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뚫는 남자>, 운명처럼 느껴졌다” 유연석

그는 인터뷰를 끝낸 뒤 “얘기를 장황하게 한 것 같다.”고 쑥스러워하며 웃었지만, 듣는 이로서는 첫 뮤지컬에 나서는 그의 태도가 얼마나 신중하고 진지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2일 <벽을 뚫는 남자> 무대에 올라 뮤지컬 배우로서 첫 걸음을 뗀 유연석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유연석을 이야기하며 굳이 <응답하라 1994>나 <꽃보다 청춘>을 언급하는 것이 식상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그간 수많은 작품과 방송에서 다양한 인물을 맡아 깊이 있는 연기를 펼쳤고, 대중적으로도 폭넓은 인지도를 쌓아왔다. 그런 그가 또 한번 새로운 영역으로의 도전에 나섰다. 뮤지컬 데뷔를 앞둔 그를 만난 것은 지난 12일. 그는 무엇에 도전하든 그 목표와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는 영리한 배우였다.

Q 첫 뮤지컬이라 걱정을 많이 했다고. 쇼케이스(4일) 때도 많이 긴장한 것 같았는데.
진짜 너무 떨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한 적도 별로 없고, 연기와 노래를 같이 하다가 그냥 마이크만 잡고 카메라와 기자 분들 앞에서 노래를 했으니까. 게다가 내 노래가 그날 행사의 첫 순서였다. 정말 너무 떨리더라. 호흡도 진정이 안 되고, 감기도 심하게 걸려 있었기 때문에 큰일났다 싶었다. 예전에 학교 다니면서 공연할 때도 못 느꼈던 떨림을 오랜만에 느꼈다. 그래도 나중에 내 모습을 보신 분들이 집중해서 신중하게 노래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고 하셔서 그나마 다행이구나 싶었다.

그 전부터 쇼케이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다. 혼자 있을 때 머릿속으로 상상도 하고, 이미지 트레이닝도 하고 그랬는데 막상 무대에 오르니까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건 다 사라지고 오로지 연습해서 몸으로 온전히 체득한 것만 보여지더라. 정말 무대에서는 거짓이 없다는 걸, 내가 연습한 만큼 여과 없이 보여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Q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한 건가.
꼭 뮤지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고,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왔다. 처음 연기자를 꿈꿨던 것도 초등학생 때 학예회 무대에 섰을 때였고, 대학에서 처음 연극을 했을 때도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이 계속 있었는데, 막상 활동을 시작하고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주가 되다 보니 공연 스케줄을 잡기가 쉽지 않더라.

사실 학교 다닐 때는 정극을 많이 했고, 뮤지컬은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근데 난 이상하게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어서(웃음) 공연 무대에 서보고 싶은데 예전에 해봤던 정극보다는 뮤지컬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회사에서 올해 계속 달려왔으니 연말에는 좀 쉬자고 했고, 그 찰나에 <벽을 뚫는 남자> 쪽에서 출연 제안이 들어왔다. 그렇게 여러 가지가 잘 맞아떨어져서 운명처럼 느껴졌다. 작품도 너무 재미있었고.

Q <벽을 뚫는 남자>의 첫인상은 어땠나.
우선은 송쓰루 뮤지컬이어서 노래로 쭉 간다는 것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따뜻한 스토리도 마음에 들었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도, 그 안에서 캐릭터가 성장해가는 느낌도 좋았다. 더욱 좋았던 건 노래를 좀 더 말하듯이 부른 달까, 배우의 감정을 대사의 운율에 실어 전달하는 문법이었다. 내가 뮤지컬을 하게 되면 관객들이 내가 왜 뮤지컬을 택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만큼 감동 혹은 무언가를 전달해드려야 하지 않나. 그간 여러 매체 촬영을 많이 해온 만큼 어떻게 보면 대사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내 장점일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을 선율에 녹여서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노래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니까, 노래를 뽐내는 공연보다는 배우로서 감정과 대사를 좀 더 섬세하게 잘 전달할 수 있는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벽을 뚫는 남자>가 그런 작품인 것 같다.


Q 유연석이 보는 듀티율은 어떤 인물인가. 또 그를 어떻게 표현하고자 하는지.
듀티율은 사람들과 소통하기보다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늘 해오던 일들을 소박하게 하면서 그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말단 공무원이다. 그런 인물이 어느 날 벽을 뚫는 능력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고, 자신과 닮은, 어딘지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살아가는 이사벨을 만나 사랑을 느끼고 성장해간다. 자신만의 삶 속에서 외톨이처럼 살아가던 듀티율이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변화하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연습하면서도 계속 더 애착이 간다.

사실 원작에서는 듀티율이 40대 중년의 공무원이다. 근데 나는 억지로 중년을 표현한다기보다 내가 가진 색으로 그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것들을 겪어온 사람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느낌보다는 조금은 서툰 사회 초년생같은, 그냥 자기 삶에 소박하게 만족하며 살아가던 사람이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느낌으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Q 듀티율의 성격 중 자신과 닮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나.
나는 그래도 사람들이랑 소통하면서 잘 지낸다고 생각하는데, 돌아보면 언제부턴가 편하고 익숙한 사람들 위주로 만나고 굳이 애써서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같다. 어릴 때는 너무 붙임성이 좋아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과 꼭 소통하고 친해져야겠다는 강박이 있을 정도로 많이 어울렸다. 근데 연예인이 되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내 삶에 좀 갇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한 사람들과의 만남에 편함을 느끼면서 지냈던 것 같다. 듀티율도 그렇더라. 그도 굳이 불편하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체념한 듯 자기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공감이 되기도 하고,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Q 이건 <벽을 뚫는 남자>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많이 받는 질문일 것이다. 실제로 벽을 뚫고 다니는 능력이 생긴다면 무얼 하고 싶은가.
여행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여행을 가면 이동하기가 항상 힘들다. 어디 박물관 같은 데 한번 가려고 해도 한 시간씩 기다려야 하고. 그럴 때 그냥 순간이동을 했으면 좋겠고, 길게 줄 선 곳을 몰래 벽 뚫고 들어가서(웃음)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거창한 걸 하기 보다 그냥 가고 싶은 곳을 아무 제약 없이 갈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소소한 기쁨이 있을 것 같다.


Q 연습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엇인가.
송쓰루 뮤지컬이다 보니, 거기다 듀티율이 무대에 나와 있는 장면이 굉장히 많다 보니 쉴 틈도 없고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다. 41곡 중에 29곡을 내가 부른다. 그 곡들을 하나하나 숙지해서 디테일을 잡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주말에는 2회 공연을 하니까 두 시간씩 두 번의 공연 동안 노래를 총 58곡 부르는 거다(웃음). 마치 투수가 하루에 피치를 100개 정도 던져야 하는데 150개씩 두 경기를 해서 총 300개를 던지는 느낌일 것 같다(웃음).

Q 하루 종일 동료 배우들과 연습실에서 지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할 때는 다른 배우들과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잘 나지 않는다. 각자 할당된 장면을 찍은 뒤 바로 가기도 하고, 서로 시간에 쫓기니까 얘기할 시간도 많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는 거의 매일같이 아침부터 밤까지 동고동락하는 거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지향점을 향해서 가는 과정 자체가 너무 좋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이런 경험을 했었는데, 내가 이걸 그리워했나 보다. 내가 맡은 장면을 얼마나 잘 소화해낼 지에만 집중하다가 이렇게 상대방이 하는 연기도 보고, 같이 고민하고,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이 하나하나 다 재미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할 때는 배우들끼리 서로 그런 디렉션을 주지 않는다. 그게 실례일 수도 있고, 빠른 시간에 촬영을 해야 하는데 상대방이 갖고 있는 연기 플랜을 순간 흔들어놓으면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서로 조심하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게 너무 좋다.

또 매체에서 연기를 할 때는 배우로서 한 장면을 연기하고 나면 끝이다. 이미 찍은 건 날라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뭔가 소비되는 것 같다. 그런데 공연 연습을 할 때는 오늘 했던 것을 내일도 복습하고, 또 생각하며 발전시킨다.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들의 반응과 에너지를 받아서 또 다르게 변화시켜 나가겠지. 내 연기가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고 커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게 배우로서 참 재미있다.

그리고 연습하면서 같이 밥 먹고 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다. 얼마 전에 이태원에 바를 하나 오픈했는데, 쇼케이스를 한 날에도 끝나고 같이 연습하던 배우들과 다 같이 거기 가서 회식을 했다. 그런 게 너무 좋다.


Q 얼마 전에는 직접 디자인한 텀블러를 <벽을 뚫는 남자> 팀에 선물했던데, 애정이 각별한가 보다.
영화나 드라마를 할 때는 선물을 직접 디자인해서 스텝들에게 돌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 빼빼로 같은 작은 선물을 돌린 적은 있는데, 이 정도까지 했던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인원도 너무 많고 시간에 쫓겨서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으니까. 이번엔 다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뭔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처음엔 보조 배터리에 디자인을 하고 받는 분들의 이름을 써서 나눠드리려고 했다. 그래서 업체에 주문을 하고 다음 날 결제하기로 했는데, 다음 날 조재윤 형이 보조 배터리를 50개 정도 선물로 갖고 온 거다(웃음). 매니저가 와서 큰일났다고(웃음). 그래서 부랴부랴 취소하고 다른 선물을 찾다가 텀블러로 정하고 디자인을 하고 이름을 새겨서 선물을 했다.

Q 이태원에 바를 오픈했다는 소식도 의외였다. 언제부터 계획했던 건가.
예전부터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예전에 포르투갈에 여행을 갔다가 와인을 하나 마셨는데, 너무 맛있고 특이했다. 그게 너무 맛있어서 여행 끝날 때까지 캐리어에 한 병 들고 다니다가 다녀와서 회사 분들과 나눠 마셨는데, 다들 너무 좋아하더라. 그래서 그 이후에도 와인을 한 두 병씩 해외직구로 사서 마시고 지인들에게도 나눠줬다. 그렇게 여행하면서 맛있었던 음식이나 좋았던 인테리어를 지인들과 같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을 것 같더라. 영화를 할 때도 사실 편하게 맥주 한 잔 하면서 대본 리딩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 또 그런 공간을 만들어놓으면 팬들과도 더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러다 선배가 같이 하자고 해서 얼떨결에 하게 된 거다.


Q 유연석, 하면 실력과 인기를 쌓아가는 차근차근 대기만성형 배우의 이미지다. 마침 오늘 수험생들이 수능을 치르는 날인데, 무언가를 향한 기다림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수능이 학생들이 해온 모든 공부와 과정의 결과물처럼 여겨지는 게 좀 안쓰럽다. 사실 지금이야말로 사회생활의 출발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가까이 가기 위한 공부를 시작할 시간이지 않나. 근데 그냥 수능 성적에 맞춰서 갈 수 있는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더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연극영화과를 전공했고, 다른 전공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대학생활을 하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대학생활이 끝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취직할 수 있는 직장에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하지 않더라. 물론 수험생들이 이제까지 너무 고생 많이 했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은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요즘은 명문대를 나와도 취직 못하는 사람이 많고, 명문대를 나오지 않아도 자기 적성을 잘 살려 일하는 분들이 있으니 이제는 좀 변화돼야 하지 않을까. 학생들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향해서 갔으면 좋겠다. 그런 출발을 잘 열었으면 좋겠고, 응원하고 싶다.

Q <벽을 뚫는 남자> 이후 다른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취미가 굉장히 많던데, 또 배워보고 싶은 취미가 있나.
이번에 공연을 준비하다 보니 1~2년에 한 번은 꼭 무대에 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번에 뮤지컬을 하니까 다음에는 정극으로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면 좋을 것 같다. 정극을 하면 정말 대사 하나하나를 매번 곱씹으면서 배우로서 많이 훈련이 될 것 같고, 그리고 나서 무대에 올라가 관객들을 만나면 또 정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취미 생활은…이번에 바를 인테리어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서핑을 좋아하더라. 그 친구 외에도 주변에 서핑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뮤지컬이 끝나고 봄이 오면 서핑을 한번 배워볼까 생각 중이다.

Q 마지막으로 유연석의 듀티율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물론 서툴고 아쉬운 부분들도 있을 테지만, 주어진 시간 동안 굉장히 열심히 준비했고, 분명 내가 만든 듀티율이 관객 분들께 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 그걸 잘 전달받고 가셨으면 좋겠다. ‘유연석 얼마나 잘 하나 보자’하고 보시기보다(웃음) 유연석이라는 배우가 그리는 듀티율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증을 갖고 와서 보시면 어떨까. 그리고 공연 자체도 예전 시즌과 달리 드라마의 톤이나 음악에도 변화를 주고 새로운 시도를 한 것들이 있으니 관심 있게 봐주시면 좋겠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 영상: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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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2

  • hopri** 2015.12.03

    범생같은 배우~연예계에서 돋보이기 쉽지않은 스타일이지만 꾸준히 자기의 역할을 해나가는 멋지네요 지방에서도 공연하면 보러갈께요

  • jason99** 2015.11.23

    외모보다 멘탈이 더 멋진 배우네요. 공연 후기에 훌륭하다는 평가가 많더군요. 특히 유연석 듀티율이 본인이 원하는 작업을 해서인지 무대에서 행복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평가들이 와 닿네요.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