섰죠. 햄릿을 우리나라로 번안한 작품이에요. 그 때 연습하다 바닥에 팍 박혀서 안민수 선생님이 집에 매번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시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따라서 나의 첫 번째 무대, 연극에 대한 마음은 각별할 수 밖에 없는 법. 피아노 치며 노래하고 무용과 올라가서 춤 추는 게 좋은 ‘타고난 기질’이 뮤지컬에 더 어울린다 생각하지만, 남경주가 언제나 잊지 않는 건 바로 ‘연극 정신’이란다.

“연극 연습하는 분위기가 너무 묘하고, 제가 살던 세상과는 너무 다른 세상이어서 분위기 자체에 빨려 들어갔어요. 선생님이 각 배역의 목소리를 악기에 빗대어 설명해 주시는 것 등 내가 표현해 보지 못한 그런 은유들, 또 선배들이 무대를 아주 경건하게 대하는 모습, 또 연극을 할 땐 너무나 치열하고. 그걸 지켜 봤고 다 기억해요. 아름답고 신성하고 치열했던 그런 이미지가 바로 제게 연극이에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후배들과 이야기 하면, 연기나 노래도 다 연기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저도 그걸 기초로 삼고 있어요. <레인맨>을, 그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만들고 싶어요. 그런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요.”(남경주)

2008년 조승우, 최재웅, 김다현, 이율 등 현재 내로라하는 한국 뮤지컬의 대들보들이 한자리에 모여 스승의 데뷔 30주년 갈라 공연을 펼쳐 화제가 되기도 했듯, 남경읍은 배우이자 뛰어난 제자들을 키워낸 선생님이기도 하다.

“예술을 이야기 할 때 예술과 기술, 두 개로 나누고 싶어요. 예를 들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무리 어려운 테크닉이라도 소화할 수 있게 끔 하는 게 기술이라고 생각하고, 그 기술이 어느 정도 연마된 후에야 예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칠 땐 이 둘을 분리시켜놓고 혹독하게, 그리고 그 이외는 같은 입장에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죠.”


젊은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많이 닮고 싶은 배우로 이야기되는 두 사람에게 배우의 가짐에 대해서 물었다.
“형의 무대를 보면서 극장, 배우에 대한 환상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환상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환상에 빠져서는 안되죠. 현실보다 더 혹독하고 힘든 과정들이 있어야 그런 무대를 만들 수 있거든요. 줄리어스 시저를 인용해 보면, 승리는 신념에서 비롯되고, 신념은 지식에서 비롯되며 지식은 훈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해요. 즉 훈련이 부족하면 지식이 부족하고, 지식이 부족하면 신념을 이룰 수 없고, 신념이 없으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이 계속 할 수 있는 것,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이 생기면 신념은 저절로 생겨요.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을 재미로 하는 아흔 아홉 명이 절대 이길 수 없다잖아요.” (남경주)

“거기다 지혜까지 있으면 최고죠. 단련이란 말이 단이 ‘천번’, 련이 ‘만번’을 뜻해요. 천만번 훈련하는 것, 그걸 해야 하죠.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남경읍)

분명 이들은 한국 뮤지컬계의 역사를 쓴 선배이지만 역시 현재를 이끌고 있는 왕성한 현역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꽃의 향기만을 모방하려 하지 않고, 그 향기를 피우기 위해 씨앗과 새싹이 이겨냈을 수 많은 비바람을 알고 더욱 이겨나가야 한다는 이들의 말은 후배들을 위한 조언만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임을, 서둘러 연습실로 뛰어가며 번뜩이는 눈빛으로 무장하는 두 사람에게서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이미지팩토리_송태호(club.cyworld.com/image-fa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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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2

  • A** 2010.03.07

    T.V에서 봤어요...아!형제에 반했어요,텔레파시가 통하는 예술 환상 그 자체이겠지요... 시력을 논 하는 자체가 어불성설 이겠지요 ㅎㅎㅎ

  • A** 2010.02.17

    형제는 용감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