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인간>적인 전병욱, 지독히 <인간>적인 달리기

“배우로 4~50년을 버텨야지요,  지금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클로져><쉐이프><깃븐우리절믄날><영웅을 기다리며><싱싱싱><웨딩펀드>. 쉼 없이 내달려온 전병욱이 2009년 8월, <웨딩펀드>를 끝으로 돌연 휴식에 들어갔다. 2009년 4월, 연극 <웃음의 대학>을 시작으로 8개월 만에 시작된 배우 전병욱의 달리기는 가쁘고, 또 숨가쁘다. <웃음의 대학>과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공연 병행과 연극 <인간> 연습까지. ‘리얼 멀티맨’으로 컴백한 전병욱의 레이스가 시작됐다.


<웃음의 대학>과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공연, 연극 <인간> 연습까지.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한가했었는데(웃음). 한가하다가, 바쁘다가 계속 반복인 것 같아요. 사실, 공연 두 편을 동시에 올리는 것만으로 괜찮다 싶었지만, 이번엔 욕심을 냈어요. 연극 <인간>에 욕심이 났거든요. “욕심을 부려서 공연이 별로였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있어요.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서는 땀을 많이 흘리고 있고, <인간>은 정신적으로 빠듯해서 식욕이 뚝 떨어졌어요. 운동으로 찌웠던 7kg이 다 빠져버렸어요.

 정신적으로 힘들어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희곡 ‘인간’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작업을 해야 하는데, 각색과 번역을 연출과 배우들이 함께 하고 있어요. 이게 참, 머리 아파요. 음식 하나를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면서 극 주인공인 ‘라울’과 ‘사만타’에게 어울리는 걸 찾아야 하잖아요. 그런걸 하나하나 찾다 보니 시간이 걸리는 거죠.


 살인적인 일정을 감수하면서도, <인간>에 욕심을 낸 이유가 궁금해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다르게 생각하기, 독특한 아이디어가 매력적이에요. 재미도 있지만, 상당한 무게도 있어요. 가벼운 것도 좋지만, 생각거리를 주는 작품을 만나는 일도 좋잖아요. 배우로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특색 있는 작품이에요. 인간을 폄하하는 두 사람이 모여서 인간이 종족번식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모의 재판을 해요.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사실은….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말하고 싶은 것들을 미리 준비해봤거든요. (휴대폰 메모창을 보며) “인간, 본성, 가치에 대한 논의”라고 써 있네요(웃음). 파트너와 호흡이 좋아서 잘 나올 것 같아요.

 기대 많이 할게요.
에이, 그러지 마요.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잖아요. 기대가 적으면 “오! 잘했다”는 칭찬도 받을 수 있는데. 전 항상 “기대하지 말고 와”라고 말해요. 저도 사람인지라 실망시킬 수 있는데, 냉정하잖아요. 제작사, 연출, 동료배우, 관객, 시청자 누구 할 것 없이. 한 번의 실망으로 확 돌아서버릴 수 있는 게 현실이니까, 겁이 나죠. 한 편으로는 관객의 만족도도 중요하지만 제 만족도도 중요한 건데, 사람들 반응에 상처받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맞을까 하는 고민도 해요. 그런데, 요즘엔 상처가 나도 좀 무뎌진 것 같기도 하고(웃음).

 늘 어려운 연극작품을 선택하는 것 같아요.
음, 전 더 어려운 걸 하고 싶어요. 남들보다 좋은 연기를 하고 싶어요. 남들이 할 수 없는 연기력을 가지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작품을 만나는 게 참 쉽지 않죠. <웃음의 대학>도 쉽지 않은 작품인데, 연극 연기를 전공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뮤지컬 쪽으로 눈을 돌리면, 성악을 전공한 (류)정한이 형이 하는 작품을 저는 못하겠죠. 각자의 장점이 있는 거겠죠?


 <웨딩펀드> 이후 8개월 정도 휴식기를 가졌죠?
반 년 넘게 쉬었죠. 잘 될 듯 하면서 안됐던 작업들도 다시 둘러보고, 바빠서 못 만났던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요. 쉬는 시간 동안 나 혼자만 잘하면 되고, 나만 열심히 살면 되고, 내가 실력이 있으면 나를 찾아주고 알아봐주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변했어요. 지금은 사람이 재산이고, 서로서로 도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필요하다고 하면 무대에 서고, 또 그 분들은 제가 “공연하고 싶다”고 하면 무대에 설 수 있게 도와주시는 거고(웃음). 제가 배우로 4~50년을 더 버텨야 한다면 지금이 그 버티기의 새로운 출발선에 접어 든 거죠, 예전과는 다른.

 쉬는 시간 동안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아요.
고향에도 있었고, 식이요법이랑 운동으로 나름 몸도 만들고 그랬어요. 정말 속상한 게, 이번에 살이 빠지면서 근육도 같이 빠져버려서. 그 때 찍어둔 사진이 있는데, 혼자 흡족해하면서 보고 그래요(웃음). 숨쉬기가 불편해서 비염수술도 했어요. (비염이면 노래할 때 힘들지 않았어요?) 지장이 있어서 비염수술을 했는데, 완치는 안되더라고요. 그래도 콧소리도 많이 없어지고, 숨쉬기도 편해졌어요. 배우는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공백에 대한 다른 마음도 생겼어요. ‘정말 괜찮겠어? 괜찮겠어?’하는. 잘 쉬어야 잘할 수 있다는 걸 점점 배우고 있어요.

 그래도 작품은 계속 들어오잖아요.
(웃음). 배우에 대한 비전, 믿음은 있어요. 되게 웃긴 이야기인데, 전 자신감과 자만심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아요. 자신감 마저 흔들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제 자만심이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는 날도 있어요. 상황이나, 시기, 관계에 얽혀서 흔들리는 저를 보면 좀 힘들죠. 항상 유지하고 싶은데.

 전병욱 배우를 만난 기자들은 ‘진지함’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던데요.
제 입으로 ‘진지하다’는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웃음)? 그렇게 많이 보시더라고요. 처음에 코믹연기로 이슈가 돼서 그런 것 같아요. 저라는 사람은 재미있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하지만, 그것 말고도 고민할 게 정말 많거든요. ‘웃음’외에 다른 부분에 대해 설명하는 걸 보고 의외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밝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들이 아픔이나, 고민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전 솔직하게 표현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인터뷰도 되도록이면 솔직하게 하는 편이에요.

배우 전병욱이 가진 매력의 총알이 제대로 발산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많아요.
와, 누가 그래요(웃음)? 이름 말해줘요, 밥 한 번 사야겠다. 음…. “대형 뮤지컬 무대에 서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받을 때도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우선 제가 대극장에 걸 맞는 성악 발성을 갖추고, 제 비주얼이 괜찮고, 조금만 더 키가 크고, 조금 더 티켓파워가 있었다면. 대형 뮤지컬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봐요. 비교할건 아니지만, 누가 저한테 “너 소극장에서 <인간>할래, 대극장에서 대형 뮤지컬 할래?” 하고 묻는다면, 제 만족도를 먼저 생각해볼 것 같아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얻는 보람이 클지, 연기를 통해서 얻는 보람이 클지.

 전병욱을 알린 ‘멀티맨’ 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요.
어떤 캐릭터도 작품보다 우선이 될 수 없어요. 지금 전 <인간>밑에 있고, 작품을 빛내기 위한 충실한 도구가 되려고 연습하고 있어요. 멀티맨으로 이름을 알리면서 속된말로 “전병욱이 멀티맨으로 다 따먹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김종욱 찾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배우로서 드라마를 해치고 싶겠어요? 전 연기는 액션이 아닌 리액션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배우인데,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속상했어요.


절 멀티맨으로 기억해줘도 괜찮아요. 좋아요. 처음엔 제가 그리고 싶은 배우의 그림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람들이 제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 그게 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했죠. 그래서 일부러 역할이 한 개인 작품만 찾아서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요? '대학로 멀티맨' 하면 "전병욱!" 이랬으면 좋겠어요.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에 멀티맨이라는 배우가 있는데, 그게 전병욱이다”라고 알려질 수 있다면 더 좋죠! 한 개의 역할이든, 여러 가지 역할이든, 작품이 무겁든, 가볍든. 그 무대에서 충실한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 생각만 해요.

 뮤지컬과 연극무대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게 더 잘 맞나요.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끼를 선보이기에는 뮤지컬이 잘 맞고, 제 정서, 아픔, 사랑, 꿈들을 드러내기에는 연극이 더 좋아요. 그런데 연극 연기를 전공해서 그런지, 솔직히 편한 건 연기가 좀 더 편해요.  사실, 노래할 때는 연기할 때 보다 더 떨려요(웃음). 노래를 할 때는 희열과 즐거움은 큰데, 뭐랄까.
연기를 할 때 편해져요. <웃음의 대학>이나 <인간>처럼 2인극으로 쭉 그 상황에 놓여서 진행되는 작품일수록 좋아요. 장면장면 끊어서 나오는 무대는 등장하기 전에 더 긴장감이 크거든요(웃음).

 마지막으로. 전병욱의 꿈이 있다면요?
아주 뻔해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전 행복 하려면, 짧고 굵든, 가늘고 길든 배우로서 만족하며 살아야 해요. 제가 만족하려면요? 꾸준히 노력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믿음, 사랑 같은 가치관들이 무대 위에서 지키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위해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열심히, 꾸준히 배우 생활을 해야겠지요. 이게 제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글: 강윤희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angjuck@interpark.com)
사진: 다큐멘터리 허브 (club.cyworld.com/docuhe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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