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당신이라는 존재' <레드> 정보석 & 박은석
작성일2015.04.20
조회수12,162
추상표현주의, 특히 '색면 추상'의 선구자로 불리는 화가 마크 로스코는 "색채나 형태, 그 밖의 다른 것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의 그림에서 특정 대상을 재현하거나 재구성하지 않는다. 커다란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건 모호한 경계선을 이루는 강렬한 색면들. 이들 그림 앞에서 많은 이들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무너지는 등 기쁨, 환희, 절망, 비극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그림과 교감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교감을 평생에 걸쳐 생각하고 주장해 온 화가 마크 로스코의 신념을 바탕으로 한 연극 <레드>가 국내 세 번째로 관객들과 만난다. 2011년 초연에 이어 2013년 재연에서도 탄탄한 작품성과 공간을 압도하는 두 남자의 불꽃 튀는 열연이 호평을 쏟아냈던 무대로, 올해는 정보석이 스승 '마크 로스코'로, 박은석이 가상의 제자 '켄'으로 분한다. 굴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을 살아 숨쉬게 하고자 했던 마크 로스코의 고집과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동시에 시대의 흐름을 깨닫게 하는 켄. 이들의 모습을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 말할 수 있는 건, 예술가의 고뇌에서 나아가 세대간 충돌과 이해,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을 비춰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적 교감을 평생에 걸쳐 생각하고 주장해 온 화가 마크 로스코의 신념을 바탕으로 한 연극 <레드>가 국내 세 번째로 관객들과 만난다. 2011년 초연에 이어 2013년 재연에서도 탄탄한 작품성과 공간을 압도하는 두 남자의 불꽃 튀는 열연이 호평을 쏟아냈던 무대로, 올해는 정보석이 스승 '마크 로스코'로, 박은석이 가상의 제자 '켄'으로 분한다. 굴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을 살아 숨쉬게 하고자 했던 마크 로스코의 고집과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동시에 시대의 흐름을 깨닫게 하는 켄. 이들의 모습을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 말할 수 있는 건, 예술가의 고뇌에서 나아가 세대간 충돌과 이해,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을 비춰내고 있기 때문이다.
( 인터뷰는 2015년 4월 8일 진행되었다.)
Q. 드라마 <장미빛 연인들>이 곧 끝난다. 백만종의 악행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다. (웃음)
정보석 : 내일 마지막 촬영한다. 홀가분하다, 여기(연극)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웃음) 정말 그 인물은 끝까지 난리다. (웃음) 근데 이런 역할 할 때가 재밌다. 살면서는 그렇게 못하니까. 악역을 할 때 '아, 내가 굉장히 나쁜 놈이구나, 내가 그걸 겨우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 든다. 악역은 쾌감이 있다.
Q. 악역 뿐 아니라 코믹하게 망가지는 역도 마다하지 않는 것 같다.
정보석 : 그건 역할이니까. 배우는 역할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배역 맡은 사람이 배우이지 않나.
Q. 오늘 <레드> 배우들이 마크 로스코전을 봤다. 어땠는가?
박은석 : 너무 궁금해서 지난주에도 와서 봤었다. 일단, 압도적인 느낌을 받았다. 캔버스의 크기와 화려한 색깔들, 그 안에서 이뤄지는 조화. 또 그림을 보다 보면, 연습할 때 듣던 대사들이 계속 머릿속에 들리니까, (대사) 그대로 (그림에) 다가가서 보기도 하고 (그림이) 펼쳐지게 하고 고동치게 하고, 그렇게 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좀 알고 보니까 (작가의) 의도들도 살아나는 것 같고. 분명히 크게 뭔가를 외치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에 홀린 듯이 나왔다. 그래서 한 번 더 와야겠다 생각했는데 오늘 오게 됐고, 다음주에 또 올 거다. 계속 올 때마다 느낌이 좀 다르지 않을까.
Q. <레드> 초연을 보고 먼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정보석 : 관객으로 초연 보고 나오자마자 박 대표(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한테 "어우, 이거 진짜 공연 좋다, 기회 되면 해봤으면 좋겠다."고 내가 먼저 얘기 했다. 그런데 공연 볼 때는 정말 좋았는데 대본을 받으니까, 아직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한 10년은 있다가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겁이 많이 난다.
Q. 공연 볼 때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
정보석 : 공연은 내가 필요한 것만 선택해서 볼 수 있지 않나. 제일 좋았던 건 나이가 들면서 내 자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되어야 하는데, 배우는 40대에 그걸 가장 강렬하게 느끼거든. 그런 것들이 이 작품에 그려져 있었다. 또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는 입장에서 켄과의 관계, 둘의 이야기들이 굉장히 현실감 있었고, 실제 내 마음에 있었던 생각들이 그대로 무대에 드러나니까 작품이 살아 있었다. 그래서 하려고 보니까 어느 한 쪽에 집중해서 봐야 하고 그 사람을 받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니까 아, 이게 어려운 거다.
Q. 박은석은 과거 공연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레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박은석 : 처음 읽었을 때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되는 대본이 있다. 화장실을 가더라도 들고 가고 전화도 안 받고 끝까지 읽게 되는. <레드>가 그 중 하나였다. 그런 작품을 접했을 때 강한 끌림이 있고, 읽다 보면 머리에 그림이 그려진다. 아무리 작품이 좋다 해도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거나 너무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면 잘 안 읽히고 그림도 안 그려진다. 자연스럽게 읽히는 작품을 만나면 '이거는 운명이다', 이런 거다.
내 생각에 무대는 서고 싶다고 설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운명처럼 작품도 배우한테 정해지는 것 같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못 서게 되는 무대가 있고 그냥 가만히 있다가도 절로 서게 되는 작품이 있듯 <레드>가 나에겐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다. 물론 처음 <레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본을 읽지도 않고 일단 할 생각이 있었다. 너무 얘기를 많이 들었고 또 미술에도 워낙 관심이 있으니까.
Q. 배우들이 2인극에 강한 매력을 느끼는 동시에 못지 않은 부담감도 갖는 것 같다.
정보석 : 6년 동안 '2인극 페스티벌'을 해왔지 않나.(그는 2010년부터 '2인극 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2인극에 대한 애착이 있는 편이고, 그 형식 자체를 굉장히 좋아하기도 한다. 가장 집중력 있게 모든 걸 다 털어서 온전히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2인극이다. 아무것도 결부되지 않고 딱 둘만. 그렇기 때문에 훨씬 (작품에) 깊게 들어갈 수 있다.
이 작품은 로스코가 평생에 걸쳐 인터뷰나 자기 작품에 대한 해설이라든지 또는 평론가들에게 반박하며 했던 말들을 켄과의 이야기로 압축시켜놓은 거 아닌가. 충분히 많은 배우들이 등장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음에도 둘을 가지고 작가가 풀었다는 건 굉장히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사상이 훨씬 명료하게 전달이 될 수 있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온전히 다른 개입 없이 깊이 있게 서로의 생각으로 부딪힐 수 있다는 것에서 연습하면서도 짜릿한 거다.
박은석 : (내게) 다양한 과제가 있는 것 같다. 일단 2인극이 처음이라는 걸 딛고 일어서야 된다. 무대 위에 상대방 이외에 기댈 곳이 없으니까 완벽하게 상대방을 100% 믿고 가야지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선배님들이 중간에서 잘 버텨주고 계시니까 후배 배우로서는 너무 편하고, 정말 잘 따라가기만 해도 잘 굴러갈 수 있을 것 같다.
정보석 : 이 얘기에는 난 좀 반대인데, 참 작가가 잘 썼다 싶은 게 노인네는 초반에 힘 쓰게 하고 뒤에 지칠 때 3장 이후부터는 온전히 켄한테 기대고 있으면 된다. (웃음)
Q. <레드>는 나의 사상이 퍼져나가고 타인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등의 과정이 면밀이 진행되고, 또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이 보여지는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과정'에 관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보석 : 맞다. 처음에 로스코가 켄에게 "나는 내 전 세대를 딛고 올라왔어, 아버지 세대를 완전히 죽여버렸어, 그래야 해."라고 했지만 젊은 세대가 달려왔을 때 그 역시 자리를 버텨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게 이 작품의 백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생각이라는 것들이 전이가 되는데 내가 겪지 않은 새로운 것들이 포함된 전이이기 때문에 나의 생각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게 보여진다. 그래서 양쪽 세대 모두에 대해 굉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가 맞닥뜨려 서로의 주장을 펴면서도 서로를 또 이해할 수 있고. 예술적인 면들을 떠나서 이런 부분만 갖고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와서 보면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박은석 : 일반인들은 늘 완성된 그림만 보고 그 안에 들어가는 순수 노동은 못 본다. 예술가들이 나무로 캔버스를 제작하고 못질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얹고 마를 때까지 기다리고, 이런 작업 과정이 날것 그대로 보여지니까 너무 매력 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볼 수 있겠나.
Q. 로스코는 너무나 유명한 실존 인물이고, 켄은 가상의 인물이다. 각각 인물을 표현할 때의 어려움이 있겠다.
정보석 : '아직 아니다' 싶었던 이유가 온전히 자기 예술에 대해서, 그 한가지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의 내면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플디: 30년간 배우로서 활동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우리는 그 안에 깊게 들어가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빨리 표현하는데 급급한 텔레비전 장르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빨리 대사 외우고 받아들여서 표면적으로 만나는, 이런 인물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이 사람(로스코)을 들여다보려니까 너무 어렵고 이 사람이 갖고 있는 고민들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마크 로스코라는 사람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고 표현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우리 세대에 맞게, 우리 관객하고 호흡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가장 큰 관건인 거다. 그래서 일단 세대간에 이루어지는 일들, 학교에서 아이들을 17년간 접해보면서 가졌던 생각들이 있으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 가지고 가고, 마크 로스코가 그림에 갖는 생각, 깊이, 고민 등은 남은 기간 동안 풀어가야 할 것 같다. 큰 과제가 남아 있어서 아직은 벽 같은 느낌이다.
박은석 : 극 중간에 부모님에 대한 지점들로 작가가 켄 캐릭터에 대한 깊이를 줬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거 하나만 가져도 굉장히 다양한 색깔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켄은 가상의 인물이며 약간 신화적인 인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로스코의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고. 정말 대본을 읽다 보면 그런 가능성도 크겠다 싶다. 로스코가 그림의 상업화를 고민하는 사이, 켄은 로스코 안에 있는 양심의 목소리니까. 초반엔 그 목소리가 작다. 로스코의 결단력이 크고 확고했으니까. 하지만 점점 자기 그림들에게 미안해지고 그림을 보호하고 싶고 그러면서 양심이 커지니까 켄과 로스코가 동등한 입장이 되는 거다. 결국 양심이 이기고.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로스코를 통해서 켄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대본 안에 뭔가 많다. 로스코를 꾸짖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위로해주는 동료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경쟁자가 될 수도 있고. 그래서 켄이 할 게 많다.
너무나 다른데 너무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삶은 순환하고 그 모습은 똑같으니 언젠가 나 역시 이런 상황에 처할 거고. 작품 안에 삶이 있는 거다.
Q. 로스코가 자기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주장했던 생각들이 특히 배우 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정보석 : 적절한 얘기다. 로스코가 가장 강조했던 것이 그냥 순수하게 침묵 속에서 그림을 주시하며 그림과 나 사이에 뭔가 이야기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고 보라는 거다. 배우는 결국 삶을 펼쳐내는 직업이지 않나.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훨씬 깊이 있는 통찰이 필요한데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들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한다. 정말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선입견도 없이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로스코를 접하면서 배운 큰 수확이다.
Q. 대학에서 지도할 때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보석 : 로스코와 (내가) 같은 점이 하나 있다. 진지함. 이 하나만 지녀도 어느 정도는 자기 몫을 하면서 살 것 같다.
Q. 극중 켄이 "모든 게 항상 중요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가슴을 후벼파는 예술을 원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 역시 맞는 말 아닌가.
정보석 : 그렇다. 그게 '나이'인 것 같다. 20대가 유치원생을 바라보면서 할 이야기가 있다면 유치원생들은 그 나이에서 항변할 자기네들 얘기가 있다는 거다. 그러면 우리 대에서 세상에 할 얘기가 있고 젊은 세대는 자기 세대에 맞는 이야기가 있고.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쌓아온 역사가 자기가 믿는 가치이고 진실이고 세계인데 그 말을 해야지, 내가 모르는 말은 할 수 없지 않나.
Q. 로스코의 주장은 때론 예술이 대중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균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보석 : 이런 부분들도 <레드> 초연을 보고 와 닿았던 것 중에 하나인데, 로스코 역시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지 않나. 내 작품은 나의 사상이라고 외치면서도 사람들이 봐 주길 원하고, 그러면서 관객들을 쓰레기로 취급한단 말이다. 이건 예술가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 욕구가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배우로서 대중적이고 싶은 욕심도 있다. 이런 부분이 <레드> 안에서 잘 살아있어서 좋다.
Q. 과거 인터뷰들을 보니, 박은석은 꿈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박은석 : 하고 싶은 게 되게 많다. 일단 (정보석) 선생님이나 한명구 선생님처럼 뭘 많이 이뤄놓아야 그때 되어서 후배를 꾸짖더라도 후배들이 말을 듣는단 말이다.
정보석 : 어이쿠, 뭔가 이뤄놓은 분? 지금 그게 없어서 로스코를 하기가 버거운데. (웃음)
박은석 : (웃음) 젊은 세대들은 '선배가 나한테 뭘 해 줬는데'하는 마인드가 있다. 그런 걸 넘어서서 내가 내 행동으로 뭘 이뤄놓은 다음에 누군가를 이끌어주려 했을 때 그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거고. 그런 생각 많이 한다. 또 배우가 물론 캐릭터나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사람이지만, 긍정적인 영향이든 가끔은 짓궂은 영향이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배우를 하면서 느끼는 교훈이 있다. 회사원들은 회사 가서 일하고 돈 받고, 반복적인 생활인데 우리는 계속 배우지 않나. 끊임없이 삶에 대해서,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않고 있으니까 이런 걸 많이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게 있다. 형도 회사원인데 로스코전이나 내 공연이 있으면 같이 보러 가자, 보러 와라, 어떤 영화가 좋으니 꼭 봐라, 이렇게 한다. 왜냐면 그게 삶을 살아가는데 되게 중요하니까. 그런 문화적 가치와 끊임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 그런 갈망을 갖고 있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요즘엔 돈, 돈, 돈만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도 금방 늙는 것 같다.
신체가 늙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마음만은 늙지 않을 수 있는데, 본인이 늙게 만드는 거다. 돈만 따라간다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배우가 되게 복 받은 직업인 것 같다. 그만큼 힘들고 외로운 순간도 많지만 또 그만큼 보상을 받으니까.
Q. 무엇으로 보상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박은석 : 가장 큰 건, 내 이름을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거.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나를 찾아준다는 거. 심지어 예비군도 불러주고. (웃음)
Q. 꿈이 많은 의욕적인 배우가 요즘 무엇을 가장 절실히 좇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박은석 : 내가 잘 하고 있나?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이 방향성이 맞는 건가? 그리고 항상 가족들을 생각하고 있다. 예전에 왜 연기를 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교과서적으로 "여러가지 삶을 살 수 있어서요." (웃음) 그런 얘기했는데, 요즘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그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 생각한 게, '내가 왜 연기하지?' 했을 때 일단 부모님이 행복하시니까, 그거였던 것 같다.
지난달에 가족이 있는 미국에 갔었는데 가기 전에 오디션을 봤다. 합격해서 2차를 보자고 하셨는데 그 날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그래서 비행기표 취소하고 뭐하고 하면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다가 생각했다. 물론 연기도 하고 싶은데 부모님의 행복을 위해서 연기를 하는 거니 내가 오디션에 가는 것보다 약속된 시간에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게 훨씬 더 좋은 선택이지 않을까. 1년에 한 번 보는데. 그래서 그냥 (미국으로) 갔다.(웃음) 주변 사람들이 다 뭐라고 하고.(웃음) 모든 건 끊임없는 선택인 것 같다. 다행히 잘 뒤돌아 보진 않는 것 같다.
Q. 이런 후배를 보니 어떤가.
정보석 : 10년 전 나를 보는 것 같다. (웃음) 정말. 그래서 지나고 보면 정말 아찔하다. 그 순간의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정말 난 운이 좋았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은 거다. 보통 어떤 질문에 "운이 참 좋았어요."라고 답하는 분들은 진심이다.
은석이 같은 경우도 충분히 자기 선택을 확신해도 좋을 것 같은 게, 이익만 따라가지 않았지 않나. 의리와 관계, 이걸 좇아가는 선택을 했고 그런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할 확률이 적겠지. 자기를 믿어도 된다.
Q. 마지막 질문은 작품과 연관 짓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해 보면 좋겠다. 나에게 '레드'와 '블랙'은 무엇인가?
정보석 : 레드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컬러다. 한 15년을 빨간색 차만 탔다. 신발도 거의 빨간 운동화 신고. 항상 옷을 입으면 내 몸 안에 빨간색 하나는 꼭 지닌다, 양말을 신든지 속옷을 입든지. 빨간색은 보고 있으면 힘이 나고 신난다. 빨간색은 내게 환희, 신남이다. 블랙은 멋이지. 정말 멋 내고 싶을 때는 블랙 찾지.
박은석 : 레드는, 진부한 대답일 수 있겠지만 젊은 나의 열정이다. 혼자 꾸려나가야 하는 내 삶에 대한 열정. 블랙은 뭘까? 잘 모르겠다. 그게 블랙일 수도 있겠다. 뭔지 모르겠지만 존재하는 것.
Q. 아쉽게 <레드> 공연에서 페어가 정해져 있는데 두 분이 함께 호흡을 맞추진 않는다고 들었다.
정보석 : 아까 둘이 얘기했는데 한번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같이 리허설은 하지 말고. 각자 연습한 상태에서 부딪히면 처음엔 삐걱대겠지만 그게 더 좋을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해온 게 있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서 만날 것 같다.
박은석 : 재작년에 선생님도 나도 각자 <햄릿>이라는 작품을 했었다. 그때도 정말 같이 무대에 서 보고 싶었다.
정보석 : 동시에 무대에 올라가서 색다른 버전의 <햄릿>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아니면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 <오델로> 정도? 난 10살 밑에, 넌 10살 위에. 누구의 사랑이 더 뜨거운지 한번. (웃음)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 영상편집: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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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석 : 내일 마지막 촬영한다. 홀가분하다, 여기(연극)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웃음) 정말 그 인물은 끝까지 난리다. (웃음) 근데 이런 역할 할 때가 재밌다. 살면서는 그렇게 못하니까. 악역을 할 때 '아, 내가 굉장히 나쁜 놈이구나, 내가 그걸 겨우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 든다. 악역은 쾌감이 있다.
Q. 악역 뿐 아니라 코믹하게 망가지는 역도 마다하지 않는 것 같다.
정보석 : 그건 역할이니까. 배우는 역할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배역 맡은 사람이 배우이지 않나.
Q. 오늘 <레드> 배우들이 마크 로스코전을 봤다. 어땠는가?
박은석 : 너무 궁금해서 지난주에도 와서 봤었다. 일단, 압도적인 느낌을 받았다. 캔버스의 크기와 화려한 색깔들, 그 안에서 이뤄지는 조화. 또 그림을 보다 보면, 연습할 때 듣던 대사들이 계속 머릿속에 들리니까, (대사) 그대로 (그림에) 다가가서 보기도 하고 (그림이) 펼쳐지게 하고 고동치게 하고, 그렇게 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좀 알고 보니까 (작가의) 의도들도 살아나는 것 같고. 분명히 크게 뭔가를 외치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에 홀린 듯이 나왔다. 그래서 한 번 더 와야겠다 생각했는데 오늘 오게 됐고, 다음주에 또 올 거다. 계속 올 때마다 느낌이 좀 다르지 않을까.
Q. <레드> 초연을 보고 먼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정보석 : 관객으로 초연 보고 나오자마자 박 대표(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한테 "어우, 이거 진짜 공연 좋다, 기회 되면 해봤으면 좋겠다."고 내가 먼저 얘기 했다. 그런데 공연 볼 때는 정말 좋았는데 대본을 받으니까, 아직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한 10년은 있다가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겁이 많이 난다.
Q. 공연 볼 때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
정보석 : 공연은 내가 필요한 것만 선택해서 볼 수 있지 않나. 제일 좋았던 건 나이가 들면서 내 자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되어야 하는데, 배우는 40대에 그걸 가장 강렬하게 느끼거든. 그런 것들이 이 작품에 그려져 있었다. 또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는 입장에서 켄과의 관계, 둘의 이야기들이 굉장히 현실감 있었고, 실제 내 마음에 있었던 생각들이 그대로 무대에 드러나니까 작품이 살아 있었다. 그래서 하려고 보니까 어느 한 쪽에 집중해서 봐야 하고 그 사람을 받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니까 아, 이게 어려운 거다.
Q. 박은석은 과거 공연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레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박은석 : 처음 읽었을 때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되는 대본이 있다. 화장실을 가더라도 들고 가고 전화도 안 받고 끝까지 읽게 되는. <레드>가 그 중 하나였다. 그런 작품을 접했을 때 강한 끌림이 있고, 읽다 보면 머리에 그림이 그려진다. 아무리 작품이 좋다 해도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거나 너무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면 잘 안 읽히고 그림도 안 그려진다. 자연스럽게 읽히는 작품을 만나면 '이거는 운명이다', 이런 거다.
내 생각에 무대는 서고 싶다고 설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운명처럼 작품도 배우한테 정해지는 것 같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못 서게 되는 무대가 있고 그냥 가만히 있다가도 절로 서게 되는 작품이 있듯 <레드>가 나에겐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다. 물론 처음 <레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본을 읽지도 않고 일단 할 생각이 있었다. 너무 얘기를 많이 들었고 또 미술에도 워낙 관심이 있으니까.
Q. 배우들이 2인극에 강한 매력을 느끼는 동시에 못지 않은 부담감도 갖는 것 같다.
정보석 : 6년 동안 '2인극 페스티벌'을 해왔지 않나.(그는 2010년부터 '2인극 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2인극에 대한 애착이 있는 편이고, 그 형식 자체를 굉장히 좋아하기도 한다. 가장 집중력 있게 모든 걸 다 털어서 온전히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2인극이다. 아무것도 결부되지 않고 딱 둘만. 그렇기 때문에 훨씬 (작품에) 깊게 들어갈 수 있다.
이 작품은 로스코가 평생에 걸쳐 인터뷰나 자기 작품에 대한 해설이라든지 또는 평론가들에게 반박하며 했던 말들을 켄과의 이야기로 압축시켜놓은 거 아닌가. 충분히 많은 배우들이 등장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음에도 둘을 가지고 작가가 풀었다는 건 굉장히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사상이 훨씬 명료하게 전달이 될 수 있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온전히 다른 개입 없이 깊이 있게 서로의 생각으로 부딪힐 수 있다는 것에서 연습하면서도 짜릿한 거다.
박은석 : (내게) 다양한 과제가 있는 것 같다. 일단 2인극이 처음이라는 걸 딛고 일어서야 된다. 무대 위에 상대방 이외에 기댈 곳이 없으니까 완벽하게 상대방을 100% 믿고 가야지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선배님들이 중간에서 잘 버텨주고 계시니까 후배 배우로서는 너무 편하고, 정말 잘 따라가기만 해도 잘 굴러갈 수 있을 것 같다.
정보석 : 이 얘기에는 난 좀 반대인데, 참 작가가 잘 썼다 싶은 게 노인네는 초반에 힘 쓰게 하고 뒤에 지칠 때 3장 이후부터는 온전히 켄한테 기대고 있으면 된다. (웃음)
Q. <레드>는 나의 사상이 퍼져나가고 타인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등의 과정이 면밀이 진행되고, 또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이 보여지는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과정'에 관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보석 : 맞다. 처음에 로스코가 켄에게 "나는 내 전 세대를 딛고 올라왔어, 아버지 세대를 완전히 죽여버렸어, 그래야 해."라고 했지만 젊은 세대가 달려왔을 때 그 역시 자리를 버텨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게 이 작품의 백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생각이라는 것들이 전이가 되는데 내가 겪지 않은 새로운 것들이 포함된 전이이기 때문에 나의 생각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게 보여진다. 그래서 양쪽 세대 모두에 대해 굉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가 맞닥뜨려 서로의 주장을 펴면서도 서로를 또 이해할 수 있고. 예술적인 면들을 떠나서 이런 부분만 갖고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와서 보면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박은석 : 일반인들은 늘 완성된 그림만 보고 그 안에 들어가는 순수 노동은 못 본다. 예술가들이 나무로 캔버스를 제작하고 못질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얹고 마를 때까지 기다리고, 이런 작업 과정이 날것 그대로 보여지니까 너무 매력 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볼 수 있겠나.
Q. 로스코는 너무나 유명한 실존 인물이고, 켄은 가상의 인물이다. 각각 인물을 표현할 때의 어려움이 있겠다.
정보석 : '아직 아니다' 싶었던 이유가 온전히 자기 예술에 대해서, 그 한가지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의 내면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플디: 30년간 배우로서 활동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우리는 그 안에 깊게 들어가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빨리 표현하는데 급급한 텔레비전 장르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빨리 대사 외우고 받아들여서 표면적으로 만나는, 이런 인물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이 사람(로스코)을 들여다보려니까 너무 어렵고 이 사람이 갖고 있는 고민들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마크 로스코라는 사람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고 표현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우리 세대에 맞게, 우리 관객하고 호흡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가장 큰 관건인 거다. 그래서 일단 세대간에 이루어지는 일들, 학교에서 아이들을 17년간 접해보면서 가졌던 생각들이 있으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 가지고 가고, 마크 로스코가 그림에 갖는 생각, 깊이, 고민 등은 남은 기간 동안 풀어가야 할 것 같다. 큰 과제가 남아 있어서 아직은 벽 같은 느낌이다.
박은석 : 극 중간에 부모님에 대한 지점들로 작가가 켄 캐릭터에 대한 깊이를 줬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거 하나만 가져도 굉장히 다양한 색깔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켄은 가상의 인물이며 약간 신화적인 인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로스코의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고. 정말 대본을 읽다 보면 그런 가능성도 크겠다 싶다. 로스코가 그림의 상업화를 고민하는 사이, 켄은 로스코 안에 있는 양심의 목소리니까. 초반엔 그 목소리가 작다. 로스코의 결단력이 크고 확고했으니까. 하지만 점점 자기 그림들에게 미안해지고 그림을 보호하고 싶고 그러면서 양심이 커지니까 켄과 로스코가 동등한 입장이 되는 거다. 결국 양심이 이기고.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로스코를 통해서 켄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대본 안에 뭔가 많다. 로스코를 꾸짖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위로해주는 동료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경쟁자가 될 수도 있고. 그래서 켄이 할 게 많다.
너무나 다른데 너무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삶은 순환하고 그 모습은 똑같으니 언젠가 나 역시 이런 상황에 처할 거고. 작품 안에 삶이 있는 거다.
Q. 로스코가 자기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주장했던 생각들이 특히 배우 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정보석 : 적절한 얘기다. 로스코가 가장 강조했던 것이 그냥 순수하게 침묵 속에서 그림을 주시하며 그림과 나 사이에 뭔가 이야기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고 보라는 거다. 배우는 결국 삶을 펼쳐내는 직업이지 않나.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훨씬 깊이 있는 통찰이 필요한데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들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한다. 정말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선입견도 없이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로스코를 접하면서 배운 큰 수확이다.
Q. 대학에서 지도할 때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보석 : 로스코와 (내가) 같은 점이 하나 있다. 진지함. 이 하나만 지녀도 어느 정도는 자기 몫을 하면서 살 것 같다.
Q. 극중 켄이 "모든 게 항상 중요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가슴을 후벼파는 예술을 원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 역시 맞는 말 아닌가.
정보석 : 그렇다. 그게 '나이'인 것 같다. 20대가 유치원생을 바라보면서 할 이야기가 있다면 유치원생들은 그 나이에서 항변할 자기네들 얘기가 있다는 거다. 그러면 우리 대에서 세상에 할 얘기가 있고 젊은 세대는 자기 세대에 맞는 이야기가 있고.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쌓아온 역사가 자기가 믿는 가치이고 진실이고 세계인데 그 말을 해야지, 내가 모르는 말은 할 수 없지 않나.
Q. 로스코의 주장은 때론 예술이 대중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균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보석 : 이런 부분들도 <레드> 초연을 보고 와 닿았던 것 중에 하나인데, 로스코 역시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지 않나. 내 작품은 나의 사상이라고 외치면서도 사람들이 봐 주길 원하고, 그러면서 관객들을 쓰레기로 취급한단 말이다. 이건 예술가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 욕구가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배우로서 대중적이고 싶은 욕심도 있다. 이런 부분이 <레드> 안에서 잘 살아있어서 좋다.
Q. 과거 인터뷰들을 보니, 박은석은 꿈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박은석 : 하고 싶은 게 되게 많다. 일단 (정보석) 선생님이나 한명구 선생님처럼 뭘 많이 이뤄놓아야 그때 되어서 후배를 꾸짖더라도 후배들이 말을 듣는단 말이다.
정보석 : 어이쿠, 뭔가 이뤄놓은 분? 지금 그게 없어서 로스코를 하기가 버거운데. (웃음)
박은석 : (웃음) 젊은 세대들은 '선배가 나한테 뭘 해 줬는데'하는 마인드가 있다. 그런 걸 넘어서서 내가 내 행동으로 뭘 이뤄놓은 다음에 누군가를 이끌어주려 했을 때 그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거고. 그런 생각 많이 한다. 또 배우가 물론 캐릭터나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사람이지만, 긍정적인 영향이든 가끔은 짓궂은 영향이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배우를 하면서 느끼는 교훈이 있다. 회사원들은 회사 가서 일하고 돈 받고, 반복적인 생활인데 우리는 계속 배우지 않나. 끊임없이 삶에 대해서,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않고 있으니까 이런 걸 많이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게 있다. 형도 회사원인데 로스코전이나 내 공연이 있으면 같이 보러 가자, 보러 와라, 어떤 영화가 좋으니 꼭 봐라, 이렇게 한다. 왜냐면 그게 삶을 살아가는데 되게 중요하니까. 그런 문화적 가치와 끊임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 그런 갈망을 갖고 있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요즘엔 돈, 돈, 돈만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도 금방 늙는 것 같다.
신체가 늙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마음만은 늙지 않을 수 있는데, 본인이 늙게 만드는 거다. 돈만 따라간다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배우가 되게 복 받은 직업인 것 같다. 그만큼 힘들고 외로운 순간도 많지만 또 그만큼 보상을 받으니까.
Q. 무엇으로 보상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박은석 : 가장 큰 건, 내 이름을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거.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나를 찾아준다는 거. 심지어 예비군도 불러주고. (웃음)
Q. 꿈이 많은 의욕적인 배우가 요즘 무엇을 가장 절실히 좇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박은석 : 내가 잘 하고 있나?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이 방향성이 맞는 건가? 그리고 항상 가족들을 생각하고 있다. 예전에 왜 연기를 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교과서적으로 "여러가지 삶을 살 수 있어서요." (웃음) 그런 얘기했는데, 요즘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그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 생각한 게, '내가 왜 연기하지?' 했을 때 일단 부모님이 행복하시니까, 그거였던 것 같다.
지난달에 가족이 있는 미국에 갔었는데 가기 전에 오디션을 봤다. 합격해서 2차를 보자고 하셨는데 그 날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그래서 비행기표 취소하고 뭐하고 하면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다가 생각했다. 물론 연기도 하고 싶은데 부모님의 행복을 위해서 연기를 하는 거니 내가 오디션에 가는 것보다 약속된 시간에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게 훨씬 더 좋은 선택이지 않을까. 1년에 한 번 보는데. 그래서 그냥 (미국으로) 갔다.(웃음) 주변 사람들이 다 뭐라고 하고.(웃음) 모든 건 끊임없는 선택인 것 같다. 다행히 잘 뒤돌아 보진 않는 것 같다.
Q. 이런 후배를 보니 어떤가.
정보석 : 10년 전 나를 보는 것 같다. (웃음) 정말. 그래서 지나고 보면 정말 아찔하다. 그 순간의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정말 난 운이 좋았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은 거다. 보통 어떤 질문에 "운이 참 좋았어요."라고 답하는 분들은 진심이다.
은석이 같은 경우도 충분히 자기 선택을 확신해도 좋을 것 같은 게, 이익만 따라가지 않았지 않나. 의리와 관계, 이걸 좇아가는 선택을 했고 그런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할 확률이 적겠지. 자기를 믿어도 된다.
Q. 마지막 질문은 작품과 연관 짓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해 보면 좋겠다. 나에게 '레드'와 '블랙'은 무엇인가?
정보석 : 레드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컬러다. 한 15년을 빨간색 차만 탔다. 신발도 거의 빨간 운동화 신고. 항상 옷을 입으면 내 몸 안에 빨간색 하나는 꼭 지닌다, 양말을 신든지 속옷을 입든지. 빨간색은 보고 있으면 힘이 나고 신난다. 빨간색은 내게 환희, 신남이다. 블랙은 멋이지. 정말 멋 내고 싶을 때는 블랙 찾지.
박은석 : 레드는, 진부한 대답일 수 있겠지만 젊은 나의 열정이다. 혼자 꾸려나가야 하는 내 삶에 대한 열정. 블랙은 뭘까? 잘 모르겠다. 그게 블랙일 수도 있겠다. 뭔지 모르겠지만 존재하는 것.
Q. 아쉽게 <레드> 공연에서 페어가 정해져 있는데 두 분이 함께 호흡을 맞추진 않는다고 들었다.
정보석 : 아까 둘이 얘기했는데 한번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같이 리허설은 하지 말고. 각자 연습한 상태에서 부딪히면 처음엔 삐걱대겠지만 그게 더 좋을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해온 게 있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서 만날 것 같다.
박은석 : 재작년에 선생님도 나도 각자 <햄릿>이라는 작품을 했었다. 그때도 정말 같이 무대에 서 보고 싶었다.
정보석 : 동시에 무대에 올라가서 색다른 버전의 <햄릿>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아니면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 <오델로> 정도? 난 10살 밑에, 넌 10살 위에. 누구의 사랑이 더 뜨거운지 한번. (웃음)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 영상편집: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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