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아닌 마음으로” 11년 째 무대를 지키는 배우 임강희


두 번째 무대를 시작한 서재형 연출의 음악극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이 무대 위에 배우 임강희가 보인다. 잔인한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여인 ‘이오카스테’가 돼 피를 토하듯 울부짖다, ‘코러스’가 돼 남자 배우들과 함께 무대를 누비는 그의 모습에선 그 동안 보아왔던 청순한 이미지지 대신 강렬함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이번 연극을 통해 또 한번 역량을 끌어올린, 쉴 새 없이 무대를 누비고 있는 배우 임강희를, 이제야 만났다.

“첫 연극, 정말 행복합니다”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개막 전 날, 임강희는 <투모로우 모닝> 때 자른 단발머리와 환한 미소로 기자를 맞았다. ‘이오카스테’란 처절한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그이지만 긴장감보단 기대감이 앞선 상태인듯 했다.

“원래 처음 연습실에 있다가 극장에 오면 정말 떨리거든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워낙 ‘세게’ 연습을 해서 그런지 긴장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공간에 밀도가 생기고 조명이 있어서 집중이 잘되고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어린 배우들도 헛갈려 하지 않고 밀도 있게 잘해가고 있더라고요.”

임강희가 무엇보다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번 작품이 첫 연극에, 거의 처음으로 나이가 실제와 비슷하거나 많은 역을 소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령대가 있는 역할을 맡아본 적이 없어요. 갑자기 10대 역할… 사실 힘들었어요(웃음). 이 작품이 음악극이긴 하지만 연극에 가깝잖아요. 그동안 일부로 뮤지컬만 한 게 아니라, 연극에 한번 발을 들여놓지 못하니 계기가 안 생겼던 건데, 연락이 와서 정말 좋았죠. 연극이 하고 싶었던 찰나에 좋은 극단, 좋은 배우들과 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물론 극복할 점도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에 핏덩이 아들을 버리지만 결국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가련한 여인 ‘이오카스테’는 역시 만만치 않은 캐릭터.

“연출님이 이야기 하셨던 ‘어둠 속의 댄서’ 같이 어두운 영화들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어요. 사실 지금도 100 퍼센트라고 이야기 하지 못해요. 이 작품을 하면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아보지 않은 걸 굉장히 후회했어요. 기회 있을 때 결혼도 빨리 하고 아이도 낳아 볼 걸(웃음). 이오카스테가 너무 아프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확 오지 않아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정말 다행인 건, 연출님, 배우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전엔 이 여자가 정말 아프겠다, 이게 끝이었다면 지금은 와…..이렇게 운명에 휩싸일 수 있구나. 처절하다, 이게 어느 정도 느껴지더라고요. ”

“연습실 가는 게 진짜 행복했다”며 즐거운 마음을 감추지 않은 그의 다음 행보는 <인당수 사랑가>다. 그가 말한 ‘10대 역할’을 소화해야 하는, 역시나 만만치 않은 작품이지만 배우 임강희의 매력을 한껏 분출한 무대이기도 했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깊어 개막이 좌초될 뻔 했을 때 “우울증 비슷하게 힘들었다”고 할 정도다. 이번 무대가 ‘춘향’으로서는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르기에 남다르다.
“춘향이 얼마 안 남았어요(웃음). 어린 소녀에게서 나올만한 감성이, 흉내는 낼 수 있는데 그 특유의 찬란함은 힘들더라고요. 앞으로 1년만 하고 나머지는 유리아 같이 어린 친구들에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단아? 난 카멜레온 같은 여자”
임강희는 대표적인 동안 배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밀조밀한 외모에 고운 목소리 덕분에 그 동안 <인당수 사랑가> <남한상성> <화성에서 꿈꾸다> <모차르트!> 등 시대극에서 사랑스러운 여인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다. 이를 통해 단아한 여인 이미지가 따라 붙었다.

“목소리에서 오는 느낌 때문에 버림받고 지고지순한 역할을 많이 했어요. 처음엔 싫었는데 나중엔 감사하게 되더라고요. 어쨌든 배우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컴퍼니나 관객분들이 찾아준다는 게 감사한 일인데 그걸 제가 몰랐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이런 이미지도 있지만 다른 이미지도 있거든요. 전 앞으로 계속 배우 할거니까…저 카멜레온 같은 여자에요. 하하하”

실제는 어떠냐고 묻자 “손이 많이 가는 여자”라며 깔깔 웃는다.
“안무를 빨리 익히는 편인데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에선 멍해지기 일쑤였어요. 이오카스테만 연기하는 게 아니라 코러스도 같이하는데, 남자들과 함께 뛸 때 에너지는 무서울 지경이었거든요. 빨리 뛰는 것도 아닌데... 지금은 뭐, 에라 모르겠다 이러면서 같이 뛰어 다녀요(웃음). 덤벙거리는 면도 있고,그러다 어두운 면도 있고, 저도 갈피를 못 잡겠네요(웃음).”

데뷔 11년 차, 초등학교 3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어린이 합창단에서 공연을 하며 자연스럽게 배우를 꿈꿨고 어머니의 반대로 성악과에 진학했지만 배우의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 2003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앙상블로 시작해 임강희는 다양한 작품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소화해 왔다. 지금은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데다, 그의 여동생도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 등에서 배우로 활동 중이다.
“힘들 때도 있어요. 특히 여자 배우는 여러 모로 버티기가 힘드니까. 육체적으로도 힘들어요. 무대에서 뛰어다니다 보면 다치는 경우도 많고 남들은 무릎이 하얀데 시커멓게 멍들어 있어서, 여자인가 싶기도 하고(웃음).”

 

성악가가 되길 바라는 어머니 반대를 무릅쓰고 뮤지컬 배우가 됐지만 “과연 이 길이 맞을까” 고민도 했단다.
“전 연습 막판에 뭔가를 찾아내는 스타일인데 정말 끼 있는 배우들은 던져주면 바로 자신감 있게 하거든요. 저런 사람이 여배우인데… 나란 애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너무 좋아서. 무대에 서면 행복하거든요. 나중에 느꼈어요. 나만의 색깔이 있구나, 저들을 따라갈 필요가 없구나. 생각을 굳히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지금은 너무 재미있어요.”

지금 그의 숙제는 “모든 대사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공연을 하면서 이성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시작하면 배우도, 관객도 힘들어진다”며 “테크닉이 아닌 마음으로 대사와 노래를 하고자 항상 노력한다”고 말한다.

<더 코러스-오이디푸스>로 연기 영역을 넓힌 그가 앞으로 맡고 싶은 역은 ‘사이코패스’. 겉으론 착하고 얌전한데 속은 사이코패스 역을 사실감 있게 연기해 보고 싶다고.
“해보고 싶은 역할 굉장히 많아요. 저는 남자배우 역할이 탐날 때가 되게 많더라고요. 이번 ‘오이디푸스’도 약간 각색해서 여자가 맡으면 얼마나 좋을까도 싶고. 여자가 주인공인 극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물론 지금은 남자배우가 전면에 나서는 극이 많지만, 이런 고민은 3~4년 전에 끝났고요!(웃음)”

<인당수 사랑가> 이후 달콤한 여행을 계획해 놨다. 지난 해부터 물리적인 휴식이 거의 없을 정도로 달려온 그녀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지금 영혼이 약간 나가 있어요(웃음). 그 동안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고, 그래서 허해진 느낌도 들어요. <인당수 사랑가> 끝나고 뉴욕 여행을 가요. 한 달 넘게 머물면서 공연도 보고 새로운 에너지를 받고 싶어요.”


글: 송지혜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ong@interpark.com)
사진: 배경훈 (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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