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인간>적인 전병욱, 지독히 <인간>적인 달리기
작성일201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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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 4~50년을 버텨야지요, 지금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클로져><쉐이프><깃븐우리절믄날><영웅을 기다리며><싱싱싱><웨딩펀드>. 쉼 없이 내달려온 전병욱이 2009년 8월, <웨딩펀드>를 끝으로 돌연 휴식에 들어갔다. 2009년 4월, 연극 <웃음의 대학>을 시작으로 8개월 만에 시작된 배우 전병욱의 달리기는 가쁘고, 또 숨가쁘다. <웃음의 대학>과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공연 병행과 연극 <인간> 연습까지. ‘리얼 멀티맨’으로 컴백한 전병욱의 레이스가 시작됐다.
한가했었는데(웃음). 한가하다가, 바쁘다가 계속 반복인 것 같아요. 사실, 공연 두 편을 동시에 올리는 것만으로 괜찮다 싶었지만, 이번엔 욕심을 냈어요. 연극 <인간>에 욕심이 났거든요. “욕심을 부려서 공연이 별로였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있어요.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서는 땀을 많이 흘리고 있고, <인간>은 정신적으로 빠듯해서 식욕이 뚝 떨어졌어요. 운동으로 찌웠던 7kg이 다 빠져버렸어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희곡 ‘인간’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작업을 해야 하는데, 각색과 번역을 연출과 배우들이 함께 하고 있어요. 이게 참, 머리 아파요. 음식 하나를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면서 극 주인공인 ‘라울’과 ‘사만타’에게 어울리는 걸 찾아야 하잖아요. 그런걸 하나하나 찾다 보니 시간이 걸리는 거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다르게 생각하기, 독특한 아이디어가 매력적이에요. 재미도 있지만, 상당한 무게도 있어요. 가벼운 것도 좋지만, 생각거리를 주는 작품을 만나는 일도 좋잖아요. 배우로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특색 있는 작품이에요. 인간을 폄하하는 두 사람이 모여서 인간이 종족번식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모의 재판을 해요.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사실은….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말하고 싶은 것들을 미리 준비해봤거든요. (휴대폰 메모창을 보며) “인간, 본성, 가치에 대한 논의”라고 써 있네요(웃음). 파트너와 호흡이 좋아서 잘 나올 것 같아요.
에이, 그러지 마요.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잖아요. 기대가 적으면 “오! 잘했다”는 칭찬도 받을 수 있는데. 전 항상 “기대하지 말고 와”라고 말해요. 저도 사람인지라 실망시킬 수 있는데, 냉정하잖아요. 제작사, 연출, 동료배우, 관객, 시청자 누구 할 것 없이. 한 번의 실망으로 확 돌아서버릴 수 있는 게 현실이니까, 겁이 나죠. 한 편으로는 관객의 만족도도 중요하지만 제 만족도도 중요한 건데, 사람들 반응에 상처받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맞을까 하는 고민도 해요. 그런데, 요즘엔 상처가 나도 좀 무뎌진 것 같기도 하고(웃음).
음, 전 더 어려운 걸 하고 싶어요. 남들보다 좋은 연기를 하고 싶어요. 남들이 할 수 없는 연기력을 가지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작품을 만나는 게 참 쉽지 않죠. <웃음의 대학>도 쉽지 않은 작품인데, 연극 연기를 전공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뮤지컬 쪽으로 눈을 돌리면, 성악을 전공한 (류)정한이 형이 하는 작품을 저는 못하겠죠. 각자의 장점이 있는 거겠죠?
반 년 넘게 쉬었죠. 잘 될 듯 하면서 안됐던 작업들도 다시 둘러보고, 바빠서 못 만났던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요. 쉬는 시간 동안 나 혼자만 잘하면 되고, 나만 열심히 살면 되고, 내가 실력이 있으면 나를 찾아주고 알아봐주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변했어요. 지금은 사람이 재산이고, 서로서로 도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필요하다고 하면 무대에 서고, 또 그 분들은 제가 “공연하고 싶다”고 하면 무대에 설 수 있게 도와주시는 거고(웃음). 제가 배우로 4~50년을 더 버텨야 한다면 지금이 그 버티기의 새로운 출발선에 접어 든 거죠, 예전과는 다른.
고향에도 있었고, 식이요법이랑 운동으로 나름 몸도 만들고 그랬어요. 정말 속상한 게, 이번에 살이 빠지면서 근육도 같이 빠져버려서. 그 때 찍어둔 사진이 있는데, 혼자 흡족해하면서 보고 그래요(웃음). 숨쉬기가 불편해서 비염수술도 했어요. (비염이면 노래할 때 힘들지 않았어요?) 지장이 있어서 비염수술을 했는데, 완치는 안되더라고요. 그래도 콧소리도 많이 없어지고, 숨쉬기도 편해졌어요. 배우는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공백에 대한 다른 마음도 생겼어요. ‘정말 괜찮겠어? 괜찮겠어?’하는. 잘 쉬어야 잘할 수 있다는 걸 점점 배우고 있어요.
(웃음). 배우에 대한 비전, 믿음은 있어요. 되게 웃긴 이야기인데, 전 자신감과 자만심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아요. 자신감 마저 흔들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제 자만심이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는 날도 있어요. 상황이나, 시기, 관계에 얽혀서 흔들리는 저를 보면 좀 힘들죠. 항상 유지하고 싶은데.
전병욱 배우를 만난 기자들은 ‘진지함’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던데요.
제 입으로 ‘진지하다’는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웃음)? 그렇게 많이 보시더라고요. 처음에 코믹연기로 이슈가 돼서 그런 것 같아요. 저라는 사람은 재미있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하지만, 그것 말고도 고민할 게 정말 많거든요. ‘웃음’외에 다른 부분에 대해 설명하는 걸 보고 의외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밝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들이 아픔이나, 고민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전 솔직하게 표현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인터뷰도 되도록이면 솔직하게 하는 편이에요.
와, 누가 그래요(웃음)? 이름 말해줘요, 밥 한 번 사야겠다. 음…. “대형 뮤지컬 무대에 서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받을 때도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우선 제가 대극장에 걸 맞는 성악 발성을 갖추고, 제 비주얼이 괜찮고, 조금만 더 키가 크고, 조금 더 티켓파워가 있었다면. 대형 뮤지컬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봐요. 비교할건 아니지만, 누가 저한테 “너 소극장에서 <인간>할래, 대극장에서 대형 뮤지컬 할래?” 하고 묻는다면, 제 만족도를 먼저 생각해볼 것 같아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얻는 보람이 클지, 연기를 통해서 얻는 보람이 클지.
어떤 캐릭터도 작품보다 우선이 될 수 없어요. 지금 전 <인간>밑에 있고, 작품을 빛내기 위한 충실한 도구가 되려고 연습하고 있어요. 멀티맨으로 이름을 알리면서 속된말로 “전병욱이 멀티맨으로 다 따먹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김종욱 찾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배우로서 드라마를 해치고 싶겠어요? 전 연기는 액션이 아닌 리액션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배우인데,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속상했어요.
절 멀티맨으로 기억해줘도 괜찮아요. 좋아요. 처음엔 제가 그리고 싶은 배우의 그림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람들이 제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 그게 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했죠. 그래서 일부러 역할이 한 개인 작품만 찾아서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요? '대학로 멀티맨' 하면 "전병욱!" 이랬으면 좋겠어요.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에 멀티맨이라는 배우가 있는데, 그게 전병욱이다”라고 알려질 수 있다면 더 좋죠! 한 개의 역할이든, 여러 가지 역할이든, 작품이 무겁든, 가볍든. 그 무대에서 충실한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 생각만 해요.
연기를 할 때 편해져요. <웃음의 대학>이나 <인간>처럼 2인극으로 쭉 그 상황에 놓여서 진행되는 작품일수록 좋아요. 장면장면 끊어서 나오는 무대는 등장하기 전에 더 긴장감이 크거든요(웃음).
아주 뻔해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전 행복 하려면, 짧고 굵든, 가늘고 길든 배우로서 만족하며 살아야 해요. 제가 만족하려면요? 꾸준히 노력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믿음, 사랑 같은 가치관들이 무대 위에서 지키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위해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열심히, 꾸준히 배우 생활을 해야겠지요. 이게 제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글: 강윤희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angjuck@interpark.com)
사진: 다큐멘터리 허브 (club.cyworld.com/docuhe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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