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적 세상, 그 이면의 이야기 <엠 버터플라이> 이석준, 이승주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를 보던 프랑스 대사관 직원 르네 갈리마르는 주인공 여인 초초상에게 한눈에 매료된다. 미군 장교와 사랑에 빠져 개종까지 하고 결혼할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남자에게 헌신하지만 한낱 유희의 대상이었을 뿐 처참히 버려지는 그녀의 운명. 초초상과 그 배역을 연기하는 미묘한 여인 '송'을 향한 환상은 수십 년 르네를 지배하기에 이르고, 결국 누가 '나비'인지 스스로도 미궁에 빠져버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전 세계 뿐 아니라 2012년 한국 공연 당시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연극 <엠 버터플라이>가 막강한 캐스팅과 함께 다시 찾아온다. 자신이 낳은 환상 속에 결국 스스로 갇혀 버린 르네 갈리마르 역의 이석준, 이승주는 동성애, 순종적 동양인에 대한 서양인의 동경 등 그간 제법 단순하게 정의했던 이 작품의 이면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를 더한다. 과연 마담 버터플라이가 되는 사람은 누구이며 <엠 버터플라이>는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지고 싶은 것일까. 이들의 대화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좀더 깊게 무대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파고들 것이 있는 작품에 끌린다

<스테디 레인>에 이어 <엠 버터플라이>까지 연이어 밀도 높은 연극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석준
(이하 석준): 우연의 일치이기도 하지만 내 성향이 그렇기도 하다. 평소에 굉장히 밝은 사람이라 무의식에 반대 성향에 대한 욕구가 큰 것 같다. 작품을 택할 때도 한번에 대본이 읽히는가를 보고, 한번에 쭉 읽혔다가 '이게 뭐지?'하고 다시 봐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작품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작품의 어떤 부분을 더 파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만 작품을 한다.

얼마 전 공연을 마친 <스테디 레인>도 그렇게 택한 작품이겠다.
석준: 하면서 너무 행복했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공연이 끝나면 내가 무대 밖으로 기어 나가겠다며 걱정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힘들다기 보다는 다음 공연이 있든 없든 상관 없이 무대 위에 다 쏟아내고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해왔던 공연 중에 가장 강하게 밀어 붙였던 것 같다. 커다란 무언가를 얻었던 작품이고, 내 인생의 세 작품 안에 들어갈 작품이다.

배우 이석준 인생의 세 작품은 무엇인가?
석준
: <틱틱붐>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그리고 <스테디 레인>이다.

이승주의 전작인 국립극단의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역시 농밀한 무대였다.
이승주
(이하 승주): 원래 다른 선배님이 준비하시던 배역이라 연습에 늦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처음 대본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모든 연극이 치열하겠지만 이 작품엔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었다. 예전에 사람들이 "제일 아쉬운 게 뭐야?" 라고 물어보면 아쉬운 게 있어도 표현하지 않았다. 치부를 들키는 것 같기도, "그 부분은 못했으니 이해해줘"라고 핑계를 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든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것에 다른 핑계나 이유는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이 제일 아쉽다고 말할 수 있다. 꼭 한번 더 공연 해보고 싶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석준이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의 이승주를 극찬한 바 있다.
승주: 정말? 감사합니다. (웃음)
석준: 어떤 배우가 일주일 만에 대사를 다 외워왔고, 그리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김광보 연출님께 들었다. 근데 난 내 눈으로 보기 전엔 안 믿는 사람이다. (웃음) 나중에 공연을 가서 봤는데 깜짝 놀랐다. 같이 간 <스테디 레인>팀이 다들 연습 중이라 초주검이 되어서 몇 번 졸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승주 씬은 거의 다 기억한다. 너무 잘했다. 이 친구가 표현해 내려는 수많은 것들이 굉장히 재미있게 읽혔다. '와, 저 친구 무섭게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주는 KBS 21기 공채 탤런트이기도 하다.
석준
: 그러냐? (박장대소)
승주: 사실 어디 가서 그 이야길 잘 안 한다. 3개월 연수만 받았었고 몇 번의 방송활동도 공연을 좋게 봐주신 감독님이 캐스팅해 주셔서 하게 된 것이었다. 방송이 싫은 건 아니지만 난 연극이 더 좋고 잘 맞는다. 시작도 연극으로 했고 지금도 연극을 하고 있지만 아직 공연 쪽에서 자리잡은 배우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송에서 인지도 있는 배우도 아니기 때문에 탤런트라는 말이 붙을 때마다 스스로 애매한 느낌이 든다. 나중에 정말 인지도를 많이 얻고 나서는 좀 더 많은 분들에게 좋은 연극,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친(?) 남자와 무섭게 클 배우와의 만남

<엠 버터플라이>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마주했다.
승주: <스테디 레인>은 두 번 봤는데 처음 볼 때는 '너무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두 번째 봤을 때는 너무 좋아서, 정말 너무 좋아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선배님께 문자를 보냈다. 그게 아마 처음 연락 드린 걸 거다.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그걸 넓게 펼치지 않고 응축해서 보여주는 배우들이 있는데, 내가 그걸 잘 못해서인지 그렇게 하는 배우들을 동경한다. 근데 (석준) 선배님에게서 그 모습을 봤다. 공연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유명한 공연들은 많이 보려고 하는데 종종 실망을 하게 된다. 무대 위에 난무하는 그 거짓말들이 난 싫다. 그리고 스스로도 많이 반성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인물 자체가 말하고 서 있고 걸어 다니는 걸 봤다. 너무 좋아서 그 마음을 표현 안 할 수가 없었다.

석준: 그렇게 감동받은 문자가 아니었는데 오늘 감동받네. (웃음)

승주: 그래서 선배님이 굉장히 거친 분인 줄 알았다. 저 역은 본성이 거칠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싶었다. 그래서 원래 내가 조심스러운 성격인데 더 구석에 쭈구리처럼 있었다. (웃음) 그런데 연습을 해보니 완전 다른 거다. 그래서 정말 연기를 잘 하신거구나, 생각하게 됐다.

두 사람 모두 연이어 김광보 연출과 함께 하게 되었다.
석준
: 뮤지컬을 할 때도 노래 한마디, 대사 한마디에 감정을 통일시키고 그 밑바탕을 가지고 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굉장히 집요한 편인데, 연출이 그걸 해 주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배우와 연출이 같이 만들어가는 작업에서 상대방의 생각을 읽어주지 못하거나 배우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연출, 그런 공연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런 면에서 <스테디 레인>할 때 굉장히 편했다. 김광보 연출님은 스스로 좋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정말 좋은 거라고 믿을 수 있게 해 줬고, 이상하다 느끼는 부분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다.


또 연출님이 굉장히 깊숙이 대본을 파고들면서도 눈으로 봤을 때 흘러가는 게 재미가 없으면 거기에서 브레이크를 건다. 그리고 왜 재미가 없는지를 서브 텍스트를 통해서 계속 파고 들어가는 스타일이다. 사람들은 글자 하나하나를 다 잡아가는 게 파고드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난 반대라고 생각한다. 극이 잘 흘러가지 않고 재미가 없을 때 파고들어가야 하고 김광보 연출님이 기가 막히게 그걸 딱 집어내신다. 그 순간들을 경험해 보니 이번 작품도 굉장히 잘 해 주실 거라는 철통 같은 믿음이 있다.

승주: 2010년에 <내 심장을 쏴라>를 시작으로 이번이 김광보 연출님과 네 번째 작업인데, 내 프로필의 절반 이상을 같이 한 셈이다. 다른 연출가들과도 작업해 봤지만 그것 조차도 김광보 연출님의 공연을 보고 캐스팅된 경우이다.

그런데 스스로 가장 많은 발전을 하는 건 김광보 선생님과의 작업이다. 내가 그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내 안의 갈증이나 여타의 많은 것들이 채워진다. 처음 작업했을 때보다 지금 더 발전된 배우가 되었는지는 스스로 판단할 부분은 아닌 것 같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긴 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예전엔 어리석었구나,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하곤 한다. 1, 2년 후면 지금의 나를 그렇게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 때문에 굉장히 많은 것들을 느끼고 싶다.

<엠 버터플라이>는 영화로도 익히 알려져 있고, 지난 2012년 공연에서도 크게 흥행한 바 있다.
석준
: 사실 이 작품은 내 코드가 아니다. 남자가 내 앞에서 알짱거리는 게 싫다. (웃음) 게다가 영화를 동성애 코드로 봤었고, <엠 버터플라이> 역시 현재 대학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동성애 코드가 오묘하게 섞인 작품 중 하나, 스타일리쉬한 연극일 뿐 깊이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진 않을 것이란 생각에 공연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이번에 대본을 보면서 알게 됐다. 알아갈 수록 좋은 더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된 게,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 그 이면에 담긴 이야기, 그 밑에 또 어떤 사상이 깔려 있다. 처음 보는 사람, 공연 마니아, 그리고 더 작품 깊이 들어가고 싶은 사람, 세 층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 것 그 밑의 이야기가 중요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이 아니라면, <엠 버터플라이>는 어떤 작품인가?
석준
: 마지막 반전이 여자라고 믿었던 사람이 남자로 전복되는 과정인데, 그 이후에 한번 더 반전이 있다.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의 이야기에 르네, 송의 이야기가 대입되는데 결국 르네가 마담 버터플라이고, 르네가 마담 버터플라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나를 매몰차게 버리고 간 사람이 되었다는 부분이다. 가치의 전복, 눈에 보여지는 것 이상의 무엇,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맡은 '르네 갈리마르'는 소심하고 나약한, 찌질한 사람이라고 종종 해석되곤 한다.
승주
: 대본에 르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몇 장면이 나오고 성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서양에서 한창 사춘기인 남자가 그런 대사를 한다는 것 자체에서 르네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르네가 찌질한 사람은 아니다. 대사관 직원에다가 정열을 버린 자리에 실리를 선택해 넣은 사람 아닌가. 누군 결혼을 할까 말까,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웃음) 르네는 선택이라는 걸 하지 않느냐. 결코 찌질하지 않은 사람이다.

석준: 처음 르네가 찌질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럼 왜 우릴 선택했지?(웃음) 그런 생각을 했는데, '나는 여자들이 나에게 꼬리칠 만한 남자가 되지 못합니다'라는 대사 때문에 겉모습이 찌질한 남자처럼 보여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다. 르네가 인생의 순간 순간에 찌질한 선택을 하는 것일 뿐이고, 잘못된 만남, 잘못된 선택, 이런 찌질한 선택을 하게 만든 그 사람의 생각, 욕망, 욕망에서 비롯된 뒤틀림 등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이게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승주: 볼펜 앞 꼭지를 돌려 빼면 작고 긴 스프링이 있는데 그걸 누르면 스프링이 줄어드는 것처럼 르네에게 일생 어떤 압박이 있었던 거다. 스프링을 누르던 힘은 르네 자신일 수도, 아니면 외부적인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르고 있던 힘이 없어지면 스프링이 튕겨 나가는데 스프링을 놓게 한 계기가 송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스프링을 누르고 있던 힘이 클수록 그 힘에서 벗어나게 되면 더 많이 멀리 튀지 않냐. 르네가 바로 그런 사람 같다.

그렇다면 르네는 왜 순간순간 찌질한 선택을 하는 남자가 되었을까?
석준
: 단서가 될 만한 장면들이 작품 속에 다 나온다. 청교도적, 기독교적 사고관을 가지게 되어서 여자를 원하면서도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기도, 억제 당하며 살아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심리적으로 치유 받지 못한, 자존감이 높지 않은 사람, 그런 의미로 찌질한 사람이 르네 같다. 이런 단서들을 작품 속에서 찾아내는 재미 때문에 재 관람 비율이 높은 것 같기도 하다.

동양에 대한 환상이 르네가 송에게 매료된 이유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르네에게 송은 어떤 인물일까?
승주
: 이미 내가 갖고 있지만, 갖고 싶은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르네 안에 송의 모습이 분명 있고, 그렇기 때문에 송에게 끌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르네는 자신이 그런 모습을 갖고 있는 줄 모를 뿐이다. 반대로 내게 없는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끌리는 것처럼 르네와 송 사이의 끌림엔 여러가지 면이 작용할 거라 생각한다. 그게 남성과 여성, 동양과 서양 등과 같은 것들로 단정짓는다면, 내가 그렇게만 표현하려고 할까 봐 일부러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물로서 충실하면 작품의 주제를 물 흐르듯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석준: 승주가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한 것 같다. 르네가 처음 송을 봤을 때가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 공연이니, 송의 동양적인 모습에 먼저 매료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송에게 빠져든 건, 송이 동양적인 여인의 이미지를 뒤엎는 이야기를 할 때였다.

오히려 르네가 서양에서 자랐지만 순종적인 삶을 살았고, 송은 동양인이나 당시 서양인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대본에 '동양 여잔데 서양에서 공부를 했나 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만 보더라 해도 아름다운 외모를 넘어서 알맹이가 채워진 사람으로 르네에겐 보였을 거다. 그런 반대적인 모습이 서로를 끌어당겼다고 생각을 한다. 동서양은 단지 겉모습일 뿐, 그 안의 전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르네의 부인 헬가도 역시 일정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왜 그녀에겐 르네가 끌리지 않는걸까?
석준
: 아빠만 잘났던 거 아닌가?(웃음) 부인은 겉의 삶을 즐기는 사람이다. 르네 대사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게 여자에게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상대방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려면 그가 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한다. 소위 아이레벨(eye level)이 맞아야 하는데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를 봤다고 말해도 헬가는 그거 좋다고 한마디 할 뿐이다. 어느 한 부분의 리듬만 아는 여자라 단 한번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을 거다.

믿고 함께 나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축복

송이 르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수치심마저 당신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면의 뜻을 파악하기 이전에 송은 르네에게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여자이고 그런 여자로 인해 르네는 자신감을 얻는 모습이 그려진다. 정말 남자들은 그러한 심리가 있는가?
석준
: 그런 말을 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배울게 많았고 언제나 든든했던 아빠가 "아빠가 항상 널 지켜줄거야"라고 말할 때 그 이야기를 듣는 아들의 뿌듯함과, 늘 사고를 치고 다녔던 아빠가 그 말을 했을 때 아들의 마음이 다른 것처럼, 헬가가 그런 말을 했을 때와, 감히 내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송이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르네의 반응이 다를 것이다.

처음엔 르네가 그 글귀를 읽고 거부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한 사람을 짓밟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점점 내 안에 자신감을 높이는 결과를 낳는다. 나에겐 아내(배우 추상미)가 그런 사람이었다. 아내는 인기 절정이었을 때 아무것도 없는 나와 연애를 시작했는데, 나중에 왜 나와 그렇게 오래 만났냐고 물어보니 내 비전을 봤다고 대답하더라. 그런 생각이 고맙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용기다. 아내에게 가장 높이 살 만한 게 자존감이다. 또 아내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언제나 치열하게 준비하는 사람에겐 길이 열려있다고 믿게 된 것 같다. 실제로 아내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내 인생이 달라졌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르네라는 인물이 굉장히 이해가 많이 된다.

르네라는 인물, 더 나아가 <엠 버터플라이>라는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건 '환상'일 것이다. 두 사람이 가진 환상은 무엇인가.
승주: 지금 가진 가장 큰 환상은 연극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거다. (웃음)
석준: 정말 불가능한 꿈을 가지고 있구나. (웃음)


승주: 밤마다 머릿속에 그리고 생각하면 어떤 결말이 나지 않을까? 막연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에, 선배님처럼 이뤄질 수도 있고. 같이 무엇인가 이뤄감에 있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존재를 만난다는 건 정말 굉장한 축복 아닌가. 그런 것들을 항상 꿈꾼다.

석준: 20대 때 멋모르고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느 정도 지나고 나니, 100만원을 버니까 10만원이 부족하고, 1000만 원이 있으면 100만원이 모자랐다. 항상 모자란다. 그걸 채운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여전히 나의 꿈이지만 그건 작품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순간에 도달하는 삶을 뜻한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찾아내지 못하면 10년 뒤의 행복도 못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20대 때 힘들고 괴로웠고 그래서 죽을 결심을 한번 해 봤던 사람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날 돌아서게 만든 게 무대였다. 좋아하는 거 한번은 해 봐야지, 라는 생각에 밟은 무대는 서는 것 자체가 굉장히 좋았다. 무대에 서면서 아내를 만났고 아이를 가져서 낳았고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이 무대를 통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무대 위에서 살고 싶고 언젠가 삶의 마무리 역시 무대 위에서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 디자인: 최주희(honeyneko@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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