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배우의 뜨거운 계절, 이명행

등장 전과 후로 일본 현대 연극사를 나눈다고 할 정도로 강한 충격과 혁신을 보여준 재일교포 2세 연극인 고(故) 츠카 코헤이. 그가 쓰고 연출한 연극 <뜨거운 바다>가 작가 타계 2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공연했다. 일본 야타미 지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형사들과 용의자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속사포같이 쏟아내는 빠른 대사, 격양된 몸짓 등 독특한 ‘츠카식 연극 스타일’을 비롯, 치밀하게 얽힌 인간 내면 깊숙한 이야기를 풀어내 1985년 서울 초연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27년 만에 같은 극장에서 다시 막을 올린 <뜨거운 바다>는 공개 오디션으로 공연 전부터 화제를 낳았으며 열연을 펼친 네 명의 배우들이 객석과 무대를 뜨겁게 달궜다.

그 중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쉼 없이 말들을 쏟아내다가도 “내가 바로 기무라 덴베 형사”라고 말할 땐 가슴 깊숙이 턱을 끌어당기고 근엄과 자신감을 더욱 강조하는 그 사람, 살인 사건을 다각적으로 헤치는 유능한 형사이자 신참 형사에게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소중한 곁의 것들을 잃지 말라고 일깨워주는 사람, 하지만 한 여자를 향한 한 남자로서 마지막 ‘한 발’은 결국 내 딛지 못한 그 사람, 기무라 덴베 부장 형사 역을 맡은 이명행(36)에게 그 누구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정정 당당하게 뽑겠다’고 외친 공개 오디션이었다.
‘501명 중에 4명 뽑았다는데 도대체 얼마나 잘 하는거야?’ 그렇게들 생각하셔서.(웃음) 오디션에서는 실력도 중요하고 비주얼 조합도 생각하시고 뽑는 건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운 좋은 배우들인데 그렇게까지 기대를 가져주시니 처음에는 부담도 컸는데 어쨌든 해내고 나니까 그런 과정들이 자랑스러웠다.

‘공연 후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에너지 소모가 큰 작품이었다.
젊은 형사 역을 했던 (김)동원이가 무대 위에서 한 2, 3초 대사를 안 했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약간 빈혈기가 와서 머리가 띵했었다”고 하더라. 목에 좋다는 도라지액 먹고 탄산이나 커피는 안 마시고. 저녁 때 최소한 갈비탕이라도 꼭 고기 먹자고 하고.(웃음) 공연 한번 하고 나면 셔츠에 재킷까지 흠뻑 젖어서 나중에 말리면 옷에 하얀 줄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연출님(고선웅)이 배우들에게 ‘리턴 투 이노센스’라고 말씀하셨다. 순수로의 회귀, 정말 올림픽 선수들처럼 뛰고 굴렀다.

살인사건이 중심이라지만, 각 캐릭터의 개인사와 아픔이 깊게 녹아 들어있어서 더욱 감동적이었다. 이게 바로 작품의 힘이다.
연습 중에 초연 배우이신 전무송 선생님도 오셨고, 츠카 코헤이 선생님 기일이 있어서 제사도 지냈다. ‘아타미 살인사건’, ‘월미도 살인사건’ 등 이름을 달리해 대학로에서 공연된 적이 있지만, 초연 때 이름인 <뜨거운 바다>로 다시 하는 건 27년 만에 처음이었다. 게다가 같은 공연장인 아르코대극장의 느낌도 강했고. 막이 촥 떨어지고 올라가는데 소름이 돋으면서 와, 내가 정말 대단한 흐름 가운데에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공연 끝나고 쫑파티 때, 앞으로 더 좋고 멋진 역할이 많이 있겠지만 지금은 남자배우로서 기무라 덴베 역을 맡고, 또 공연을 잘 마쳤다는 게 남부러울 것 없다고 말했다. 굉장한 영광이다.


객석이나 평단의 반응도 뜨거웠다. 공연 후기를 찾아 보는 편인가?
가끔 검색창에 내 이름도 쳐보고.(웃음) 후기는 괜히 상처 받을 것도 같아서 안 보는데 주변에서 “좋게 올라 왔던데?” 그러면 찾아보는 정도다. 이번에는, 변명밖에 안되겠지만 연습 기간이 한 달 일주일 정도로 짧았고, 2시간 10분 동안 네 명의 배우들이 거의 계속 무대 위에 나와 있으니까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공연 초반엔 열심히 만 했지 여유를 갖고 논다는 느낌은 없어서 좀 딱딱한 공연이었달까? 이후 공연 느낌이 좀 달라졌고, 초반에 보셨던 분은 다시 한번 보여드리고 싶었다.

연극 <칼로막베스>의 막베스 부인 역 이후 배우 이명행에 대한 주목도가 점점 커졌다. 여장도 처음이었고.
(고)선웅이 형이 극단 마방진 창단 5주년 작품으로 그간 구축해 왔던 극단 색에 정점을 찍자, 하고 만든 작품이 <칼로막베스>다. 캐스팅이 안된 상황에서 대본을 읽을 때 마침 여배우가 안 와서 레이디 막베스의 대사를 읽게 되었는데 반응이 “어? 재밌는데?” (웃음) 그 다음부터 자꾸 “명행이가 해봐”해서 ‘이 분위기는 뭐지?’ 그랬다.(웃음) 어찌 하다 보니 그 역을 맡게 되었는데 그 작품이 많은 사람들이 이명행이라는 배우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해 준 것 같다.

극단 마방진 단원으로서 고선웅 연출가의 인연도 중요하겠다.
영죽무대(중앙대학교 연극동아리)와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서 배운 게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한 연극이었고, 그게 고등학교 과정이라고 한다면, 마방진 스타일이라고 하는, 선웅이 형이 가꾼 연기론은 대학교 과정 같다. 리얼리즘을 통한 분석과 느낌을 갖고, 그게 꽉 차야지 마방진 스타일이 제대로 발현이 되는 것 같다. <팔인> <강철왕>을 거쳐서 <칼로막베스>까지 역할이 점점 커지고 성장했다고 보는데, 선웅이 형이 의도 하셨던 안 하셨던 간에 나를 잘 경영해 준 것 같다. 그 점이 굉장히 고맙다.


고교 연극반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만약 그때 미술이든 음악이든 다른 할 거리가 주어졌다면 다 열심히 했었을 것 같다. 원래 문학 서클이었는데, 시 쓰고 고등학교 문학동아리 연합으로 시화전도 했다. 진짜 교회 오빠 같네.(웃음) 축제 때 우연히 팀을 꾸려 공연을 하곤 했는데 그때 담임선생님이 연극반 선생님이셨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친구 따라 하다 보니 배우를 하게 되었다. 당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서 선생님 역할을 했었다.

대학 전공은 불문학(중앙대학교 불어불문학과)이다.
고등학생 때 제2외국어가 불어였는데 좋아하기도 했고, 불어선생님이 되려고 했다. 교회 다니면서 기타치고 노래하는 것도, 악기 다루는 걸 좋아해서 대학 1학년 1학기 때 팬플룻 동아리에 들어갔었다. 연극반도 관심 있었는데 학교 선배들이 ‘거기 들어가면 학교 생활 쫑난다’고 해서 겁도 났었고.(웃음) 그런데 결국 2학기 때 들어가서 대학 생활 내내 공부는 안하고 연극만 죽어라 했다. (웃음)

언제 전업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나.
동아리 활동하면서 20대를 불태웠는데 그게 너무 좋았던 것 같다. 군대 가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봤을 때 연극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졸업 후 한예종에 간 선배들이 있어서 나도 좀 체계적으로 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한예종 시험을 봐서 붙으면 가고, 아니면 어디든 극단을 알아봐야겠다, 하던 차에 입학 시험에 붙었다.


주변 반응은 어땠나. 공부 잘하고 착실한 맏아들, 진짜 교회 오빠였던 것 같은데. (웃음)
부모님은 약간 방임 스타일? (웃음) 대학 졸업할 때까지 성적표를 잘 안 보시는 스타일이셨고. (웃음) 예술계통에 계시지는 않지만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으니까, 네가 어려운 길인데 가려고 하는구나, 네가 하겠다면야 뭐, 그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에 대해 많이 생각하시는 분들이시다. 어머니, 아버지, 감사 드립니다. (웃음)

학창시절을 포함해 그간 맡았던 배역들이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약간 불만이랄까? 이래도 되나? 싶은 게, 사람들이 날 배우로 잘 못 알아본다는 거다. (웃음) 공연을 마치고 바로 로비에 나가도 못 알아본다. 평소에는 어리버리, 헐랭이 느낌이 크고. 그래서 캐스팅에 맥락이 없다. 신사적인 이미지면 그런 배역을 연달아 맡는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어느 땐 젠틀맨, 그 다음엔 주정뱅이다. 선배들은 오히려 스펙트럼 있어서 그게 더 낫다고 하는데, 한편으론 배우도 자신을 파는 건데, 난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 걸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새 연출님들이나 형들한테는 스테미너가 좋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무대 위에서 힘이 좋다는 뜻인데, 그래서 혼자 하는 역할들, 막 뛰어다니고 뜬금 없이 나와서 소리 지르고(웃음), 그런 역을 많이 한 것 같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바탕으로 한 <푸르른 날에> 오민호 역도 인상 깊었다.
<뜨거운 바다>가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면 <푸르른 날에>는 감정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극중에서 고문당하고 미치고. 공연이 끝났을 때 정말 다 놔두고 혼자 여행을 가고 싶었다. 집사람한테 못할 짓인데, 몇 번 싸우고 혼자 있고 싶다고 그러고. (웃음) 정말 집사람에게 늘 감사하고 있다. 정말 좋은 것 같다. (웃음)

배우로서 본인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아아, 그런 건 알아서 써주셔야지.(웃음) 음, 목소리가 좀 큰 편이다. 그래서 잘 들리게 할 수 있고. 선웅이 형이, 무대 위에서 (내가) 밉상은 아니라고 하더라. 배우는 조각 같이 잘 생기던지 어떤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딱히 뭘 찍어서 이게 매력이다, 그런 건 아닌데 밉상은 아니라고. (웃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단편의 얼굴상’(2010) 수상 등 단편 영화에서 활약도 뛰어나다.
무대는 오늘 이만큼 쌓았다가 또 부셨다가 더 쌓다가 결국 관객과 만나는 시점에서 에너지가 오가면서 완성이 되는데, 영화 현장은 늘 내가 그리던 그림과 다르다. 순발력, 순간 집중력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 지점이 리얼이고, 그 순간순간 발현되는 것들이 굉장히 재미있다. 안 해 봤으니까 새로운 작업도 해 보고 싶고, 영화나 드라마가 기록이 남는다는 것도 굉장히 매력적인 것 같다.

차기작은 국립극단 삼국유사 프로젝트, <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이다.
쟁쟁한 선배님들 많이 나오시니까 공연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많이 변주가 된, 재기 발랄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연말에 극단 마방진의 <리어외전>을 LG아트센터에서 하는데 <칼로막베스> 같은 분위기가 날 것 같다. 노령화 사회에 버림 받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한국 상황과 리어왕이 맞물린다. 캐스팅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 배우로든 스텝으로든 참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작의 평이 좋아 기대가 더욱 큰 게 사실이다.
<뜨거운 바다>까지 역할이 점점 커져서 부담이 되기도 한다. ‘다음 작품 기대 되요’ ‘꼭 보러 갈게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번에는 역할이 크진 않다. 나만 생각하면 어떤 역이든 재밌게 할 텐데 보시는 분들 생각하면 더 멋있는 역할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웃음) 가장 좋은 건 꾸준히 작업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역할이 작아도 무대에 선다는 건 늘 배우는 게 있더라.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춘 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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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2

  • lky23** 2012.09.19

    처음 무대위 이명행 배우님을 보게된 이후로, 늘 명행배우님 작품은 챙겨 보게 되네요~ 언제나 변함없는 진정성있는 연기, 그렇지만 늘 새로운 모습으로 감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화이팅하시고 또 멋진 모습 기대할게요^^

  • zeen** 2012.09.06

    이명행배우님 만세만세만세!!!!입니다. 정말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셔서 무척 감동했습니다. 앞으로도 늘 파이팅하세요!!!아자아자아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