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목숨 걸고’ 나아가는 것에 대해 <지킬앤하이드> 조강현

지난달 말, <지킬앤하이드> 연습과 <멜로드라마> 공연을 병행하던 중 잠시 짬을 내어 인터뷰에 임한 조강현은 많이 지쳐 보였다. 날렵해진 얼굴선이 그간의 지난한 연습과정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아직 고생은 끝이 아니다. 오는 17일 국내 열 한 번째 지킬이 되어 무대에 서는 그는 조승우, 류정한 등의 뒤를 이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과학자 지킬 박사와 살인마 하이드로 분해야 한다. 그 쉽지 않은 도전을 위해 조강현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또 앞으로의 행보와도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무대에서 온전히 살아있겠다고 말한다.

Q “목숨 걸고 한다”는 말을 했다. 다른 작품에 임할 때와 긴장감이 다른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사실 목숨을 건다는 건 좀 극단적인 표현이지 않나. 만약 내가 타고난 게 있거나 잘난 배우였다면 그렇게까지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지만, 다른 훌륭한 배우들에 비해 원체 가진 게 많지 않기 때문에 작품에 임할 때마다 항상 그런 각오로 임하려고 한다. 그래야 뭔가 좀 완성이 되고, 나중에 후회도 남지 않는 것 같다.

Q 처음 런쓰루 연습을 끝냈을 때 소감이 어땠나.
어땠는지 잘 기억이 안 날 만큼 힘들었다. ‘아 힘들다, 이러다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체력적으로 그렇고, 정서적으로도 무척 힘들었다.

Q 어떤 부분이 특히 힘들었나.
<지킬앤하이드>는 지킬과 하이드를 맡은 배우가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리듬과 템포를 끌고 가야 하는 작품이라서 그런 부분이 힘들었다.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체력적으로도 많이 버겁고 힘들더라. 첫 런쓰루 때는 그런 걸 많이 느꼈다. 근데 두 번, 세 번 런쓰루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1부터 100까지 계속 강한 텐션을 유지했다면, 그 다음에는 어디에서 조금 느리게 가도 되는지, 어디서부터 다시 빨라져야 할지를 알게 되니까 아주 조금은 수월해졌다.

Q 먼저 공연을 시작한 세 명의 지킬과도 함께 연습을 했는데, 선배들의 연습을 옆에서 보니 어떤가.
보통 더블 캐스팅이나 트리플 캐스팅으로 공연을 할 때는 배우들을 보면서 그 역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냥 선배들이 하는 모습을 넋 놓고 봤던 것 같다. 특별히 어느 부분이 인상적이었다고 꼽을 것도 없이 세 분이 다 달랐다.

Q 선배들이 해준 조언이 있다면.
(박)은태 형과는 처음부터 같이 연습을 했는데, 은태 형도 힘들어했던 시기가 있었고 나 역시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은태 형이 내게 잘 할 수 있다고 힘을 줬다. (류)정한 형은 혹시라도 내 목소리가 쉴 까봐 소리 내는 방법이나 템포를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면서 많이 신경을 써주셨다. (조)승우 형은 첫 공연이 끝나고 나서 문자를 보내주시더라. 새해 복 많이 받고,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잘 하라고. 자신도 <명성황후> 때 지금의 나와 비슷한 컨디션으로 후반부에 연습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금 내가 얼마나 긴장되고 힘든지 안다면서 토닥여줬다. (홍)광호 형도 영국에서 문자메시지를 보내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만의 색깔과 고집으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피카소에 빗대어서 굉장히 길게 해주셨는데, 그 말이 많은 도움이 됐다.


Q 지킬과 하이드라는 인물에는 어떻게 접근했나.
일단 첫인상을 이야기하면, 지킬 박사에게서는 얼음이 꽝꽝 얼어버린 아주 차가운 호수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 안에서는 다양한 물고기와 생물들이 활기차게 살아있고 물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겉에서 봤을 때는 꽝꽝 얼어붙어 있지만. 하이드는 튼튼한 날개를 가진 새 같았다. 날개가 있으면 높은 곳으로 날고 싶을 때 날 수 있고, 훌쩍 멀리 떠날 수도 있지 않나. 땅으로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갈 수도 있고. 그만큼 자유로운 거다. 내가 지금 정말 하고 싶은 것들, 지금 불현듯 느껴지는 욕망들을 감추지 않고 즉각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지킬과 하이드에 대한 막연한 첫인상이었는데, 연습을 하면 할수록 그 첫인상이 틀린 것 같지 않다.

Q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가.
지킬과 하이드는 다른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킬박사는 왜 자기 몸에 약을 주사할 수 밖에 없었을까. 과연 지킬은 그 주사 때문에 하이드로 변했을까? 하이드는 괴물이 아니다. 절제되지 않은 지킬의 또 다른 내면일 뿐이다.

소설을 보면 지킬이 하이드로 변신할 때마다 덩치가 무척 커지고, 아무도 지킬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 뮤지컬에서는 아니지 않나. 그 정도의 외면적 변화를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내 안에서는 그 부분을 가져가야 한다. 뮤지컬에서는 약 때문에 지킬이 하이드로 확 변하지만, 사실 약은 누구나 갖고 있는 인간의 이중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오로지 약을 매개로 변화를 표현하는 데 급급하다 보면 내 스스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보는 사람에게도 설득력이 떨어질 것 같다. 왜 지킬이 하이드로 변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절제돼 있던 내면이 밖으로 나왔는지, 그것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계속 찾아가는 중이다.

Q 지킬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과학자이지만, 동시에 “허락하소서”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신앙 혹은 신념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지킬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삶의 목적의식이 좀 다른 인물이다. 주어진 환경도 마찬가지고. 아버지가 병에 걸려 정신병동에 갇혀 있는데, 모두가 정신병동에 갇힌 사람들을 다 포기하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 지킬이 왜 그렇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는지, 아버지에 대한 지킬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과연 그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는지를 찾다 보니 지킬이 가진 신념 등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더라.


Q 2년 전에도 <지킬앤하이드>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스케줄 때문에 출연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만약 2년 전 출연했다면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2년 전에 출연했다면 지금 다시 못할 것 같다. 한번 하고 영원히 사라졌을 것 같다. 그 때 안 했기 때문에 지금 겨우 한 번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때에 비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어떤 악조건이 있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2년 전에 지금과 똑같은 컨디션이었다면 조바심을 느껴서 너무너무 힘들었을 텐데, 지금은 주변 사람들에 비해서 오히려 나는 크게 부담이 없다. 크게 얻을 것도, 크게 잃을 것도 없으니까.

Q 2년 사이에 마음의 부담을 덜게 된 계기가 있었나.
인생에서 무언가를 크게 깨닫고 느낀 것은 모두 여행을 통해서인 것 같다. 여행 중에서도 굉장히 찰나의 순간 많이 깨닫고 느끼게 되더라. 의지할 것 하나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서 직관에 의존해서 길을 찾고,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불현듯 내가 이 지구와 우주에서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떵떵거리면서 살거나 손가락질하면서 살 것도 없고, 너무 기죽어서 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깨달음들이 지금까지 잘 이어져 온 것 같다.

Q 예전 트위터에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는 말을 썼는데, 같은 맥락인가.
그 말은 어느 영화의 대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뭔가 거창한 일로 인해서 내 인생이 바뀌는 게 아니라 어느 햇살 좋은 날 커피 한 잔 마시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 같다. 근데 정말 중요한 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아무리 큰 사건이 일어나도 그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반대로 마음이 늘 열려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사소한 일로도 인생이 훌륭하게 바뀔 수 있는 것 같다. 사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것 같다.

Q 트위터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했더라. 어떤 작품이나 인물에 대해 생각할 때 아버지와 관련된 개인사를 많이 투영하는 편인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순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펐던 순간이다. 정말로 가장 슬펐던 순간. 그 기억을 빼고 지금의 내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아버지는 내게 가장 편한 친구이자 엄마이자 아빠이자 나의 모든 것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신 후 돌아가실 때까지의 순간은 내가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무너진 순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배우로서 품을 수 있는 정서의 깊이는 굉장히 깊어진 것 같다. 어떤 작품에 임할 때 굳이 그 일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늘 그냥 가까이 있는 것 같다.


Q 인터뷰를 보면 본인만의 독특한 유머코드가 있는 것 같다. 최근 가장 크게 웃은 적은?
어제 <멜로드라마>에 아주머니들이 공연을 보러 오셨는데, 그 중에 웃음소리가 독특한 분이 있었다. 꼭 전원주 선생님처럼 혼자 계속 웃으시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으신지 중요한 장면마다 웃으시더라. 그래서 나도 덩달아 웃어버렸다(웃음).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아주머니 때문에 다 같이 웃었다.

Q 여행을 갈 때 미리 계획을 다 짜놓는 타입인가, 아니면 발길 닿는 대로 가는 타입인가.
미리 일정이나 동선을 짜놓고 간 적은 없다. 대개는 직관을 따랐던 것 같다. 당장 햇살을 맞고 싶으면 햇살이 있는 쪽으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햇살을 등지고 걸어가는 거다. 어차피 누구한테 조언을 구하거나 의지할 수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게 꽤 정확하더라.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누구나 그렇듯 살아오는 동안 갈림길에 있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어딜 가야 좋은 것을 볼 수 있을지, 어딜 가야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 그런데 돌아보면 결국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고민하는 것이더라. 양쪽에 달린 추의 무게가 완전히 똑같아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어느 쪽의 위험이 더 큰지 고민해야 하는 경우는 없었다. 내 안에서 어느 정도 답이 나와 있는 상태에서 재고 고민했던 것 같다.

Q 배우로서의 활동 계획도 마찬가지인가.
특별히 계획을 세우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두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나. 물론 목적은 분명히 있다.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체력이 되는 한 그 순간까지 어떻게든 연기를 잘 하는 게 내 목적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작품 계획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항상 선택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서 그런 계획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깨달은 것 같다.

Q 이번 <지킬앤하이드>를 마치고 나면 어떻게 달라져 있을 것 같나.
지쳐 있을 것 같다. 많이 지쳐서 재충전할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을 것 같다.

Q 조강현의 지킬과 하이드를 기대하는 사람들, 혹은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그분들께 어떤 느낌을 강요할 수는 없다. 객석에 앉아 있는 분들은 서로 다 다른 삶을 살아왔고, 자기 안에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을 갖고 그 곳에 앉아 있는 것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내가 연기하고 있는 그 순간을 그분들이 믿게끔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것. 나는 정말 잘난 게 없다. 그래서 공연을 할 때마다 그 순간을 진짜로 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근데 어쩌면 그게 제일 중요한 일 같다. 그 순간 진짜로 존재하고 사는 것. 나는 설득력이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고, 좋은 느낌이 나오면 정말 다행인 거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