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차지연 “내가 원하는 내 모습에 다가가기”


 
인터뷰 중 가장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한 인터뷰이가 아닐까.  차지연은 뮤지컬 배우가 될 수 있었음에, 쉽지 않았던 20대가 있었음에, 춤과 노래, 관능이 있는 ‘카르멘’ 역을 맡게 되었음에 인터뷰 내내 감사했다. 이토록 겸손한 그녀가 무대 위에선 위험천만한 매혹을 지닌 마성의 여인, ‘카르멘’으로 완벽하게 변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이다> <잃어버린 얼굴 1895>에 이어 <카르멘>까지 2013년, 단단하게 내공을 쌓아온 차지연과의 만남.


“정형화된 이미지 피하고 싶다”

카르멘은 그 동안 차지연씨가 연기한 역들과는 색깔이 다르다.
주변 사람들이 왜 늘 버림받거나 상처받는 작품을 주로 하냐고 묻곤 했다. <카르멘> 역시 슬픈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내가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기대가 크다. 열정적으로 춤을 추면서 소위 말하면 관능적이라고…(웃음) 말하는 부분들을 드러낼 수 있는 캐릭터다. 이런 역할은 내가 맡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 해보고 싶었다. 감사할 뿐이다.

특히 바로 전작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의 열연이 기억에 남는데 말이다.
굉장히 한국적인 작품을 하고 바로 <카르멘>을 하는 건데, 엄청난 차이로 확확 바뀌는 게 너무 재미있다. 앞으로도 지향하는 바고, 작품을 할 때도 색깔이 겹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가지 이미지 안에서 정형화되는 건 싫은 것 같다. 테트리스처럼 맞춰지면 깨지고, 맞춰지면 깨지고를 반복하면서 나아가는 게 배우의 매력이 아닌가 한다. 이번엔 늘 키가 크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콤플렉스가 많았기 때문에 내 몸을 드러내서 춤을 추면서 이를 깨고 싶다.

그래서인지 포스터 속 과감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런 컨셉트를 원했다. 현장에 의상이 많았는데 의상 선생님과 상의해서 그 한 벌을 골랐다. 이왕 정열, 섹시함을 표현해야 한다면 어정쩡한 의상은 싫었다. 작품 색깔과 동떨어지지 않는다면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 원래는 선 채로 찍었는데, 사진 작가님에게 모래 위에 앉은 포즈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원래 타고나길 근육이 있는 체질인데 이번 포스터에서는 도움이 좀 된 것 같다. (웃음)

<카르멘>은 원작 소설부터 시작해서 오페라, 영화 등으로 변주돼 왔다. 원작에선 사랑보다 자유를 추구하는 집시 여자인데, 뮤지컬에선 어떻게 잡아가고 있나.
원작은 집시로서 충실한 삶을 살다가 홀연히 떠나는 여인인데, 우리 작품에서 카르멘은 가진 정열을 사랑에 다 쏟아 붓는 여자다. 나에게 카르멘은 누구보다 당당하고 강한 여자였지만 연습을 해보니 시선이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거칠고 당당한 모습은 이 여자가 살아오면서 수없이 받았을 상처와 아픔들이 반어법적으로 표현된 게 아닐까. 카르멘의 어린시절은 어땠을까도 생각해봤다. 개인적으론 고아였을 것 같다. 허름한 뒷골목에 쪼그려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주시하는, 총명한 기운이 남달랐을 아이. 아무렇지 않게 ‘나랑 한번 할래요?’ 말하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서 당찬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래도 어딜 가나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마성의 여자 역할 아닌가.
미치겠다. 남자가 등장만 하면 내가 좋다고 서로들 싸운다. (웃음) 굉장히 기분 좋고, 살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재미있다. 지금 연습하면서도 어색하거나 부끄러워해서 상대역인 성록 배우도 왜 자길 안보고 연기하냐고 하고! (웃음) 실제로도 밀당 같은 걸 몰라서 친구들이 바보라고 부른다. 어려서부터 있었던 콤플렉스 때문인 것 같은데 다행히 <카르멘> 사람들이 늘 예쁘다고 해준다.

섹시함 하나만이 매력인 여인은 아닌 거 같다.
맞다. 섹스어필 하나만으로 카르멘을 나타내기 힘들다. 대본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느끼는 카르멘이란 여자는 똑똑하고 현명하다. 집시 특성상 굉장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겪지 않나. 공부한 게 아니라 경험을 토대로 고스란히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거다. 남자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깨어있는 사람이다. 본능적이면서도 이성적인 면이 함축된 캐릭터다.

“내가 꿈꾸던 내 모습에 가까워져”

카르멘, 아이다, 송화 등 여배우라면 탐낼 역할을 거의 모두 맡아왔다.
참 복이 많은 것 같다. 이제는 연예인이 아니면, 사실 쉽게 주연을 맡을 기회가 많지 않다. 예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시대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이를 논하자는 게 아니라, 그런 흐름을 봤을 때 그만큼 감사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분들이 나라는 사람에게 힘을 주셨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하고, 그래서 배우의 길을 끝까지 남겠다고 말씀 드렸다.

감회가 남다른 것 같은데.
전에도 이야기 한 적 있지만, 뮤지컬을 시작하면서 삶을 다시 사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동생을 데리고 홍대에서 살았다. 9년 동안 옥탑 컨테이너박스 집에서 살면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도 꿈은 있었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광고 전단지를 돌리고 저녁에는 길에서 호객행위를 하거나 서빙을 했다. 얼마 전 우연치 않게 홍대에 다시 가게 됐는데, 불과 7년 전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물론 지금도 넉넉한 건 아니지만 (웃음) 기분이 찡하더라.

그 동안 겪었던 일들이 연기에 영향을 주나.
물론이다. 당시에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생각할 만큼 힘들었다. 그런 상황이 무대에서 비슷하게 펼쳐질 때 감정이 훅 튀어나오기 때문에 차지연의 송화, 차지연의 카르멘이 탄생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아팠던 기억들을 고스란히 끄집어 내고 토해내면서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은 그런 아팠던 경험마저 감사하고, 그게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을까 싶다. 

작년 <아이다>로 잠깐 만났을 때, ‘뮤지컬을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 안 했다’고 말했었다. 이렇게 무대를 진심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있었나.
작년 <아이다>가 가장 큰 계기였다. 많이 늦었지 않나. 그 전까지는 배우라는 호칭을 붙이는 게 부끄럽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뮤지컬 배우는 노래를 잘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왜 뮤지컬 가수가 아니라 뮤지컬 배우라고 칭하지? 이 부분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고민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이다>는 오랜만에 하는 작품이었고 나와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해내야 한다는 부담과 욕심이 너무 강했다. 그러니까 절대 빛을 발할 수 없었다.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짐을 느꼈다. 그리고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 보다 중요한 게 그 드라마 안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사는지임을 깨달았다. 그 다음 작품이 <잃어버린 얼굴 1895>였는데, 그 작품을 통해 다시 혹독하게 배웠다. 가사 쓰고 대사 쓰는 작업을 하고 인물 공부도 계속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인물에 대한 깊이는 점점 깊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게 너무 재미있었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는 가수 활동에 주력했다. 어려서부터 꿈을 이룬 것 아닌가.
아주 어려서부터 꿈이 가수였기 때문에 포기를 못했다. 우연찮은 기회에 소속사가 생겼고 가수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해봤는데, 너무 힘들었다. 어떤 괴리감이 가장 컸냐 하면, 배우라는 사람은 하얀색 도화지에 이번 역할은 빨간색, 이번 역할은 보라색으로 색을 입혀 가는데, 가수라는 세계에 가니 나에게 넌 어떤 색이냐고 물었다. 색깔이 입혀 지는데 익숙한 사람한테 먼저 어떤 색깔이냐고 물으니 당황스러웠다. 나에겐 엄청난 차이였고, 그걸 이겨내지 못하니 힘들기 시작했다. 혼자서 활동하는 게 익숙한 나에게는 소속사가 있다는 것도 낯설었다. 그냥 ‘Yes or No’ 하면 될 것을 거쳐 거쳐 거쳐 대화를 하고, 다시 거쳐 거쳐… 수 일이 걸렸다. 그게 회사의 일이고 룰인데 난 몰랐던 것이다. 지금은 누구에게 허락 받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은 작품, 오디션 봐서 당당하게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그래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갈등이 많았다. 인지도라는 것은 티켓판매와 직결되고... 그렇기 때문에 제작사를 탓할 이유가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빵 뜨진 않더라도 브라운관에 계속 얼굴을 비춰서 내가 뮤지컬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야 할까. 아님 마음 다잡았듯이 배우로 끝까지 갈까. 고민이 많고 지금도 갈등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인지도가 떨어져서 지금과 같이 <카르멘>을 못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멋지게 지고 싶다. 소극장, 중극장, 연극, 다 하면서 배우로 살고 싶다.

심지가 단단해 진 것 같다.
난 항상 불안정한 인간이었다. 배우로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 인간으로서 매우 불안정했다. 모두 나에게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다, 잠수 탈 것 같다고 했다. 늘 그랬다. 그런데 올해부터 중심이 점점 생기는 것 같다. 내가 원했던, 꿈꾸던 인간상에 점점 가까워 지는 것 같다.

꿈꾸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
<서편제>를 자람 언니와 함께 하면서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몸집도 작고, 늘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 안에 강한 뿌리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꿈꿨던 것 같다. 그러려면 뭐부터 바꿔야 하지? 고민을 많이 했다. 난 항상 연연했던 것 같다. 이것도 골치 아프고, 저것도 속상하고, 저 사람은 나한테 욕을 했고, 이건 어떻게 해결 해야 하고…. 그런데 어느 순간 덜렁 혼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부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감사하면서 살면 될 것을, 부질없이 동동거리면서 붙잡고 있었다. 이걸 놔버린 느낌? 시기했던 마음, 피해의식 같은 게 많이 없어졌다.

이번 <카르멘>에서는 여러모로 배우 차지연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것 같은데.
탄탄한 드라마 위에 세워진 인물을 보여드릴 것이다. 그리고 춤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웃음) 플라멩코는 너무 너무 배우고 싶었던 춤이다. 지금 발톱이 빠질 것 같고, 발바닥이 남아나질 않는데도 정말 좋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
나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에겐 정말 감사하다. 같이 잘 늙어서 나중에는 좋을 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다. 내가 약간 거만해지려 하면 채찍질 해주시고…좋은 인간으로 늙어가겠다.


글: 송지혜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ong@interpark.com)
사진: 스튜디오 춘(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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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1

  • chlgk** 2013.11.20

    우와... 지연배우님 정말 멋져요!! 앞으로도 무대위에서 더 자주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