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범한 사람”, 배우 송일국


저 멀리, 185cm의 숨막히는 기럭지를 자랑하며 그가 걸어온다. 김좌진 장군의 외증손자, 운동 마니아, 주몽,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바른생활맨, 인터뷰하기 어려운 인터뷰이로 유명한 송일국. 아주 슬쩍, 부풀려보자면. 편한 인터뷰이가 아닌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승부차기 동점상황, 공을 차러 나가는 마지막 키커의 심정과 비슷했다. 반듯한 걸음걸이, 잘 다려진 정장과 TV에서 본 다듬어진 표정. 아, 날이면 날마다 들을 수 있다는 ‘인터뷰 교본’에 나올법한 ‘뻔한 대답’을 내놓는 인터뷰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하다. 아, 섬뜩해지는 기분.

#1. 인터뷰 스타트

아주 쉬운(?) 질문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눈을 감고 생각을 곱씹고, 곱씹는 표정으로 심각해지는 송일국. 대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한참 뒤에, 쏟아지는 대답들이 귀를 쫑긋하게 만든다. 최선을 다해 쏟아내는 이야기. 점점. 배우 송일국의 매력도가 선명해진다, 점점.
안중근 역으로 연극 무대에 오른다고 들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해주세요.
(생각에 빠진). 음…. ‘안중근’하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연극을 보러 오신 관객 분들의 생각에 부합하는 안중근의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음…(두 눈을 감고, 생각).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걱정이에요(두 눈을 감고 다시 생각).

어렵죠?
인터뷰 어렵죠.

하하, 아뇨. 연극이요. 인터뷰 하는 거 별로죠?
인터뷰를 싫어하진 않지만, 어려워요. 인터뷰를 마치고, "아까 말씀 드린 내용은, 기사에서 빼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 드리면, 그건 항상 "꼭 넣어주세요"가 되더라고요. 인터뷰 관련해서 본의 아니게 구설수를 겪었잖아요. 신중해지고, 말을 아끼게 됐어요.
얼마 전에 연극 <나는 너다> 제작발표회에서도….
(‘송일국, 친일파 이해한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다)

와, 제가 그 기사보고 정말 화가 나서. (촬영중인 사진 기자에게) 이 이야기 아세요? (사진기자: 아, 기사로 봤어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안중근과 안중생. 둘 중, 자신과 비슷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게 질문이었어요. 대한민국 어느 누가 감히, “전 안중근 의사와 비슷합니다”라고 할 수 있겠어요.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비록 나약한 선택을 하긴 했지만 난 보통사람인 안중생과 비슷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 선생님이 추앙 받는 것 아니겠냐는 말을 했어요. 그 기사 타이틀이 뭐였는지 아세요? ‘송일국, 친일파를 이해한다'. 와…. 

 직접 기사를 본거에요?
어머니 전화를 받고 알았어요. “야! 너 미친 거 아냐?”하면서, 혈압이 올라서 쓰러지려고 하시고. 어머니도 국가보훈처에서 전화가 와서 아셨대요.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일국씨가 친일파를 이해한다는 발언을 하다니요” 하면서. 전 동영상이 하나라도 있으면 말을 잘 안해요. 지금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어떤 단어를 선택해서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지면 인터뷰는 편하게 생각해요, 괜찮아요.

#2. 아, 맞다. 연극이야기 해야지

송일국 생애 첫 연극이다. 연극영화과를 나왔지만, 그 흔한 워크샵 공연 한 번 오른 적이 없단다. 바람. 그 무서운 늦바람을 타고 시작한 연기생활. 드라마, 영화를 거쳐 연극무대까지 날아왔다.

안중근 역할이면, 또 영웅이네요.
저 바람둥이 역할도 많이 했는데. 사람들은 성공한 것만 기억하잖아요. ‘주몽’ 때문에 영웅 위주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정말 성공한 작품이잖아요.

안중근, 안중생. 1인 2역이죠?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공연장도 일반적인 곳이 아니라, 측면이 드러나는 원형극장이거든요. 이게 참 어려운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처음에 어머니가 “너 그러다 개망신 당한다, 무대 한 번 안 서본 놈이 참 용감하다”고 하시더니. 나중에는 잘 했다고, 박정자 선생님, 윤석화 선배님처럼 큰 배우분들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주셨어요.

연습실에서 지적도 많이 받아요?
지적은 많죠(웃음). 발성도 그렇고, 무대 위 동선, 발음. 아주 디테일한 부분도 다 집어내세요. 연습 때는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지적이 들어와요. 대본리딩도 진짜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하거든요, 초반에 하도 소리를 질러서 목이 약간 쉬는 바람에, 요즘 좀 고생하고 있어요.

기억에 남는 칭찬은요?
칭찬받은 건, 별로 없는 것 같은데(웃음). 시간이 갈수록, 연습을 할수록 어려워요. 한채영씨가 <서툰 사람들>이라는 연극을 했었는데, 무대에 섰더니 머릿속이 그냥 하얘졌대요. 그럼 어떻게 했냐고 했더니, 연습한 게 있어서 본능적으로 했대요. “오빠,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하면서 겁을 엄청 주더라고요. 아, 걱정이 태산입니다.

홍보 담당자분 말로는, 송일국씨 칭찬이 자자하다고 하셨는데.
음, 저한테는 말씀 안 하세요(웃음). 열정은 많은데, 열정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잘해야지. 관객 분들이 가지고 오실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까, 그게 가장 두려워요.

연극 출연 계기가, ‘신이라 부르는 사나이’ 이후 생긴 연기에 대한 고민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교만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신불사' 준비는 이를 악물고 했지만, 보여지는 것만 초점을 맞췄어요.  일 년 동안 죽기 살기로 운동만 하고, 배에 왕(王)자도 새겨 넣고, 등에 비엔나 소시지도 박고. 아, 근데요…. 운동하시는 분한테 물어보면 알겠지만, 배근육는 운동하면 되는데 등근육은 정말 피나는 노력이 없으면 안되거든요. 아침 10시에 운동하러 가서 밤 6시, 10시에 오는 걸 8개월을 넘게 했어요, 최하 8시간씩. 그러니까 등이 그렇게 되더라고요. 근데, 없어지는 건 3개월도 안 걸리던데요(웃음). 헤어, 의상에 투자도 많이 하고, 정말 신경 많이 썼어요.


제가 신인상을 받았던 드라마 ‘인생화보’(2002년 작) 이후로 제 연기를 보면서 ‘아, 부족하구나’라고 생각은 했지만,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였거든요. 그런데 ‘신불사’에 나온 제 모습은, 못 보겠는거에요.  TV를 끄고 싶었어요. 끄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 껐어요.  못 보겠어서. 인간이 아니라, 그냥 허우대 멀쩡한 모델이 있더라고요. 드라마에서 인간이 보여야 하는 건데…. 정말 반성 많이 했어요. 그 때, 윤석화 선배님이 연극을 해보자고 하셨고,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거죠. 

다른 연극 제의도 많이 들어왔을 것 같은데.
'신불사'를 시작하기 전에 박상원 선배님이 <레인맨>이라는 연극을 해보지 않겠냐고,  전화를 주셨었어요. 그런데, 드라마 촬영기간이랑 겹쳐서 다음 기회로 미뤘었죠. <나는 너다>는 연기를 하셨던 윤석화 선배님이 연출을 하시니까, 제가 목표했던 바를 더 많이 배울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얻고자 했던 것들이 잘 채워지고 있어요?
진짜, 정말. 정말 잘한 것 같아요. TV 연기는, 제 내면을 끌어내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거든요. 바스트 샷, 클로즈업, 컷컷으로 촬영을 하고, 눈물 연기에는 안약을 넣기도 하는데. 연극은 그럴 수 없잖아요. 연극연습 때, 제가 조금만 방심하면 선생님들은 귀신같이 알아채세요(웃음). 엉망으로 틀리고 있는데, 제가 제 안의 에너지를 찾으려고 노력할 때는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그런데 제 느낌엔 뭐 그냥 잘한 것 같아요, 대신 열의는 없었어요. 열정이 있다, 없다는 본인은 정확히 알잖아요. 그럼, “지금 그 대사, 왜 한다고 생각해요?”하고 딱 물어보세요. 제가 가진 걸 끄집어내서 연기를 하게 되니까, 희열을 느껴요. 재미있어요.

#3.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

송일국은 탄탄한 연기력을 가지기 위해 아주 밑바닥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강단을 가진 배우이자, 부산에 직장을 둔 아내를 위해 서울과 부산 장거리 출퇴근길을 마다하지 않는 다정한 남편, 들끓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대한민국 남자다.
연극영화과였으면, 연극무대 경험이 있을 법도 한데.
그게 아니라, 연영과 수업 자체를 안 들었어요. 연영과 수업은 정말 올 F였어요. 미대 수업만 신청해서 들었으니까, 성적이 뻔하죠. 제 후배들도, 제가 매일 화구를 들고 다녀서 연영과 선배인 줄 몰랐대요. 지금 같이 연습하는 친구들한테 부끄러워요, 제 자신이. 어떻게 보면, 전 얼떨결에 연기를 시작한 거지, 저런 열정을 갖고 시작하지 못했거든요. 연습 몇 시간 전부터 나와서 뭔가를 하려고 하고, 주어진 대사 한 마디에 기뻐하는 저 친구들을 보면서 또 배워요. 제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또 감사하게 되고, 저 친구들에게 부끄러우면 안되겠다는 생각 때문에라도 최선을 다해요.

‘해신’을 찍을 때, 수애씨랑 나눴던 대화가 세 마디 정도였다는 일화도 유명해요. 여자 어르신(?)분들은 좀 편하지 않아요?
어렵죠. 특히 박정자 선생님은 많이 어렵죠(웃음). 저희 어머니가 동아방송 3기신데, 선생님은 1기 시거든요. 정말 감히(웃음). 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자체가 영광이에요.

‘김좌진 장군의 증손자’라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고…. 그렇다고 의식하진 않아요. 어릴 때부터 “어른들 이름에 먹칠하지 말아라, 누가 되게 살지 말아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어요. 익숙해진 것 같아요.

대학생들과 떠나는 ‘청산리 역사 대장정’에 대한 애정이 큰 것 같아요.
대학생들과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했던 중국 동북 3성 지역의 투쟁지와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8박 9일 동안 탐방하는 프로그램이에요. 2001년부터 이 행사에 참가했는데, 올해는 더 애틋한 게 연극 <나는 너다>팀도 함께 한다는 거에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숨결을 느끼고, 매일 두 시간씩 원정연습을 할 예정입니다(웃음).

<나는 너다>를 하면서 애국심이 더 불타오를 것 같아요.
이걸 하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다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접해왔기 때문에 <나는 너다>를 선택한 것 같아요. 30대 초반만 해도, 철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활동하시는 걸 보면서, 정말 나도 어른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잘 살아야겠다 반성하고, 많이 깨달았죠.

전생에 영웅이었다,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없어요?
점을 보러 가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는데. 아, 어떤 기사에서 보니까 제가 전생에 ‘김좌진 장군’ 이었대요. 음, 그럼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건가(웃음).

대중들이 생각하는 ‘송일국에 대한 오해’, 해명하고 싶은 게 있다면요?
음, 뭘까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도 궁금해요. (기자: 음…. 독하고, 재미없다? 직접 만나보니 재미없는 분은 아닌 것 같아요) 독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담배도 끊고, 운동도 했더니, 독하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부산에서 혼자 뭘 하겠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갈 때도 없고…. 운동만 했죠. 저를 아는 분들은 꼭 시트콤하라고 하는데, 한 십 년 후에(웃음).

결혼 이후, 생긴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음, 항공사 마일리지가 엄청 쌓였다는 것. 아내 직장이 부산에 있어서, 집이 부산이거든요. 어제 밤 비행기 타고 내려갔다가, 오늘 아침 비행기를 타고 올라왔어요. 출퇴근길이 엄청나죠?

<나는 너다>가 어떤 작품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전 이 작품으로 이미, 너무나 많은 걸 얻었어요. 제게 진정한 연기의 희열을 느끼게 해줬고, 재미를 준 작품으로 기억할 것 같습니다. 관객 분들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는데, 음…. 그리고…(생각 중). 다음 작품이 바로 연극이라고 장담할 순 없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연극을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요. 음….  아, 제가 이래요. 지금 머릿속에는 이것저것 막 떠오르는데,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이럴 때 답답해요.

음, 네. 뭔지 알 것 같아요.
그쵸, 아시겠죠(웃음)?, 바로 그거요. 그 이야기를 써주세요(웃음).

#4. 인터뷰 끝

녹취기를 끄고, 인터뷰를 끝냈다. “같이 연기하는 남자배우들 몸이 좋다”는 말에, 내친김에 연습실까지 동행했다. 오후 4시, 배가 출출할 동료들을 위해 간식을 풀어내는 센스와 문 앞까지 기자를 배웅해주는 젠틀함을 보여준 배우 송일국. 그는 자로 잰 듯 반듯하지만, 심심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유쾌한 솔직함의 카드를 갖고 있는 남자. 아쉽지만,  그 카드는 아주 가끔씩 튀어나오는 것 같다. 예상 밖, 뜻밖의 카드를 내미는 인터뷰이를 만나는 일은 참으로 즐겁다.

글: 강윤희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angjuck@interpark.com)
사진: 최일규(Candid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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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12

  • A** 2010.07.18

    언제 시작해요? 빨리 보고싶어요

  • A** 2010.07.12

    송일국씨가 연극에 도전 하신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어요. 그것도 원형무대를 안고 첫 연극! '송일국씨 정도의 위치에 서 계신 배우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안주함이 절대 없는 배우구나!'라는 생각이 밀려와 존경심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인터뷰를 읽어보니 정말 깊은 애정으로 준비하고 계시는 것 같아 저도 절로 희열을 느끼고 갑니다. '나는 너다'를 통해 명품배우를 뛰어 넘는 세계에서 단 한 분 뿐인 수제품배우가 되세요~

  • A** 2010.07.08

    송일국씨가 연극한다니.. 정말 기대되네요.. 연극에서 안중근역.. 뭔가 보여주실듯.. 넘 기대됩니다. 파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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