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전 마지막 투어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습니다" 패티김
작성일2012.04.27
조회수16,585
‘사랑의 맹세’, ‘초우’, ‘그대 없이는 못살아’, ‘빛과 그림자’,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을 만큼 수 많은 히트곡들을 노래한 가수 패티김이 은퇴를 선언했다. 1958년 데뷔 이후 54년간 김혜자가 아닌 패티김의 이름으로 자신의 인생을, 한국의 대중가요사를 노래에 담아 내었던 그녀. 이제 마지막 글로벌 투어를 통해 팬들과 무대에서의 안녕을 고한다. 일흔 넷의 나이를 전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그녀가 열정 가득한 노래로 태우는 마지막 불꽃이다.
은퇴 발표 후 후배들과 함께 ‘불후의 명곡’ 방송을 했습니다. 소감이 어떠셨나요?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시더라고요.
첫째로 너무 즐거웠어요. 정말 그 자체를 즐겼어요. 2, 30대 아주 새까만 후배들인데 내 앞에서 내 노래를 한다는 게 얼마나 부담이 되겠어요. 긴장하면서도 너무 열창들을 했고. 그걸 보니 20대 초반에 내가 긴장하던 그런 모습? 추억들도 스쳐갔고.
또 하나는 그 동안 그룹 위주, 댄스 위주의 가수들이 많이 나와서 노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몰랐거든. 왜냐, 한 사람만 쭉 부르는 게 아니라 여럿이 돌아가면서 몇 소절씩 하니까.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룹에 있는 후배들도 너무 노래를 잘하더라고요. 아, 저렇게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있구나, 새삼 느꼈어요. 그게 너무 반갑고 대 환영이지. 얼굴이 예쁘고 밉고를 떠나서 노래를 정말 잘하는 후배들을 (내가) 너무 예뻐해요. 그런 젊은이들과 같이 노래하고, 즐기고, 참 재밌었어요.
후배들의 헌정앨범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국내 투어에 이어서 글로벌 투어도 할 예정인데, 미국, 캐나다, 호주까지, 그게 내년까지 갈 거에요. 그러고 나면 아마도 후배들끼리 그런 앨범을 만들지 않을까? (웃음) 저한테는 비밀로 하겠죠? 그런데 그런 느낌을 받고 있어요. (웃음)
과거 부르셨던 노래들을 다시 들어보다, 폭넓은 음역과 클래식한 스타일에 놀랐습니다.
초창기에는 스탠다드 팝, 세미 클래식 쪽으로 불렀죠. 제 음폭이 굉장히 넓었어요. 엄청 고음에서 저음까지 아주 자유롭게 오르내렸기 때문에. 어떤 성악과 교수 한 분이 패티김은 성악가가 되었어도 참 훌륭한 소프라노가 되었겠다, 그러기도 했었고.
학창시절에 1년간 국악을 정식으로 배우기도 했었어요. 가수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했을 때,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사이에. 학교 국악시간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창 소리가 나서 들어가서 봤지. 난 그 반도 아니었는데. 한참을 가르쳐 주시더니 누구 한번 해 보라고 그러는데 아무도 안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손을 번쩍 들고 했죠. 그런데 굉장히 잘 한다고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사실 여기 처음 들어왔습니다, 하는데 앞으로 가르쳐 주시겠다는 거에요. 그 당시 형편이 좀 안 좋았으니까 수업료도 낼 수 없습니다, 했더니 낼 필요도 없고 그냥 가르쳐 주시겠다고. 그래서 1년 이상 배웠어요. 그리고 국악콩쿨대회에 나갔는데 창 부분에서 1등을 했어요.
음악 학교를 제대로 다닌 사람도 아닌데 내가 세미 클래식컬하게 고음 처리를 잘 할 수 있는 건, 국악 때문이에요. 그걸 나중에 느꼈어요. 목청 트인다고 반 아이들이 다 같이 남산에 올라가서 소리 지르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국악이 굉장히 어려워요. 고음처리도 많고. 한국 고유의 창을 통해서 발성연습을 다 해 놓은 거죠. 나중에 패티김이 되고 나서 팝송 부르는데 그렇게 효과를 본 거죠. 공청 돈다고, 높은 음에서 다시 한번 꺾는 거. 고음에서 그 창법이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외국인들이 굉장히 특이하게 봤죠. 자기네 노래인데 굉장히 동양적으로 부른다고.
스물 두 살에 일본 진출, 동남아 공연에 이어 미국 무대에도 서셨습니다. 한류, 해외진출 1세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스스로 개척해 나간 거죠. 물론 두려움이 있었죠. 그런데 내 꿈과 열정이 더 강했기 때문에 두려움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그까짓 거 뭐가 두려워? 하면 되지. 그런 오기?(웃음)
누구처럼 되고 싶었다, 누구를 보며 꿈을 키웠다 등 롤모델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어요.
없어요. 누구 하나 딱 정해서, 저 사람이 내 롤모델이다, 그런 게 없었어요. 특히 어려운 시절에 외국에 나가서 훌륭한 가수들의 장점, 특기, 그런 걸 많이 보고 듣고 배웠죠. 그때 배운 것이 오늘날까지 굉장히 많은 교훈이 되었고 이렇게 오랜 시간 노래할 수 있게 뒷받침이 되어 준 것 같아요.
당시 입은 의상이 굉장히 파격적이더라고요. 섹시미가 강조된. (웃음)
정말 파격적으로 야한 드레스를 입었지. 부모님한테 참 너무나 좋은 재산을 받았는데, 좋은 성대, 좋은 체격, 좋은 건강, 피부. 이런 건 역시 반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야 해요. 그 다음이 후천적인 노력이죠. 음성도 타고 나야 해요.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 이때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작았어요. 난 그때 이미 지금 키였지, 168cm. 학생복 입고 전차 타고 그러면 여느 남학생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으니까 항상 무릎을 구부리고 좀 작게 하려고 하고. 어깨도 넓고, 내가 그렇게 태어났어요.
키가 커서, 어깨가 넓어서 움츠리고 다녔던 김혜자가 언제부터 당당한 모습으로 변한 것일까요?
남학생들이 키다리, 꺽다리, 그러고 놀리니까 키를 작게 하려고 학생 때는 그랬죠. 어린 마음에 그게 참 싫었어요. 그런데 가수가 된 다음에는 큰 키가 너무 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선 무대에 섰을 때 체격이 좋고, 크고, 거기에 성대가 좋은 건 플러스, 플러스가 되는 거지.
아주 어려운 시기에 일본에 진출했잖아요. 요새 케이팝, 한류, 그러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20년 전에만 시작한 가수라 해도 아스팔트 길로 자가용 타고 갔다면, 난 정말 가방 하나 들고 흙길을 걸어서 간 사람, 트럭 타고 덜컹덜컹 간 사람이죠.
그 때만 해도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굉장히 노골적으로 무시할 때니까, 난 내 노래 밖에 무기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너희들보다 노래를 잘하고 체격도 좋고, 더 잘할 수 있다, 생각했고, 그렇지 않아도 좀 강한 성격이었는데 그런 환경에 있다 보니 점점 더 강해지더라고요. 강해지지 않으면 안돼, 그러면 지는 거야, 내가 이길 수 있는 건 내 실력으로 밖에 없어, 했지.
그렇게 일본, 동남아시아를 다녀보니 별로 재미가 없어, 같은 동양인들이고.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서 미국까지 가게 됐죠. 그런데 미국에 가니까, 어? 난 내가 키도 크고 멋있고 노래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게임이 안되더라고요. 다들 나보다 키도 크고 더 예쁘고 너무 노래 잘하고 영어까지 잘하니까.(웃음) 거기에서 기가 팍 죽는거죠. 그래도 아니다, 여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 했죠. 50년 전에 미국에 갔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한국 사람도 없고, 한국 음식점도 없고. 그런 생활, 그런 주위 환경 때문에 내가 내 자신을 철저하게 더 강하게 만든 거지.
무대 의상을 입은 후엔 절대 의자에 앉지도 않고, 김밥도 개수를 세어가며 드시는 등 평생 소식에 운동까지, 자기 관리를 잘 하시기로도 유명합니다. 메이크업, 의상 준비도 직접 하셨다고요.
아직도 의상은 제가 다 골라요. 나는 코디가 필요 없는 사람이지. 메이크업도 스무 살 적에 일본에 가니까 벌써 메이크업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한국에는 없었죠. 그런데 자기네들 스타일로 하얗게 일본사람처럼 만들어 놓는 거에요. 난 나의 개성이 있잖아. 눈도, 광대뼈 나온 것도 살려줘야 하는데. 그래서 난 내가 한다, 하고는 메이크업, 머리도 내가 했어요. 왜? 나 이상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쓰기 시작한 게 데뷔 40주년, 60살 되면서 부터에요. 무대에서는 괜찮은데 TV 나올때는, 내가 아무리 정성들여 메이크업 한 거하고 전문가가 한 건 정말 다르더라고요. 아, 이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구나, 했지.
가족들의 ‘가수 패티김’에 대한 믿음과 지지가 더욱 크다고 들었습니다. 은퇴를 이야기 하셨을 때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해요.
모두들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특히 딸들이. 50년 이상 노래하던 사람, 아직 정상에 있으면서 인기를 얻는 사람, 조명 아래서 박수 받던 사람이 이걸 포기한다는 건 정말 힘든 거에요. 거의 10여 년 간 은퇴를 생각해 왔어요. 언제가 좋을까 고민하다 이번에 결정을 내린 거죠. 가족들은 역시 언니답다, 엄마답다, 그래요.
요즘 가수들은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데, 가수 말고 다른 장르로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았던 게 후회 되진 않으세요?
노(No). 우연한 기회에 영화를 딱 한번 찍었었는데 신상옥 감독님이 하도 해 보자고 하셔서 한 거고. 뮤지컬은 계속 하고 싶었는데, 어렸을 때 여성국극에도 굉장히 심취했었고, 미국에 가서도 뮤지컬을 많이 하고 싶었는데 동양 여자가 캐스팅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너무 희박했거든요,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포기를 했지. 칠십 평생 살아왔는데 인생에 어떻게 아쉬움이 없겠어요, 많지. 아쉬움은 많지만 후회는 아주 조금 밖에 없어요.
수 많은 공연을 해 오셨으니, 기억에 남는 팬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한 15년 전에 만난 팬인데, 운동 하다 우연히 알게 되고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오래 전부터 제 팬이었어요. 생활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데도 제 공연을 많이 와서 봤더라고. 그런데 벌써 몇 년이야, 매년 겨울이면 김장김치를 꼭 해서 보내줘요. 절대 사먹지 말아라, 자기가 힘이 있어서 김장을 할 수 있는 날까지 김치를 보내주겠다, 지난 11월 말에도 받았어요. 오랫동안 제 생일 잊지 않고 꽃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고, 참 고맙죠, 팬들이.
데뷔 초창기나 젊은 날의 가수 패티김 회고를 들어보면 신비로운, 하늘에 떠 있는 별과 같은 이미지를 원하셨다고 하는데, 후반부에는 더욱 친근하게 팬들에게 다가가고자 하셨더라고요. 소극장 콘서트도 여시고요. 이번 투어는 어떤 무대가 될까요?
팬들과 더 가까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해요. 정말, 말 그대로 마지막이니까요. 악수하고 싶은 사람들 다 악수하고, 같이 노래하고 같이 울고 웃고. 그런 분위기가 될 거에요.
서울 공연은 체조경기장에서 하는데 처음 해보는 곳이기도 하고 무대가 워낙 크니까 모든 스케일이 다 커야 하죠.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어제도 프로그램 만드느라 새벽 1시까지 있고, 그랬는데, 지금 자는 시간 외에 머릿속에 공연 뿐이에요.
패티김의 삶은 불꽃이었다, 라고 이야기 하셨어요.
지금도 불꽃이에요. 정확히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내년에 투어의 마지막 무대, 가장 마지막 막이 내려오는 그 순간까지도 불꽃이에요. 그리고 그 후에도 불꽃을 피우면서 살 거에요. 그냥 평범하게는 안 살 거예요.
은퇴 발표 할 때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서 손주들하고 지내고, 그런 이야기를 좀 했더니 다 ‘평범한 김혜자, 할머니로 돌아간다’고 썼더라고요. 천만에. 난 평범한 김혜자, 할머니로는 안 돌아가요. 우리 손주들, 고것들한테만 난 할머니지. 몇 가지 생각한 계획들도 있는데 아직 발표할 정도는 아니고.
막 튀는 불꽃은 아니겠지만, 아름다운 황혼, 온 천지를 붉게 물드는 그 황혼빛의 불꽃이고 싶어요.
패티김의 마지막 공연, 예비 관객들에게 보내는 초대장에 어떤 글을 담고 싶으신가요?
우선, 변함없이 제 곁에서 오랜 세월 같이 지내온 팬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이번 공연에서 다 같이 손뼉 치면서 다 같이 흥겹고 행복하고 영원히 추억에 남는 하루를 가슴 속에 남기고 가시길 바랍니다. 저는 무대를 떠나지만 절대로 사라지지는 않아요. 그러니 패티김과 영원한 친구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배경훈 (Mr.Hodol@Mr-Hodol.com) , 패티김 공식홈페이지 / 디자인: 이혜경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을 만큼 수 많은 히트곡들을 노래한 가수 패티김이 은퇴를 선언했다. 1958년 데뷔 이후 54년간 김혜자가 아닌 패티김의 이름으로 자신의 인생을, 한국의 대중가요사를 노래에 담아 내었던 그녀. 이제 마지막 글로벌 투어를 통해 팬들과 무대에서의 안녕을 고한다. 일흔 넷의 나이를 전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그녀가 열정 가득한 노래로 태우는 마지막 불꽃이다.
첫째로 너무 즐거웠어요. 정말 그 자체를 즐겼어요. 2, 30대 아주 새까만 후배들인데 내 앞에서 내 노래를 한다는 게 얼마나 부담이 되겠어요. 긴장하면서도 너무 열창들을 했고. 그걸 보니 20대 초반에 내가 긴장하던 그런 모습? 추억들도 스쳐갔고.
이번에 국내 투어에 이어서 글로벌 투어도 할 예정인데, 미국, 캐나다, 호주까지, 그게 내년까지 갈 거에요. 그러고 나면 아마도 후배들끼리 그런 앨범을 만들지 않을까? (웃음) 저한테는 비밀로 하겠죠? 그런데 그런 느낌을 받고 있어요. (웃음)
초창기에는 스탠다드 팝, 세미 클래식 쪽으로 불렀죠. 제 음폭이 굉장히 넓었어요. 엄청 고음에서 저음까지 아주 자유롭게 오르내렸기 때문에. 어떤 성악과 교수 한 분이 패티김은 성악가가 되었어도 참 훌륭한 소프라노가 되었겠다, 그러기도 했었고.
학창시절에 1년간 국악을 정식으로 배우기도 했었어요. 가수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했을 때,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사이에. 학교 국악시간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창 소리가 나서 들어가서 봤지. 난 그 반도 아니었는데. 한참을 가르쳐 주시더니 누구 한번 해 보라고 그러는데 아무도 안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손을 번쩍 들고 했죠. 그런데 굉장히 잘 한다고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사실 여기 처음 들어왔습니다, 하는데 앞으로 가르쳐 주시겠다는 거에요. 그 당시 형편이 좀 안 좋았으니까 수업료도 낼 수 없습니다, 했더니 낼 필요도 없고 그냥 가르쳐 주시겠다고. 그래서 1년 이상 배웠어요. 그리고 국악콩쿨대회에 나갔는데 창 부분에서 1등을 했어요.
음악 학교를 제대로 다닌 사람도 아닌데 내가 세미 클래식컬하게 고음 처리를 잘 할 수 있는 건, 국악 때문이에요. 그걸 나중에 느꼈어요. 목청 트인다고 반 아이들이 다 같이 남산에 올라가서 소리 지르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국악이 굉장히 어려워요. 고음처리도 많고. 한국 고유의 창을 통해서 발성연습을 다 해 놓은 거죠. 나중에 패티김이 되고 나서 팝송 부르는데 그렇게 효과를 본 거죠. 공청 돈다고, 높은 음에서 다시 한번 꺾는 거. 고음에서 그 창법이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외국인들이 굉장히 특이하게 봤죠. 자기네 노래인데 굉장히 동양적으로 부른다고.
스스로 개척해 나간 거죠. 물론 두려움이 있었죠. 그런데 내 꿈과 열정이 더 강했기 때문에 두려움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그까짓 거 뭐가 두려워? 하면 되지. 그런 오기?(웃음)
없어요. 누구 하나 딱 정해서, 저 사람이 내 롤모델이다, 그런 게 없었어요. 특히 어려운 시절에 외국에 나가서 훌륭한 가수들의 장점, 특기, 그런 걸 많이 보고 듣고 배웠죠. 그때 배운 것이 오늘날까지 굉장히 많은 교훈이 되었고 이렇게 오랜 시간 노래할 수 있게 뒷받침이 되어 준 것 같아요.
정말 파격적으로 야한 드레스를 입었지. 부모님한테 참 너무나 좋은 재산을 받았는데, 좋은 성대, 좋은 체격, 좋은 건강, 피부. 이런 건 역시 반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야 해요. 그 다음이 후천적인 노력이죠. 음성도 타고 나야 해요.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 이때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작았어요. 난 그때 이미 지금 키였지, 168cm. 학생복 입고 전차 타고 그러면 여느 남학생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으니까 항상 무릎을 구부리고 좀 작게 하려고 하고. 어깨도 넓고, 내가 그렇게 태어났어요.
남학생들이 키다리, 꺽다리, 그러고 놀리니까 키를 작게 하려고 학생 때는 그랬죠. 어린 마음에 그게 참 싫었어요. 그런데 가수가 된 다음에는 큰 키가 너무 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선 무대에 섰을 때 체격이 좋고, 크고, 거기에 성대가 좋은 건 플러스, 플러스가 되는 거지.
아주 어려운 시기에 일본에 진출했잖아요. 요새 케이팝, 한류, 그러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20년 전에만 시작한 가수라 해도 아스팔트 길로 자가용 타고 갔다면, 난 정말 가방 하나 들고 흙길을 걸어서 간 사람, 트럭 타고 덜컹덜컹 간 사람이죠.
그 때만 해도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굉장히 노골적으로 무시할 때니까, 난 내 노래 밖에 무기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너희들보다 노래를 잘하고 체격도 좋고, 더 잘할 수 있다, 생각했고, 그렇지 않아도 좀 강한 성격이었는데 그런 환경에 있다 보니 점점 더 강해지더라고요. 강해지지 않으면 안돼, 그러면 지는 거야, 내가 이길 수 있는 건 내 실력으로 밖에 없어, 했지.
그렇게 일본, 동남아시아를 다녀보니 별로 재미가 없어, 같은 동양인들이고.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서 미국까지 가게 됐죠. 그런데 미국에 가니까, 어? 난 내가 키도 크고 멋있고 노래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게임이 안되더라고요. 다들 나보다 키도 크고 더 예쁘고 너무 노래 잘하고 영어까지 잘하니까.(웃음) 거기에서 기가 팍 죽는거죠. 그래도 아니다, 여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 했죠. 50년 전에 미국에 갔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한국 사람도 없고, 한국 음식점도 없고. 그런 생활, 그런 주위 환경 때문에 내가 내 자신을 철저하게 더 강하게 만든 거지.
아직도 의상은 제가 다 골라요. 나는 코디가 필요 없는 사람이지. 메이크업도 스무 살 적에 일본에 가니까 벌써 메이크업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한국에는 없었죠. 그런데 자기네들 스타일로 하얗게 일본사람처럼 만들어 놓는 거에요. 난 나의 개성이 있잖아. 눈도, 광대뼈 나온 것도 살려줘야 하는데. 그래서 난 내가 한다, 하고는 메이크업, 머리도 내가 했어요. 왜? 나 이상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쓰기 시작한 게 데뷔 40주년, 60살 되면서 부터에요. 무대에서는 괜찮은데 TV 나올때는, 내가 아무리 정성들여 메이크업 한 거하고 전문가가 한 건 정말 다르더라고요. 아, 이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구나, 했지.
모두들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특히 딸들이. 50년 이상 노래하던 사람, 아직 정상에 있으면서 인기를 얻는 사람, 조명 아래서 박수 받던 사람이 이걸 포기한다는 건 정말 힘든 거에요. 거의 10여 년 간 은퇴를 생각해 왔어요. 언제가 좋을까 고민하다 이번에 결정을 내린 거죠. 가족들은 역시 언니답다, 엄마답다, 그래요.
노(No). 우연한 기회에 영화를 딱 한번 찍었었는데 신상옥 감독님이 하도 해 보자고 하셔서 한 거고. 뮤지컬은 계속 하고 싶었는데, 어렸을 때 여성국극에도 굉장히 심취했었고, 미국에 가서도 뮤지컬을 많이 하고 싶었는데 동양 여자가 캐스팅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너무 희박했거든요,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포기를 했지. 칠십 평생 살아왔는데 인생에 어떻게 아쉬움이 없겠어요, 많지. 아쉬움은 많지만 후회는 아주 조금 밖에 없어요.
한 15년 전에 만난 팬인데, 운동 하다 우연히 알게 되고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오래 전부터 제 팬이었어요. 생활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데도 제 공연을 많이 와서 봤더라고. 그런데 벌써 몇 년이야, 매년 겨울이면 김장김치를 꼭 해서 보내줘요. 절대 사먹지 말아라, 자기가 힘이 있어서 김장을 할 수 있는 날까지 김치를 보내주겠다, 지난 11월 말에도 받았어요. 오랫동안 제 생일 잊지 않고 꽃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고, 참 고맙죠, 팬들이.
팬들과 더 가까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해요. 정말, 말 그대로 마지막이니까요. 악수하고 싶은 사람들 다 악수하고, 같이 노래하고 같이 울고 웃고. 그런 분위기가 될 거에요.
서울 공연은 체조경기장에서 하는데 처음 해보는 곳이기도 하고 무대가 워낙 크니까 모든 스케일이 다 커야 하죠.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어제도 프로그램 만드느라 새벽 1시까지 있고, 그랬는데, 지금 자는 시간 외에 머릿속에 공연 뿐이에요.
지금도 불꽃이에요. 정확히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내년에 투어의 마지막 무대, 가장 마지막 막이 내려오는 그 순간까지도 불꽃이에요. 그리고 그 후에도 불꽃을 피우면서 살 거에요. 그냥 평범하게는 안 살 거예요.
은퇴 발표 할 때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서 손주들하고 지내고, 그런 이야기를 좀 했더니 다 ‘평범한 김혜자, 할머니로 돌아간다’고 썼더라고요. 천만에. 난 평범한 김혜자, 할머니로는 안 돌아가요. 우리 손주들, 고것들한테만 난 할머니지. 몇 가지 생각한 계획들도 있는데 아직 발표할 정도는 아니고.
막 튀는 불꽃은 아니겠지만, 아름다운 황혼, 온 천지를 붉게 물드는 그 황혼빛의 불꽃이고 싶어요.
우선, 변함없이 제 곁에서 오랜 세월 같이 지내온 팬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이번 공연에서 다 같이 손뼉 치면서 다 같이 흥겹고 행복하고 영원히 추억에 남는 하루를 가슴 속에 남기고 가시길 바랍니다. 저는 무대를 떠나지만 절대로 사라지지는 않아요. 그러니 패티김과 영원한 친구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배경훈 (Mr.Hodol@Mr-Hodol.com) , 패티김 공식홈페이지 / 디자인: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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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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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y0**님 2012.05.01
우리의 가슴속에 잊지못할 노래로 다가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지지않는 태양으로 남아주세요. 멀리서 열심히 응원하고 사랑하겠습니다. Forever patt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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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님 2012.05.01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네요... 어려운 결단과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시는 모습에 진심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수많은 '최초' 수식어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신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 패티김님~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체조경기장 공연에서 꼭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