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중심엔 우리가 있다' <레베카> 민영기 오만석 엄기준

<레베카>의 세 명의 막심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연습 시간을 제외하곤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귀한 자리임이 분명하다. 저마다 다른 매력이지만 ‘멋지다’는 명제를 고스란히 뿜어내어 왔던 이들과의 만남에 앞서 기자를 비롯한 많은 촬영진들과 <레베카> 홍보팀도 살짝 긴장한 것이 사실.
 
하지만 가장 먼저 인터뷰 장소에 도착해 다른 두 형님들을 기다리는 동안 분주했던 촬영장소를 피해 조용한 자리를 안내받아도 “그냥 여기 있어도 상관 없어.”라며 한쪽 의자에 털썩 앉아 휴대전화 게임에 빠른 속도로 집중하던 엄기준도, “너 벌써 왔니? 으하하하.”라며 숨길 수 없는 성량으로 방안에 하울링을 만들던 민영기도, 그리고 차마 다 옮길 수 없을 정도로 하이-앤-로우 개그를 발사하며 인터뷰 내내 참을 수 없었던 웃음을 만들던 오만석도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남자들은 분명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무대와 함께 서로를 봐왔던 세 사람, 그리고 이제는 <레베카>라는 한 배를 타고 멋진 몬테까를로 해변에서 출발될 항해를 준비하는 세 막심과의 이야기는 그윽한 와인과 함께 그렇게 편안히 이어졌다.

달라도 너무 다른 민막-오막-엄막심

민영기 : 같이 작품 하는 건 처음인데, 서로 색이 너무 달라서 되게 좋아요. 오히려 서로 얘기를 많이 해 줄 수도 있고. 스타일이 비슷하면 오히려 어려울 수 있거든요. 보는 것도 훨씬 재미있을걸요?

오만석 : 영기 형은 한마디로 파괴력이 강해져요. 막심한테 불현듯 나오는 그 엄청난 에너지의 광기 어린 모습들이 살짝 살짝 나오는데. (민영기 : AB형이라 욱 하는게. (웃음)) 그런 파워풀한 잠재력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막심이 영기 형이에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감이 있고.
엄기준 : 맞아, 막심은 AB형이야.

민영기 : 기준이는 굉장히 진중한, 젠틀한 막심이죠. 본인은 미국식 신사라고 하지만 장면 연습하는 걸 보면 막심으로서 굉장히 친절해요. 셋 중에 가장 친절한 엄막심! 이를테면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하고 대사를 하면서 상대방 의자를 쓱 빼주는. (일동 “어우~”) 그래서 제가 한번 따라 해 봤는데, 안 어울려서 안 했어요. (웃음)

오만석 : 전 오히려 공연 들어가면 장난을 아예 안 하는데, 연습할 때는 가관이죠. (웃음)


막심 드 윈터

민영기 : 원래 이름이 되게 길어요. 뭐지? 풀 네임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길던데. 외워서 공연 때 한번 써 먹을까? 하하하, 진짜 벼르고 있거든요.
엄기준 : 나 진짜 할거야, 막공 때.
오만석 : 오스트리아 작품이라 독일식으로나 영국식으로나 맥심이 아닌 막심으로 부르는 게 맞아요. 아마 ‘막시무스’에서 그 어원이 나오지 않았을까 해요.

Who is 막심?

오만석 : 막심에겐 ‘영국신사’라는 말 보다 ‘외로운, 부유한’ 영국신사라는 것이 더 중요해요. 친구를 사귀거나 사람 접하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은 사람, 정말 마음을 터놓고 누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사람이죠. 한번 실수로 사람을 잘못 사귀면 그것 때문에 큰 파문이 일어나고. 레베카와의 일들처럼요. 반면에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삶의 방향이 좋은 쪽으로 바뀔 수도 있고. 정말 부유하고 많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 선택의 폭이 의외로 좁은 사람이라 ‘부유하고 외로운 영국신사’라는 수식어는 가진 자의 빈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막심의 조건이 아닐까요?


<레베카>의 정체

민영기 : 로맨틱 스릴러라 할 수 있죠. 사랑도 있지만 또 살인이라는 게 들어가니까.

오만석 : 저는 ‘나’의 성장드라마라고 생각해요. 정말 돈 한 푼 없고 가족도 없는 순수하고 귀여웠던 한 여성이 어마어마한 집에 시집오면서 미스터리한 일들을 겪게 되고 그 상황들을 지혜롭게 풀어가면서, 그야말로 막심 드 윈터 부인으로서의 모습까지 갖게 되잖아요. 이 작품 플롯 자체가 처음에 회상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되새기는 걸로 끝나니까 ‘나’라는 사람의 성장 과정, 성장 드라마를 하나의 큰 폭으로 두는 거죠.

나, 레베카, 댄버스, 강렬한 세 여인과 한 남자 막심

민영기 : 몬테카를로에서 반 호퍼 부인이 “저 사람 신문에 나오는 사람인데.”라고 말할 정도로 막심은 유명한 인물이에요.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 배경이 막심의 집인 맨델리 저택이잖아요. 그의 집에서 모든 사건이 벌어진다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나, 레베카, 댄버스 등 여인들 사이에서도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거고요. 영국 신사의 젠틀함도 맨덜리 저택의 주인이기에 나올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오만석 : 이 작품이 ‘나’의 성장드라마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등장인물 중 가장 대립구도를 가지고 있는 게 ‘나’와 댄버스 부인이에요. 이때 막심은 ‘나’의 보호의 대상이 되는 거에요. 막심을 보호하고 관찰하고, 그 사람의 아픈 것을 감싸주면서 ‘나’가 성장할 수 있는 거고, 댄버스는 ‘나’의 저항의 대상이고요. 댄버스의 압박 등을 극복해가면서도 성장을 하고요. 그렇게 ‘나’는 맨덜리 저택에서 겪어야 할 두 가지 일, 여자로서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고, 막심은 그런 과정들이 잘 이뤄질 수 있게 하는 어떤 계기, 존재인거죠.

엄기준 : 와, 형 말 진짜 잘한다. 우리 셋 중에 제일 잘해요. 연습실에서도. (웃음)


반전

민영기 : <레베카>처럼 반전이 있는 작품은 인터뷰 할 때마다 되게 힘들어요.
오만석 : 얘기는 하고 싶은데 참아야 하니까.

엄기준 : 아직 모르겠다는 부분이 바로 그 지점이에요. 반전에 대한 걸 어디까지 숨기고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지. 사랑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아픔과 고뇌를 1막에서 보여줘야 되는 거잖아요. 근데 원래는 그게 아니고. 배신과 살인 그런 부분이 있기 때문에 사랑만으로 1막을 갈 수도 없는 것 같아요. 그 수위조절을 어디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지 아직도 고민 중이에요.

“난 그녀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소.”(by 막심)

엄기준 : 처음엔 사랑했겠죠. 그게 불과 며칠이 못 갔을 것 같은 거고. 근데 정말 사랑을 했을 때 맞는 뒤통수가 제일 (충격이) 커요.

민영기 : 처음부터 미지근하게 만나진 않았을 것 같아요. 레베카라는 인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연출님에게도 물었더니, 엄마도 배우, 본인도 배우출신이었고, 요즘도 재벌들과 여배우들의 결혼은 있잖아요. 그런 방향으로 보자면 처음엔 막심도 레베카를 너무 사랑했을 것 같아요. 사랑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성립이 안 되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어디까지가 ‘러브(love)’고 어디까지가 ‘라이크(like)’인지, 또 어디까지가 ‘호프(hope)’인지 정확한 답이 없다는 게 문제죠.

오만석 : 2막 대사에 ‘난 레베카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게 전 맞다고 생각해요. 막심이 레베카에 대한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떠올리기도 싫지만 순간순간 나에게 물밀듯이 밀려오는 막심에겐 엄청난 트라우마인 거죠. 전 그런 모습들이 관객들에게 막심이 그녀와의 깊었던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트릭이라고 생각해요. 정작 열쇠로 그 속마음을 열어보니, 저는 막심이 진심으로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보거든요. 그런 진실한 사랑을 레베카에게 받지도 못했고. 그래서 ‘나’에게 느끼는 사랑이 평생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각자 세 막심의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견해 차이일 뿐이죠.


레베카 or ‘나’. 선택은 모두 ‘나’!

오만석 : 당연히 사랑이 있으니까. 그걸 떠나서라도 ‘나’라는 인물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막심이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이나 말들, 그 사람만의, 우리 가사에도 “놀라운 평범함”이 나오는데, 부자들이나 부유층들이 보여줄 수 없는 굉장히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막심과의 사랑을 상당히 오랜시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도 그렇고요.

민영기 : 글쎄, 저는 좀. (일동 폭소) ‘아이’는 물론 좀 다른 색의 사랑의 대상이죠. 40년을 살면서 막심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하지만 레베카는 막심 입장에서는 굉장히 많이 볼 수 있는, 너무나 예쁜 여자였을 것 같고. 그래서 레베카가 현존하는 인물 중에 누가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이영애씨나 심은하씨? 정말 누가 봐도 예쁜 여배우잖아. (웃음)

엄기준 : 첫 인상만 얘기하는 거지? 바람피고 이런 거 말고? (웃음)

민영기 : 그럼, 그럼. (웃음)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인데 막심이 (레베카를) 안 사랑했겠어요? 그랬는데 몬테카를로에서 이 여자가 "네 아내 노릇 해줄 테니까 날 건드리지마." 라고 하니 그 충격이 너무 큰 거죠. 그러다 뜻하지 않게 ‘나’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녀는 실수도 하지만 순수하고, 성장하는 모습도 막심에겐 기특하게 보일 수도 있고요. 점점 댄버스도 누르고 드 윈터 부인이 되어가는 모습 자체가 사랑스러워 보였을 것 같아요. ‘나’는 정말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는 여자죠.

엄기준 : 레베카 같은 사람은 정말 많이 볼 수 있잖아요. 특히 요즘에 성형 미인들도 많고. 갖춰진 외모, 갖춰진 스팩, 이런 것들 보다 개인적으로도 ‘나’에게 더 쏠릴 것 같기는 해요. 순수한 그 매력. 여자들의 매력을 표현할 수 있는 게 섹시하다, 어떻다, 많잖아요. 그 중에 순수함이 제가 봤을 때 가장 센 매력인 것 같아요.


민영기 : 평생 (레베카 같은 여자를) 못 봤던 애라 그래요. (일동 웃음)
오만석 : 레베카를 한번 직접 보여주세요. 우리도 궁금하다. (웃음)

“차차 다가올 중년이라는 마음 편한 갑옷을 몸에 걸치게 되면 그날 그날의 자잘한 가시에 찔려도 아무렇지도 않고 그런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만다” by ‘나’(소설 <레베카> 중)

민영기 : 남자는 60이 넘어도 애라고 합니다. (웃음)

오만석 : 일정 부분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살다 보면 불 같은 사랑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거든요. 그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도 불같은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착각하는 거에요. 불같은 사랑은 정말 ‘불’ 같은 사랑이에요. 문이 잠겨 있으면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쟁취하거나 그 누가 반대해도 듣지 않죠. 근데 나이가 들다 보면 나도 모르는 순간에 조금씩 (엄기준 : 제어를 하지) 그렇죠. 그렇게 제어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을 하면 다시 불같은 사랑이 시작되는 거고요.

엄기준 : 그래도 10대 후반, 20대 같은 불같은 사랑은 못할 거에요. 어느 정도 무뎌진다는 말이 일리는 있는 것 같아요. 하나씩 당하고 느껴가면서 무뎌지는 것도 있지만 또 새로운 것에서 뭔가를 당하면 그 충격은 또 달라요. 또 모든 중년, 40대 후반, 50대가 되면 첫사랑의 추억, 기억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을 때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할 수는 없고, 가질 수 없고 그러기에 더 원하는 느낌이요.

‘나’는 막심에게 삶의 축복 같은 존재

엄기준 : 저한텐 정말 ‘나’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랑이요.
민영기 : 그런 축복이 제게는 아들이에요. 진짜 그 아이 때문에 너무 열심히 살고 싶고요. 옛날 어른들 말씀처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아요.


오만석 : 매일매일 자잘한 재미가 있어요. 그런 재미들은 항상 있는데 그걸 느끼느냐 알아차리느냐는 마음 먹기에 달린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러한 걸 대소(大小)구분해서 대를 생각하다 보면 나머지를 못 느끼고 넘어가는데, 점차 나이가 들고 무뎌지면서 대가 좀 약해지는 거죠. 사실 대는 없어요. 뭐가 되어야겠다, 이런 큰 꿈이 없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소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게 되요. 그래서 예전보다 아이가 주는 평범함, 소박한 일상, 그런 재미들이 조금씩 더 생기는 것 같아서 좋아요. 기준이는 아직 ‘사랑’이라는 대가 있는 거고. (웃음) 물론 저도 있습니다!

<레베카> 원스 모어

민영기 : 기준이나 저는 <레베카>가 이번이 처음이라 좀 마음가짐이 달라요. 초연보다 재연 무대에 서는 배우들이 상당히 힘들고 부담감이 적지 않거든요. 일단 세 명의 막심이 너무 다르니까 무엇을 표현하든 다르게 느껴질 것이 분명해요.

오만석 : 저 나름대로는 지난번에 찾지 못했던 부분을 찾고 있고, 또 연출님도 새로운 뭔가를 가지고 오셨고요.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작품이 될 거에요. 새로운 배우들이 많아서 이들의 조합이 이뤄내는 파장이 새로운 색깔로 만들어지고 있거든요. 요즘 워낙 뮤지컬 편수도 많고 양적, 질적으로 성장이 들쑥날쑥한데, ‘한 뮤지컬이 이렇게 성장해가는구나’ 느낄 수 있게 하는 역할이 이 작품이 되길 바라고 있어요.

민영기 : 최소한 세 번은 보셔야 해요.
오만석 : 민막심, 민막심, 민막심, 이렇게? (웃음)
엄기준 : 노트 안 해도 되요. 와서 편하게 봐 주시면 그게 제일인 것 같아요.


글: 황선아(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배경훈(Mr.Hodol@Mr-Hodol.com)/ 영상: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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