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본질이 중요하다 <트루웨스트> 전석호

지난해 연말 인기리에 방송됐던 드라마 <미생>에서 우리는 신선한 연기로 작품에 활력을 불어 넣은 새로운 배우들을 많이 발견했다. 전석호도 그 중 한 명이다. 신입사원 안영이를 괴롭히던 철강팀 하대리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많은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만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사실 전석호는 <인디아 블로그> <터키블루스> 등에 출연하며 대학로에서 꾸준하게 활약하던 배우다. 이번에 그는 연극<트루웨스트>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무단 침입과 절도를 저지르는 사막의 방랑자 리를 연기한다. 동생 오스틴과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아온 그는 오스틴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극중 리는 거칠고 과격한 성격의 캐릭터지만 사진 촬영과 연이어 이어진 인터뷰에서 전석호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신 쑥스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비주류 배우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관객들을 웃고 울리는 것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본질이 중요하다”라고 연신 강조하던 그의 모습은 새로웠다. 왜냐하면 그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지만 그 안에는 투철한 배우의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Q 그간 연극에서만 보다가 드라마 <미생>에서 하대리로 변신한 모습이 새로웠다. <미생>은 어떤 경험이었나.
<미생>은 정말 재미있게 촬영했다. 현장은 마치 공연하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배우들이 카메라 안에서 마음껏 춤추고 놀고 연기할 수 있게끔 현장 스태프들이 많이 배려해줬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배님들이 공연 경험이 있어서, 알아서 동선을 짜면서 서로 연기를 맞추고, 쉬는 시간에는 작품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미디어가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가질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셔서 행복한 경험이었다.

Q <미생>은 배우 전석호에게 굉장히 중요한 작품임이 분명하다. <미생> 이후에 달라진 점도 있을 것 같다.

달라진 점이 많다. 대학로가면 사람들도 많이 알아보고, 영화도 찍었다. 그런데 어색하다. (웃음) 예전에 공연 할 때도 가끔 알아보시는 분들이 있어서 어색했었다. (플디: 그런데 배우는 주목 받는 직업이지 않나?) 이게 참 모순이다. 누구한테 유명해지고 싶어서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공부를 하거나, 회사를 다니는 것처럼 나도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뿐인데, 아직은 이런 관심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다.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것이 싫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만, 적극적으로 좋아해주시는 분들을 보면 죄송한 마음도 든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보여주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도 그런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Q <트루웨스트>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우리 작품의 연출을 맡은 (오)만석이 형을 tvn <택시>프로그램 출연했을 때 처음 만났다. 이후에 왕래도 없었고, 번호도 몰랐다. 그냥 그날 재미있게 촬영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지내고 있는데, 몇 달 뒤에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안 받았다. (웃음) 문자가 와서 확인해 보니 만석이 형이었다. 통화를 했더니 “<트루웨스트>라는 작품을 할 건데, 함께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학교 다닐 때부터 이 작품을 알고 있었다. 연극영화과의 바이블까지는 아니더라도 학교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작품이다. 남자 2인극 연기 연습할 때 많이 사용하는 장면들이 있어서 낯설지 않은 작품이었다.


Q 극중 리와 오스틴이 서로 주고 받는 장면이 많다. 그간 2인극 공연을 많이 해와서, 이번 무대가 낯설지만은 않겠다.
2인극은 날 피곤하게 한다. 그런데 그게 좋다. 내가 연기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경지에 오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계속 배우고 시도해보고 도전하고 싶다. ‘50살 정도 되면 연기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지 않을까’라는 작은 바람이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2인극은 나를 안주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Q 트리플 캐스팅은 처음이지 않나.
처음에는 제작사에 한 번에 2주간 무대로 오르고 빠지는 형식은 안 되는지 물어봤다. 공연을 끝내고 피드백을 듣고 내일 또 다른 시도를 해보고, 어떻게 보면 공연이 연속성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도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호흡이 끊길 것 같은 걱정도 있었다. 그리고 트리플을 할만한 깜냥도 아닌데, 그 정도로 할 수 있는 있는 사람인가 싶어 요즘은 본의 아니게 예민해지기도 한다. 워낙에 좋은 작품이고 역할 자체가 40대여서 그런 것에서 오는 부담감도 있고, 내가 이 인물을 그리고 지금의 이런 시스템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해 조심스럽고 고민이 된다.

Q 처음 대본을 읽고 리라는 인물을 어떻게 생각했나.
리는 표면적으로 봤을 때 자유롭고 강한 인물이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면이 있다. 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자기 자신도 중요하지만 가족을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리는 가족의 소통이란 부분에서 있어서 많은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인물인 것 같다. 리가 느끼는 속상함을 관객들이 같이 느끼고 아파했으면 좋겠다. 미국이라는 시대적 배경이라던가 그 안의 소재들은 분명히 우리와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그 안의 진심이 관객들에게 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연습을 하면서 인물을 이해하고 이해할수록 짜증이 난다. 리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다. 그걸 또 참고 악 받쳐서 연기한다. 리의 과격한 행동이나 말투가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강하게 나오는 이유가 사실은 자기도 성질이 나는데 그 감정을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 불편함을 편하게 만들면 안될 것 같았다. 불편함을 그대로 가져갔으면 좋겠고 그 안에서 재미와 위트라는 것을 함께 보여주고 싶다. 단순히 웃겨다 울렸다 하면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Q <트루웨스트>는 어떤 이야기인가.
어느 한 인물보다도 전체적인 그림들, 이들의 관계성에 주목했으면 좋겠다. 이들이 하는 말이 다 진실이 아니다.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는 가슴 안에 있는데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실 바보들의 이야기이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얼마나 좋냐. 예를 들자면 어렸을 때 좋아하는 친구를 매일 괴롭히는 것처럼 리나 오스틴도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은 엄청나게 큰데 이걸 표현하지 못하는 바보들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그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얼마나 짠한가. 심지어 어머니까지, 온 가족이 그러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실수를 많이 하고 사는데 이 작품은 그 실수의 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재미있고 신나지만 쓰라린 이야기다. 내가 할 일은 작품 안에 숨겨진 쓰라림을 관객들에게 더 와 닿게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가 웃기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의 본질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 만석이 형도 연습 때 자주 하는 말이 ‘웃기는 것은 좋은데 본질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늘 강조한다.


Q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는가.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내내 불편 했으면 좋겠다. 일주일 동안 각자 직장에서, 사회에서 힘들게 버티다가 주말에 시간을 내서 우리 작품을 보러 왔는데 여기서도 ‘힘들다, 짜증난다. 돈 4만원 내고 이렇게 힘들어야 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라는 거다. “현실은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공연을 보러 왔었을 때도 ‘웃기기는 웃긴데 가슴 한편이 쓰라려’라고 느껴 주셨으면 좋겠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이 이야기는 성공이다.

Q 그동안 배우로 살면서 제일 재미있었던 순간은?

연습 시간이 제일 좋다. 연습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다. 연습은 못하는 걸 계속 쳐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너무 재미있다. 처음부터 다이아몬드는 빛이 나지 않기에 나의 한계를 알아가고 이리저리 다듬고 깎아가는 작업을 한다.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그런 과정 속에서 실수란 실수 다 해보고 실제 공연은 다른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 (웃음) 같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 좋다. 그래서 지금 재미있고 행복하다.

Q 연우무대의 <인디아 블로그>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박선희 연출과 만나지 7-8년이 됐는데, 여행 연극이라는 것도 우연히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행은 하고 싶고, 공연도 하고 싶고 그럼 여행을 갔다 온 걸로 공연을 해볼까.’라는 생각이었다. 학교는 방학이 시작됐고 박 연출은 개인적인 일로 태국을 가야 된다고 하는데 난 공연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나도 같이 따라 갔고 태국 여행기를 가지고 공연을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지만 대 실패였다. 그 후에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홍대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처음 <인디아 블로그> 공연을 올렸는데 그것을 연우무대의 유인수 대표가 보게 됐고 이후에 연우랑 같이하게 됐다. 그때 공연을 마치고 나면 관객들이 나에게 “정말 배우 한번 해봐도 되겠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냥 여행하는 사람인 줄 안거지. (웃음)

그 후에 터키도 가고 히말라야도 갔는데. 공연을 하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건 아니었다. 공연하려고 여행가는 팀이라고 알려졌는데, 정말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가는 거다. 우리는 언제나 엇나갔다. 나도 비주류고 박선희 연출도 그렇다. 주류를 잘 모른다. 어떤 것이 관객들이 좋아하고 돈이 될 만한 것인지 잘 모른다. 별로 관심도 없다. 그냥 좋아하는 것을 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준다면 감사할 따름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쉬운 것 뿐이다. 다행히 시대가 이런 다름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더욱 감사하다.


Q 드라마로 큰 인기를 얻었고 작품 러브콜도 많아서 당분간 연극 무대에서 보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십 년 동안 연극을 계속 하고 있었고 언제나 무대가 좋았다. 대학로에 있는 게 제일 편하다. 내가 아무리 유명해져도 변두리에서 할 거다. 안정적이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다 보니까 무엇인가를 얻으면 지키고 싶어하는데 갖고 있지 않으면 잃을 것이 없다. 이번에 <트루웨스트>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두려움은 없다. 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가 잘 돼서 연극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 대학로에 다시 연극 붐이 일면 좋겠다.

Q 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무엇인가.
나는 극현실주의자이다. “안돼”라고 하면, “그럼 하지 말자”라고 한다. 에누리가 없다. 어떠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 제일 안 좋은 상황을 만드는 거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돼”라고 하면 “그럼 욕먹더라도 그냥 가자.”라는 마인드이다. 아직까지는 잘 하려고 들지 않고 멋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 이게 무대든 인생이든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글: 강진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jini2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 영상 편집: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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