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도 짙은 무대가 펼쳐진다, <엘리펀트 송> 박은석·정원영·이재균·김영필·정원조
작성일201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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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약 3주 앞둔 지난달, 극중 마이클과 그린버그를 연기하는 다섯 배우를 차례로 만나며 굳어진 것은 이들이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느 작품보다 유독 긴 대본 분석 작업을 진행했다는 배우들은 모두 한 대사 한 대사를 거듭 곱씹는 치밀한 자세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하고 싶었어요.” 마이클 박은석
최근 SBS 드라마 <마을 - 아치아라의 비밀>에서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한 미술 선생을 연기하고 있는 박은석. 미스터리한 드라마 속에서 그 역시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인물이다.
기자가 넌지시 “범인이 누구일 것 같냐”고 묻자 “결말은 저도 몰라요. 감독님이 끝까지 안 알려주신대요. 방송 끝날 때까지 지켜봐 주세요.”라고 넉살 좋게 웃는다. “드라마와 무대는 매체가 다르고 현장도 다르니까 재미있는 것도, 새로운 것도 더불어 힘든 것도 있어요. 하지만 그래서 무대가 더 생각나고 그립더라고요.”
천상 무대를 그리워하는 이 꿈 많은 청년은 올해 꾸준하게 무대 위를 누볐다. 봄에는 <레드>에서 화가 로스코의 조수 켄으로, 뜨거운 여름에는 시카고 렉싱턴 호텔 661호실에 갇혀 1인 3역의 색다른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번에 참여하는 <엘리펀트 송>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작품에 집중할 수 있고,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캐스팅됐어요.” (웃음)
그가 푹 빠진 마이클은 어떤 인물일까? “마이클은 사랑을 못 받은 아이에요. 그 아픔이 결국 병이 되고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죠.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이 마이클 혼자서 이 세상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데 의지할 데도 없고, 아무도 편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요. 어떻게 보면 사회가 이 아이를 괴물로 만든 거라고 봐요.”
항상 공연할 때마다 같은 어려움을 느낀다는 그는 “극중 당사자가 느꼈던 아픔이나 상처가 실제 내가 느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폭을 채워 나가는 것이 참 어렵고 외로운 작업이에요.”라고 말한다. 박은석은 그 폭을 줄여 나가는 것이 배우로서 넘어야 할 산이라고 믿는다. “그것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만족감을 얻지 못할 수도, 희열을 느낄 수도 있어요. 그런 재미가 있으니 무대에 계속 설 수 밖에 없어요.”
“모든 공연이 그렇겠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 배우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매 회 공연이 달라질 거에요. 마이클은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고 가늠할 수 없는 아이기 때문에요. 같이하는 재균이, 원영이 공연도 꼭 보러 가려고요.”라며 박은석은 연습실로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그린버그 김영필
올해 <경숙이, 경숙아버지>의 아베 역으로 다시 한번 진한 감동을 전했던 김영필은 그 전후로 다소 색다른 경험을 했다. 내년 1월에 방영되는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편’의 내레이션을 맡아 영국, 그리스, 아일랜드, 미국 등에 탐방을 다녀온 것. “힘들었는데 재미있었어요.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는데 이번에 많이 주워들었죠. 현장에서 여러 석학들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나니까 내레이션이 자연스러워지더라고요.”
한국을 떠나 특별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작품은 “참 드라마틱하고, 설득력 있고, 충격적”이었다는 <엘리펀트 송>이다. 그는 ‘충격적’이라는 표현을 거듭하며 이 작품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마이클이라는 인물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대본을 읽다가 마지막에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어요. 물론 제 역할로서도 마이클에게 한 대 맞지만, 그냥 독자로서 봤을 때도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가 연기하는 그린버그는 사라진 동료 의사 로렌스를 찾기 위해 환자 마이클을 찾아온 병원장이다. 마이클이 그린버그의 질문에 번번이 엉뚱한 말로 답하면서 이들의 대화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팽팽한 심리전이 된다. “처음에는 서로 간을 본다고 할까요? 그렇게 심리 게임을 하다가 마이클에 대한 극적인 진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내가 빨려 들어가고, 결국 설득당하게 되죠. 처음에는 정보를 캐내려고 했는데 나중엔 완전히 넘어가는 거에요.”
그린버그에 대해 얘기하던 중 “어떤 역이든 쉬운 건 없어요. 다 어렵죠.”라는 말로 잠시 고민스런 표정을 지은 그는 어쩌면 마이클이라는 인물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며 박은석, 정원영, 이재균에게 힘을 실었다. “그린버그는 마이클이 표현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대로 리액션을 해나가면 되는 것이거든요. 결국 이 게임에서 키를 잡은 사람은 마이클이기 때문에 저보다는 마이클이 훨씬 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나 든든히 받쳐주는 선배가 있어서 마이클 역의 세 배우도 연기에 깊이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필과의 인터뷰가 진행한 날은 마침 <엘리펀트 송>의 1차 티켓이 전석 매진된 지난달 22일이었다. 홍보담당자로부터 매진 소식을 들은 김영필은 “즐거우면서도 부담되네요.”라며 웃음짓고는 관객들을 향한 인사를 남겼다. “일단 희곡이 너무 좋은 작품이에요. 그리고 배우들마다 각자 개성이 강해서 골라보는 재미도 있지 않을까요(웃음). 다들 색깔이 다 다르니 직접 와서 확인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흑백 아닌 회색 빛깔의 공연” 마이클 정원영
“연극을 정말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기회가 적었고, 뮤지컬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에 적당한 작품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연극, 아직 다른 배우들이 해보지 않은 뜨끈뜨끈한 새 연극에 참여하게 돼서 기분이 너무 좋아요.”
<이> 이후 6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르게 된 정원영은 오랜만의 연극 출연에 대한 설렘을 감추지 않았다. 뮤지컬에서는 인물의 희로애락을 노래에 실어 표현할 수 있지만, 연극에서는 오롯이 연기로만 승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와 그 행간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마치 다시 학교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배우가 뮤지컬을 계속 하다 보면 인물이 좀 비슷해 보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정말 다른 톤의 인물을 찾아가는 것 같아 너무 재미있고 즐거워요.”
연극 <엘리펀트 송>은 앞서 개봉된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영화에서는 이야기를 좀 더 분산해서 펼쳐놓았다면, 연극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마이클의 인생을 알맹이까지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어요.”라고 설명한 정원영은 대본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고 전했다. “저는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한번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마이클의 이야기가 너무 크게 와 닿아요. 또 그가 로렌스라는 사람에게는 과연 사랑을 받았던 건지, 아니면 그마저도 환상인지 여러 생각이 들고요. 같은 대사라도 어떤 뉘앙스로 던지느냐에 따라서 관객들이 해석할 수 있는 의미가 달라지니까, 흑백이 아닌 회색 빛깔의 공연이 될 것 같아요.”
앞서 김영필이 말했듯, 마이클과 그린버그 사이에 펼쳐지는 팽팽한 심리게임도 이 작품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그린버그가 내 말을 얼마나 믿어주느냐에 따라서 마이클의 작전이 달라져요.”라는 정원영은 그린버그로 분하는 두 배우의 특징을 꼽으며 매회 달라질 공연을 예고했다. “정원조 배우님의 그린버그는 내 말대로 순순히 따라오는 것 같다가 자기 안으로 쑥 들어가버리는 인물이라 ‘밀당’이 굉장히 강해져요. 김영필 배우님의 그린버그는 밀당 자체도 되지 않을 만큼 굉장히 냉철하고요.”
<아가사>부터 <인 더 하이츠>까지, 올해도 쉼 없이 활동을 이어온 정원영은 “탄탄대로로 가고 있는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큰 기복 없이 무대에 설 수 있었던 지난 시간과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그는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해나가겠다는 각오다. “저는 어디를 가나 긍정적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분위기메이커였던 것 같아요. 오죽하면 별명이 ‘햇살’이었겠어요(웃음). 그 본성은 숨길 수 없겠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뿐 아니라 정말 깊이 있는 연기, 그리고 어른스럽고 남성스러운 면까지 두루두루 갖춘 배우가 되고 싶어요.”
“강력한 맥거핀이 있는 작품” 그린버그 정원조
정원조를 만난 지난달 27일, 그는 <엘리펀트 송> 연습 중 잠시 짬을 내어 일본에 막 다녀온 참이었다. “<알리바이 연대기>를 일본에서 공연하게 돼서 거길 다녀왔어요. 한국에서의 공연과 특별히 다른 건 없었는데, 관객 분들과 나눴던 이야기가 되게 재미있었어요. 교포 분들의 경우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일본 배우들의 경우엔 한국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하는 지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시더라고요.”
최근 <필로우맨>에서 잔혹동화를 쓰는 작가 카투리안으로 분해 ‘이야기’를 향한 맹목적인 집착과 불안, 혼란 등 다양한 감정을 오가며 밀도 높은 무대를 선보인 그는 ‘맥거핀’이라는 단어로 <엘리펀트 송> 대본을 처음 보고 받은 강렬한 인상을 설명했다. 맥거핀이란 극중 어떤 사건이나 대상을 매우 중요한 것처럼 비중 있게 등장시켜 관객의 주의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장치다.
“여기서는 닥터 로렌스가 강력한 맥거핀이에요 로렌스는 마이클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린버그와 마이클의 관계에서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린버그는 로렌스의 행방에만 신경을 쓰다가 마이클한테 속아요. 그런 점이 되게 재미있었어요. 그게 또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의 큰 반전이기도 하고요. 아마 관객 분들도 그 부분을 재미있어 하실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그린버그는 어떤 인물일까. “작품에 나와있는 정보들로 봐서는 환자와의 관계에 신경쓰기보다는 의사 사회에서 더 성공하고 싶어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병원을 경영하고 있다는 점 외에 자세한 건 나와있지 않지만, 사회적인 출세욕이나 권력욕이 있는 인물 같아요. 사실 그런 부분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이 연극이 그린버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라는 그의 말처럼, <엘리펀트 송>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열쇠는 마이클이 쥐고 있다. 그러나 마이클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서서히 변해가는 그린버그의 모습 역시 이 작품의 깊이를 한층 더 두텁게 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린버그가 자기 일을 아무 탈 없이 해나가기 위해 마이클을 만났다면, 끝으로 갈수록 점점 진정한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서 마이클을 대하게 돼요.”라고 예고한 정원조는 관객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보길 바라는지 묻는 기자에게 짧고 명쾌한 답을 던졌다. “재미있게 보시면 돼요(웃음).”
“하나씩 알아가는 게 흥미롭죠.” 마이클 이재균
“달라진 건 없어요. 그냥 똑같은 것 같아요. 예전엔 (사람들이) 저를 어리게만 봤다면 지금은 좀 무섭게 볼 때도 있고요(웃음).” 드라마 <미세스캅>에서 살인범으로 분해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눈도장을 찍었던 이재균의 말이다. 브라운관 속 이재균의 모습도 새로웠지만, 그가 <엘리펀트 송>으로 다시 연극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에 반가워한 관객들이 많을 것이다. “일단은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어요. 대본 자체도 너무 쿨하고 흥미진진했고, 마이클이라는 인물이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잘만 하면 무대에서 정말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겠구나 싶었죠.”
마이클이라는 인물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하자 그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말로 운을 떼었다. “마이클을 이해하고 그에게 가 닿으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있지만 어떤 인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근데 사랑을 정말 필요로 하는 아이라는 건 맞는 것 같아요. 누구보다 절실하게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 같아요. 어느 순간 이후에 몸은 성장했지만 그 시기에 갇혀 있는 아이 같기도 하고요.”
이날 격한 감정을 쏟아내야 하는 장면을 연습하다 왔다는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의 청각장애인 빌리에 이어 <미세스캅>의 살인범, <엘리펀트 송>의 마이클까지 어두운 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은지 묻자 그가 다시 얼굴에 생기를 띠며 말했다. “내가 모르던 것,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알아갈 때 힘들어도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내가 이해할 만한 사람들, 나와 비슷한 인물들을 연기할 때도 재미가 있지만, 전혀 모르던 인물들을 연기할 때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게 되게 흥미롭죠.”
그렇게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만나는 한 명 한 명의 인물을 통해 이재균은 배우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마이클이 이상한 말들을 되게 많이 해요. 문맥상 관련이 없는 이상한 말들을요. 그런데 대본을 두 번, 세 번 읽고 다섯 번 여섯 번, 아홉 번 열 번 읽었을 때 그게 점점 이해가 되는 거에요. 그걸 느끼고 나니 나도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첫인상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새록새록 느끼고 깨달은 그 모든 것들을 오는 13일 개막하는 <엘리펀트 송> 무대에서 관객들과 나누기를 바라며, 그가 마지막 말을 전했다. “오늘까지 연습을 하면서 느낀 건,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행동 하나가 상대방한테는 큰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거에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어떤 사람한테는 정말 꼭 한번쯤 느껴보고 싶은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걸요. 관객 분들도 아마 그런 것들을 느끼시지 않을까요. 제가 더 노력해야죠.”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강진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jini2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 영상: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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