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은 모든 배우들의 욕망, 열정 있으면 언젠간 됩니다” <3월의 눈> 변희봉

공개 리허설을 마치고 그는 “무척 긴장이 되었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1965년 성우로 데뷔, 약 50여 년간 수 많은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며 명연기로 명장면을 이뤄내 온 그지만 43년 만에 서는 연극 무대는 그에게 분명 또 다른 도전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배우 변희봉(71)은 변화를 꿈꾸는 배우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 ‘살인의 추억’ ‘공공의 적2’ ‘괴물’ 등을 비롯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여명의 눈동자’ ‘허준’ ‘하얀거탑’ 등 프로필에서 비슷한 배역을 찾아보기 힘든 그의 열정은 여전히 청춘이다.

43년 만에 연극이 다소 의외이다. 그 사이에 제의가 많았을 것 같은데.
제의가 들어올 때마다 다른 일이 겹쳐 있었다. 나는 일이 겹치는 걸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다. 겹쳐도 되는 일이 있고, 돈이 아니라 금싸라기를 갖다 줘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금년 전반기에는 일을 하나도 안하고 쉬겠다고 했는데 어느 날 손 감독(손진책 연출)한테 전화가 왔다.

손진책 연출과 과거 극단 산하에 같이 있었던 인연이 있다.
거기서 내가 연극할 때 손 감독은 무대감독을 했었다. 참 순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후 손 감독은 허규 선생님 밑으로 가서 연극을 했고 난 계속 남아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이후 40년 간 공교롭게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연락이 오니 얼마나 반가운가. 연극 이야기를 하길래 만나서 밥이나 한 끼 먹자, 그러면서 연극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출연 계기는 연출에 대한 믿음 때문인가?
좋은 감독을 만나고 싶은 건 배우들의 욕망이고 좋은 감독에게 가야 뭐든 변신하게 된다. 또 좋은 감독 손에는 분명히 좋은 시나리오가 들려있다. 손 감독의 훌륭함을 안다. 지금까지 상당한 실력으로 길을 걸어 왔다는 건 자타가 공인하고 또 나 역시 그렇게 생각을 했고. 더욱이 백성희 선생님을 모시고 한다는 건, 백성희 선생님의 연극이 60년이니 더 이상 이야기 할 것도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뭔가를 얻을 수 있겠구나,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 속으로 굉장히 흥분이 됐었다.

또 오랜 친구의 부탁을 듣는 것 만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손 감독의 연출을 받아서 내가 뭔가 변신하는 연기를 하고, 손 감독도 변희봉이라는 배우를 만나서 무언가 하는 것이 의의가 있고, 이런 저런 것들이 <3월의 눈>을 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연극 연습은 어떠한가?
작품에 대한 나의 생각과 손 감독의 생각이 처음에는 상당히 상반됐었다. 공연 영상을 봤기 때문에 전과 똑같이는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3월의 눈>이라는 책(대본)에서 풍기는 연극은, 자연 그대로의 이야기였다. 백성희, 장민호 선생님이 하실 땐 정말 역할이 그 나이였고, 우리는 20년 떨어진 나이에서 하려니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지만 손 감독이 그냥 하라고 한다. 그냥 지금 나이로 해도 맞으니까. 근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웃음)

이런 저런 불안은 아직도 있지만 모든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자신한다, 지금 뭐가 될 것 같다, 이런 이야기는 감히 할 수도 없다. 최선을 다해 감독의 조언을 다 받아들이는 연기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본명은 변인철이다. 성우시절 악역만 맡아 이미지를 바꾸고자 개명했다는 당시 신문기사를 봤다.
옛날에 시골에선 어르신들이 이름을 두 개, 세 개 짓곤 했다. 그 중에 희봉을 해 놓은 게 있었다. 그런데 사회 나오니 인철이라는 이름이 참 많다. 성우를 하고 있는데 그 인철이라는 사람들 세금이 다 나한테 왔더라. (웃음) 그때 바꿔서 오늘날까지 잘 지내고 있다. (웃음)

서울에 취직해 올라와 우연히 라디오에서 성우 모집 광고를 듣고 응시했다고 들었다. 당시의 선택에 만족하는가.
합격해서 성우 교육을 받는데 사투리를 쓰면 무조건 안 된다고 날 따로 빼 놨다.(변희봉은 전남 장성 출신이다) “안되니까 너 나와.” 할 때 그 심적인 고통, 그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걸 어떻게 이겨냈는지 모르겠다. 당시 65년 전후는 농경사회였고 어딜 못 들어가면 다 농사짓고, 그래도 이건 희망이 있다는 건 알았다.

그래서 지금도 일등 보다는 자기가 정말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꼴찌가 낫다고 말한다. 일등은 경쟁자도 많을 뿐더러 금방 식상한다. 모든 것은 올라가면 떨어진다. 요즘은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되고 배우가 되기도 하지만 반짝 하고 없어진 배우가 수도 없이 많다. 우리는 대사 한 마디부터 시작한 사람들이다. 지금 꼴찌라도 정말 열정을 갖고 도덕성만 버리지 않는다면 기회는 온다고 생각한다.

손진책 연출이 “변희봉 배우는 연습에서나 생활에서나 완벽주의자”라고 하더라.
충분히 그렇게 이야기 하실 수 있다. 그래도 안 되는 게 사람 일이다. 방 안에서 베개를 붙들고 앉아서 대본을 외우고 있으면 그 만큼 수준 밖에 안 된다는 거다. 그런데 집에서 생각할 때와 밖에 나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또 다르게 다가온다. 산을 가면서 대본을 보고, 길을 걸으면서 읽어보면 다 다르다. 헉헉 거리면서 읽어보면 그런대로 다르고. 집에서만 대본을 읽으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굉장히 많다. 그런 차이가 있다는 거다.

사람이 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 달리하려고 하는 모습이 있으면 분명 달라진다는 거다. 나라고 뭐 특별한 것이 있겠냐마는 대사를 외우거나 하는 것에 마음은 철저하다. 절대로 상대방에게 실례도 안되어야 할 뿐더러, 이번 작품에선 다른 분들은 다 몇 번씩 공연을 해 온 분들이기 때문에 나 혼자 연습에 대본 들고 하면 안될 것 같아서 정말 빨리 외웠다. 정말 노력을 했다. 그런 것을 보고 손 감독이 하는 이야기 같다.

젊었을 때도 그러했는가?
무슨 역할을 하나 맡아도 정말 잘 해보려고 했다. 어디를 다니든 조금만 눈에 띄는 사람이 있으면 메모를 다 해서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 흉내를 낸다, 이 사람 모습을 표현한다, 그랬다.

‘보리밭 밟기’라는 단막극에게 출연하게 되었는데, 보리밭에 쭉 서서 밭을 밟으면 모두가 똑같이 나올 거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보이지 않을 것 같고. 그러다 시골에 갔는데 한 꼬부랑 할머니가 나오시는 걸 보고 ‘아, 옳지! 난 저거야’ 그랬다. 그래서 배우들이 쭉 서서 보리밭을 밟을 때 난 영감처럼 허리를 굽혀서 밟았다. 감독이 카메라 앵글에 안 잡혀서 화면에서 빠진다고 해도 풀 샷에만 잡히면 된다고 했는데, 그 찍어놓은 화면이 너무 기가 막혔다.

바로 그런 거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커다란 일들은 다 머릿속에 있고 정리도 하는데, 가장 소소한 걸 생각 못한다. 순식간에 생각이 없으면 지나가버리는 거다. 그래서 영화나 연극, 텔레비전을 예사로 보면 별로 얻는 게 없다. 더욱이 연극은 뭔가 얻어가거나 무언가 느낄 생각을 하고 오면 정말 돈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3월의 눈>은 어떤 생각으로 관객들이 보러 오면 좋을까.
모든 가정은 순탄하지 않다. 여기서도 영돈이 하나가 허물어지는 바람에 손자까지 연결이 되고 장오는 집을 주고 떠나는 사람이 되지 않는가. 얼마나 비극인가. 젊은이가 한번 잘 못 생각하면 가정에 큰 불행을 가져온다는 걸 젊은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고, 5, 60대는 자신들에게 곧 다가올 7, 80대 모습을 생각할 수 있으며, 7, 80대 어르신들에겐 저런 것이 가정이다, 하는 메시지가 충분히 담겨 있다.

앞으로도 왕성한 활동 계획이 있을 것이다.
하반기에 작품이 몇 개 있지만, 이 연극을 하면서 느낀 게, 좀 비워보자,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다. 정말로 이제는 비워서 가자, 하는 마음이다. 엔터테인먼트는 들어오는 건 무조건 해야 하는 게 있는데, 그렇게 두 프로, 세 프로 더 하고 돈 더 번다고 부자 되는 건 아니다.

배우가 그냥 쫓아다니면 안 된다. 나는 정말로 그런 걸 경멸한다. 집에다 돈을 얼마나 쌓아 놨는지 몰라도 그런 사람도 밥 세 끼 밖에 못 먹는다. 누가 나이 먹었는데 주인공 배역만 주나, 누가 발전 없는 사람을 갖다 쓰겠는가. 주어지는 것은 해야겠지만 최대한 괜찮은 쪽에 서서 했으면 좋겠다. 1년에 한 작품이든 두 작품이든 관객들이 보면서 얻어지는 게 있는, 그런 좋은 작품을 하고 싶다.

후배들에게 선배 배우로서 조언을 해 준다면.
그런 이야기를 물어보는 사람도 이젠 없지만, 묻는 이가 있다면,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라고 말하고 싶다. 배역이 이래서 못하고 상황이 이래서 못하고, 누가 처음부터 큰 배역을 맡겠는가. 지금 주어진 것을 최대한, 상대방을 잡아 먹을 듯이 쳐다보고서라도 뭔가 끄집어 낼 수 있는 걸 끄집어 내야 저 사람이 여기서는 이래도 다른 데에 쓰면 되겠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최고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춘 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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