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김내하, “연산과 나는 닮은 점이 많다”

히히덕 거리며 웃는 웃음에는 광기가 서렸다. 말 없이 가만히 있으면 곧 서릿발 같은 독설이 쏟아질 것 같았고, 손에 쥔 칼에는 붉은 피가 이내 뚝뚝 흐르고 말았다. 하지만 뒤돌아 걷는 그의 어깨 위엔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사라지지 않는 슬픔이 묻어났다. 그게 바로 김내하(44)의 연산이다.

김내하는 1999년 연극 <이>가 그 모습을 만들어 가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였다. 희곡을 읽자마다 “연산은 내 것”이라며 배역에 매료되었다는 그에게 지난 10년의 <이>와 그보다 더 오랜 배우 김내하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가 벌써 10주년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 연습하면서 ‘아하, 참 세월이 이렇구나’ 했어요. 99년도에 세기말이라고 다들 떠들고 난리가 났을 때 우리 연극하는 친구들은 눈에 독기만 가지고 어떻게든 뭘 해보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거든요.

초연 준비 할 땐 2010년까지 할 줄은 전혀 몰랐죠. 당장 닥친 것이고, 또 너무나 작품이 좋다 보니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죽어라 했는데, 다행히도 첫 회에 대학로가 난리 났었어요. 상이란 상은 다 받고,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했던 건 관객들이 너무나 열화와 같이 좋아해줬다는 거에요.

당시엔 그런 것도 없었는데 <이>의 팬클럽이 생겼어요. 사이트도 생기고, 단체로 와서 케익도 잘라 주고 단관도 하고, 배우들이 다들 “이게 뭔가…” 했었다니까요. 그 덕분에 매년 공연을 성황리에 했던 것 같아요.

 <이>를 만난 첫 느낌은 어떠셨나요?
보통 70쪽 되는 대본을 한 번에 다 봐지기가 쉽지 않잖아요. 근데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3, 40분 만에 쭉 봤어요. 그리고 “나 연산할래” 이렇게 얘기가 나온거죠. 김태웅 연출도, “그래, 그거 너 시키려고 했어”(웃음) 그러더라고요. 어느 연극인에게나 욕 먹겠지만, 감히 말한다면, 셰익스피어의 언어 유희, 시적 표현들에 버금가는 정도로 저는 이 작품을 느꼈어요. 대단하다, 꼭 하자, 해야 한다, 그렇게 되었죠.

왜 ‘연산’ 역을 한다고 하셨어요?
일단 비주얼로 봐서 제가 공길 하긴 그렇고(웃음). 당시 30대 초,중반이었지만, 살아오면서 경험해왔던 질곡들이 정확하게 만나진 않아도 어느 정도 연산이란 캐릭터와 맞닿은 부분들이 있었어요.

연산은 최고의 지위를 가졌지만 너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그 누구에게나 어려워하고, 그 근원에는 엄마에 대한 생각도 있고, 저 역시 부모님들과 떨어져 산 기억들, 이런 것이 많이 중첩되면서, 아, 이건 내가 해야겠다, 한 거죠.(웃음)

 특히 연산은 대중들에게 한 가지 캐릭터로만 각인된 인물입니다.
그 부분에서 가장 격론이 심했고, 천편일률적인 연산의 평가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폭군이 아니라 그 안에 아픔이 있는 사람. 그 아픔으로 인해 폭정이나 사람을 죽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왜 이 사람이 그렇게 되었는지,

궁궐에 혼자 갇혀 살면서 자아가 성장되었고, 인간 본연의 만남을 갈구하고.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폭군보다는 좀 더 유약하고 애정결핍이고, 어찌 보면 노는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하는, 나중에는 ‘결국 인생은 이렇구나’ 하고 허무를 느끼는 철학적인 인물로 이 작품에서는 그려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타의 연산과는 차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위 부터) 영화 '살인의 추억', 드라마 '태양을 삼켜라', '일지매'.

 그간 강한 느낌의 배역을 주로 맡으셨어요.
일단 생김새가 그쪽인 것 같고(웃음). 2003년에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맡은 캐릭터가 워낙 좀 세다 보니 그 이후에 영화, 드라마 쪽에서 계속 강한 캐릭터, 나쁜 놈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쪽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를 아는 친구들은 저를 아주 착하다고 생각을 해요. 원래 그렇고. 또 스스로 본다면, 비극적인 연기 보다는 희극적인 연기가 잘 어울리는 배우에요. 그런데 감독들이나 연출가들이 그걸 잘 모르죠(웃음).

 평소 사진들만 봐도 강렬함이 묻어나오던데요.
그렇죠. 그러니 감독들도 그 유혹에 빠지게 되죠(웃음). 내 안의 다양한 프리즘을 인정해 주고 써줬으면 싶지만, 내가 감독이나 연출가라고 생각해도 그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이 증명했던 연기 스타일이 내 작품 한 부분에 있으면 가져다 쓰고 싶지, 모험을 할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저 뿐만이 아니라 보통의 배우들에게서 다양한 모습들이 안 나와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 사람에게나 일곱 가지 색깔이 있겠지만 저 사람은 보라색이 더욱 아름답다, 그런 건 분명히 있을 것이고, 저에게도 어떤 색깔이 더 빛이 날 것이다, 하는 게 있겠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프리즘은 따로 있어요. 이제 더 나이 들기 전에 조금씩 해 봐야죠.

 올해로 연기생활이 몇 년째이신가요?
극단 천안에서 데뷔한 것이 1989년이고, 서울에 올라와 연우 무대에서 데뷔한 건 1992년이니, 20년이 넘었네요.

 대학에선 도예(단국대 도예과)를 전공하셨다고요.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각각의 길은 다르지만, 꼭지점은 하나인 것 같아요. 예술이라는 장르를 꼭지점이라고 놓고 보면, 결국 한 곳을 향해 가는 것이잖아요. 도예를 하기 전에는 서양화를 했고, 또 디자인도 하고. 그러다 대학생 때 연극이라는 걸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배우가 직업이 된 거죠.


 <이>를 비롯하여 연극 <칠수와 만수> <날 보러 와요> 등 롱런 작품을 유독 많이 하셨습니다.
좋다는 작품은 제가 다 만났어요. <날 보러 와요>도 작품이 짜여갈 때 작가님과 같이 리서치도 했고, 또 초연 때 김형사를 했었고요. 또 그 작품이 잘 돼서 영화로 만들 때 영화 속 한 인물도 했었고.

연우 극단에 들어가서 좋은 작품들의 워크숍을 할 수 있었고, 또 제작에 제가 같이 도움이 될 수 있었어요. <이>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보면 제가 연극판에 들어와서 초반에 고생을 좀 했지만, 작품에 있어서 만큼은 운이 좋거나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앞에 언급하셨던, ‘배우로서 보여주고 싶은 또 다른 프리즘’은 어떤 모습인가요?
아마, 연출을 하지 않을까, 해요. 또 조금 더 안정이 되면 학교에서 배운 도자기를 해야 되지 않을까, 하기도 하고요. 10년, 20년 꿈으로 갖고 있으면서 조금씩 준비하고 있어요. 나중에 시골로 들어가게 되면 그런 작업들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보통 몇 년 살다가 이사할 집을 고르는 건 쉬운데, 시골로 들어가 공기 좋은 곳에서 오래오래, 평생이든 아니면 그 버금가게 살려는 곳은 쉽게 안 찾아 지더라고요.(웃음)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다큐멘터리 허브_신혜(club.cyworld.com/docuhe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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