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악보를 앞에 둔 행복, 피아니스트 김정원

아주 좋은 곳을 안다며 직접 만날 장소를 일러 온 그의 센스에 못 미치게, 가던 길 중간 즈음에서 방향을 잃었다. 근처에 있는 미술관 이름을 전화로 알리고 서 있기를 잠시, 자동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내려와 섰고 운전석에 그가 앉아 있었다. “찾기가 원래 좀 힘들어요. 어서 오세요” 그렇게 편안히 먼저 인사를 건내는 사람, 피아니스트 김정원을 만난다.


나, 음악, 청중의 트라이앵글,
그러나 시작은 ‘나’임을


국내 최정상의 솔리스트들로 구성된 MIK앙상블, 클래식과 대중음악가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김정원과 친구들’, 그리고 작년 클래식 아티스트로는 시도된 바 없는 전국 12개 도시 솔로 리사이틀, 그 밖에 수 많은 해외 연주 활동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김정원.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추천해 주었다는 여유롭고 운치 가득한 한 카페에서 그는 “와, 참 좋다”를 연신 말하며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창원에서의 협주를 마치고 막 올라와 여독이 아직 덜 풀렸다는 자칭 ‘까칠해진’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 전엔 무대 위에서 느껴지는 호응만으로 청중들의 반응을 알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공연이 어땠다, 미니홈피로, 또 쪽지로 많이 이야기 해 주세요. 아, 이 친구는 이렇게 느꼈구나 알게도 되고, 참 좋은데, 장단점이 분명히 있죠.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그들이 관객 전부는 아니잖아요. 인식하는 건 좋지만, 지나친 의식은 삼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많은 팬들이 있는 그에게 ‘수려한 외모와 젠틀한 매너’ 만으로 그 까닭을 단정 짓는 것은 어리석다. 만 14세에 빈 국립 음대 최연소 수석 입학, 1992년 엘레나 롬브로 슈테파노프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1993년 동아콩쿠르 우승, 1997년 뵈젠도르퍼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등 화려한 이력의 나열도 일편하다. 파리 고등 국립 음악원에서의 수학 이후에도 빈 심포니, 체코 필하모닉 등과 미샤 마이스키를 비롯한 세계적인 거장들과의 협연을 통해 유럽 무대를 누벼온 그.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마지막 장면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던 젊은 피아니스트로 국내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이후 김정원은 최근 더욱 한국에서의 무대에 귀 기울인다.

“음악이라는 게 물론 나와 음악, 청중, 그 삼각구도인데, 사실 조금 이기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음악은 가장 먼저 나를 위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음악이 좋고, 음악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과 같이 느낄 때 배가 될 수 있는 거죠. 만약 어느 날 청중들이 절 버린다고 하면,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걸로 인해 음악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라든가,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마음을 비우는 준비는 늘 하고 있어요.”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나보다

유명 방송작가인 이금림이 어머니이며 대학 국문과 교수인 아버지를 둔 그에게 음악 보다는 문학의 길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도 같았다.
“어휘를 가지고 감정을 정리하는 일은 모든 예술의 근본인 것 같아요.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 이 소리가 ‘미’인지 ‘파’인지 아는 절대 음감 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 빛깔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감정,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부모님들은 어휘 자체가 풍부하신데다가 편지를 굉장히 자주 써 주셨거든요. 말 보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표현하면 오히려 감정이 훨씬 잘 전달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저의 정서가 형성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이 되요.”

‘일하는 예민한 엄마’를 둔 덕에 다양한 학원들을 많이 다녀봤다며 웃는 그는, 또래 남자들이 좋아하는 태권도 보다 집에 갈 생각 안하고 피아노 학원에서 줄곧 건반을 눌러댔던 7살 꼬마 정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특별하진 않지만 ‘확실히 음악은 운명’이라고 말한다.

“피아니스트는 워낙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그걸 더 많이 즐기는 사람에게 더욱 알맞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전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성격이거든요. 연습하는 게 고통스럽진 않아요. 그런데 2, 3주 동안 완전히 밖과 격리되고 나면 사람이 너무 그리워지는 거에요. 제가 빈에 도착했을 때 유럽의 늦가을이었는데 건물도 다 회색이지, 날씨도 춥지, 사람들은 무채색 옷만 입고 다니지, 농담 반으로, 정말 그 겨울을 보내면서 내가 여기서 공부를 다 마칠 때 쯤이면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혹독한 겨울을 보냈죠(웃음).”

만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홀로 떠난 유학길, 첫 겨울은 참으로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겨울 후 맞은 어느 한 봄날, 무심코 연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살에서 ‘아, 이제 봄이 오나보다’ 하고 앞으로의 생활에 따뜻한 기운을 그리게 되었다는 김정원. 빈 국립 음대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 역시 그 햇살 중 하나가 아닐까.

“남들이 예쁘다고들 하시는데, 제 이상형이 작고 귀여운 스타일이어서 아내가 솔직히 제 타입도 아니었고요(웃음). 제가 조숙했는지 초등학교 2학년 때 쇼팽 소나타를 듣고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니’하면서 밤새 울고 그랬거든요. 그 이후 음악에 대해 정말 실컷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절실했는데 만나지 못했죠. 그런데 지금 아내를 만나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람은 나만큼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어요. 리사이틀 보고 밤새 토론하기도 하고.”

늘 함께 다니는 자신들을 보고 사람들이 ‘사귄다’고 이야기 할 때도 ‘남녀간에 우정이 있음을 보여주자’고 콧방귀를 뀌었다는 그들은 결국 그의 나이 19세에 만나 친구로 2년, 연인으로 8년, 그리고 부부로 4년, 그렇게 지금도 나눌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며 사이좋은 길을 걸어오고 있다.

함께라서 더욱 좋은 MIK앙상블

바이올리니스트 김수빈, 비올리스트 김상진, 첼리스트 송영훈과 2003년에 구성한 MIK앙상블은 각자 솔리스트로도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젊은 연주자들의 모임으로 화제를 낳았다. 2년 만에 그들의 무대가 오는 10월 열릴 예정이다.

“현악기 연주자들은 쳄버나 오케스트라와 할 기회가 많은 데 비해 저 같이 솔로만 하는 경우는 연습할 때나 무대에 오를 때도 혼자거든요. 저는 가끔 드라마에서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에 같이 나가서 “오늘 뭐 먹을까” 하는 장면 보고 참 재미있겠다, 그랬거든요(웃음). 제가 너무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사람들이 모이는 직업이 부러웠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 하면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쳄버잖아요. 그래서 MIK는 특히 저한테 너무나 소중해요.”

‘함께’의 즐거움에서 이제는 “연습과 연주 과정에서 음악적인 것과 성격적인 면에서 무엇을 삼키고 내세워야 하는 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 덕분에 음악적인 취향의 다양성을 이론이 아닌 진정으로 이해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김정원.
“처음 만들었을 때 우리 4명이 모여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자고 그랬죠. MIK 피아노 쿼르텟(4중주)이 아니라 MIK앙상블이라 이름 지은 것도, 넷이서 할 수 있는 앙상블로 듀오도 있고, 스트링 트리오(현악 삼중주)도 있고, 피아노 트리오, 게스트를 초대하면 퀸텟(5중주)도 되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거죠.”

MIK앙상블의 1집 앨범에는 이들을 위해 한국의 젊은 작곡가들이 만든 3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올 10월의 리사이틀에서도 캐나다 현대 음악 작곡가인 머레이 세퍼가 바이올리니스트 김수빈에게 헌정한 ‘String Trio’의 국내 초연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베토벤과 슈만의 피아노 쿼르텟 등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작곡가들의 명곡으로 대중들의 포용을 잊지 않았다.

지금은, ‘잘 보내야 하는’ 때

9월 한달 공식 스케줄만 해도 국내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3번, 거기에 미국에서의 협연 일정이 있었으며 10월부터 연말까지 MIK앙상블 공연과 음반 녹음, 개인 전국 투어 리사이틀까지 쉼 없는 일정이다.

“이번이 특히, 제가 단 하루라도 잘못 쓰면 큰일나는 극단적인 스케줄인 것 같아요. 지금보다 연주를 좀 줄이는 게 이상적이긴 한데, 제 나이가 음악적으로 애매하면서도 아주 중요한 시기거든요. 평생 곡을 다룰 수 있는 테크닉은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 이미 끝냈기 때문에 지금의 연습은 레퍼토리 확장과 테크닉 유지의 의미가 커요. 지금 이 때를 스스로 잘 보내야 한다, 음악적으로도 그렇고 사는 것도, 경험하고 느끼는 것도 잘 보내야지, 여기서 깊이 있는 거장으로 가느냐, 아니면 아무것도 없어지는 쪽으로 가느냐가 결정되는 시기로 보고 있어요. 많은 연주 활동으로 100% 준비 못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무대 위에 오르는 경험 조차 지금 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역설적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시기에만 가능한 것들을 충분히 경험하면 분명 그 가운데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연주가 많지 않은 학생 때는 한 독주회 프로그램을 비가 오나 천둥이 치나 꼼짝 않고 칠 정도로 6개월 이상 연습했다는 그는, “딱딱 할 연주만 찍어서 품위 있게 할 때가 오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며, 젊고 왕성한 서른 둘의 연주자로 지금, 전국 16개 도시 리사이틀이라는 긴 호흡의 무대를 다시 준비하고 있다.
“연주를 할 때마다 처음 오신다는 분이 많아요. 숨겨져 있는 청중들이 많다는 이야기 인데 한번이라도 이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어떻게 보면 사명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에요. 작년에 투어 공연을 시작할 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나서는 너무 하길 잘했다, 이분들이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작년보다 4개 도시가 더 늘어난 올 해 전국 리사이틀에서 그는 조금 더 청중들의 귀를 넓게 만들고자 한다.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클래식, 너무 난해하지 않은 레퍼토리로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이 물론 중요합니다. 클래식의 저변확대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청중들의 입맛에만 맞추는 레퍼토리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청중들을 양육시키는 것도 중요하죠. 작년에는 곡목을 모를지언정 음악을 들으면, ‘아, 이 곡 나도 알아’하고 생각했다면, 올해는 반대로 라흐마니노프, 슈만, 쇼팽 등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반갑게 생각할 작곡가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막상 들어보면 처음 듣는 곡이라고 느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자신 있을 만큼, ‘이 곡을 안 좋아할 수 없을걸’,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곡들인 건 분명해요.”
오는 10월 중순에 발매될 그의 새 음반에서도 이번 투어에 메인으로 들어가는 ‘아방가르드 한 느낌이 있는’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을 비롯, 무소르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도 만날 수 있다.

“예전에 잘 못 느꼈던 건데, 음악을 평생 동안 하신 분들이 무조건 존경스러워요. 세상에 많은 충동들을 다 이겨내신 분들이잖아요. 백건우 선생님 뵈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알프레도 브렌델 같이 마지막까지 음악을 연구하고 깊이 파는 그런 분들을 보면 인생이 다 존경스럽죠. ‘저 사람 진짜 피아노 잘 친다’ 보다 그런 분들의 삶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아요.”

그와 두런두런 나눈 2시간이 훌쩍 넘는 대화에는, 피아노만의, 혹은 일상만의 이야기, 그 무엇도 아닌 피아노가 함께 하는 ‘삶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멋진 기교가 가득한 화려한 무대를 갈망하는 번쩍이는 눈빛이 아니라,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카페 한 편에 놓인 피아노로 기쁘게 연주하는 반짝이는 눈빛의 연주자, 지금껏 연주해 온 곡들보다 새로 접하는 수 많은 곡들이 보물창고에 한 가득 쌓여 있기에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꿈인 음악에 더욱 행복해하는 피아니스트 김정원. 이것이 오늘과 내일도 역시 우리가 그를 놓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글: 황선아 기자(인터파크INT suna1@interpark.com)
사진: 박충훈, 스톰프뮤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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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1

  • A** 2008.10.08

    ㄴ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