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성찰하게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은밀한 기쁨> 추상미

배우 추상미가 5년 만의 복귀작으로 선택한 <은밀한 기쁨>은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은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본질을 잃은 사회상을 꼬집는 이 연극에서 추상미는 주인공 '이사벨'을 맡았다. 이사벨은 아버지의 후처 캐서린을 책임지며 나름의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둘째 딸로, 경제논리를 추구하는 다른 가족들의 약삭빠른 행동에 번번이 제동을 거는 인물이다.

지난달 말 진행된 추상미와의 인터뷰는 이 작품에 임하는 그녀의 고민들을 엿보는 자리였다. 쉬는 동안 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기도 했던 그녀는 "멈춰 서서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맡은 캐릭터뿐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풍토와 문화예술의 위기에 대해서까지 생각했다는 이야기는 더욱 원숙해진 그녀의 활약을 기대케 했다. 비단 배우로서뿐 아니라,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쌓아가는 한 작가로서 말이다.

<은밀한 기쁨>은 어떤 작품인가.
플롯이 그렇게 복잡한 작품은 아니다. 구성이 드라마틱하면 오히려 풀기 쉬울 텐데, 이 작품은 잔잔하면서 비극적인 장면도 있고…굉장히 섬세하게 심리를 표현해야 하는 극이다. 대본에 나오는 장면과는 별개로 가져가야 하는 서브텍스트가 많다. 배우들끼리는 그걸 '보따리'라고 하는데(웃음) 각 캐릭터의 인생사나 감정선이 다층적이어서 어렵다. 특히 이사벨은 더 그렇다. 그가 가진 가치관과 정신이 이 극을 끌고 가기 때문에, 인물 자체가 무척 섬세하게 구축돼야 한다. 그런 부분이 참 매력적이면서도 배우로서 어렵고 또 도전이 된다.

이사벨은 다들 골칫덩어리로 여기는 캐서린을 끝까지 책임지려 한다. 그녀의 속내는 무엇인가.
이사벨도 캐서린이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인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사벨은 캐서린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작가가 이 대사를 정말 기가 막힐 만큼 절묘한 타이밍에 잘 썼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은 취향의 문제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나. 저 사람은 호감이야, 또는 비호감이야, 저 사람은 나한테 이런 유익을 줘서 좋아, 하는 식으로. 그런데 이사벨은 혐오나 비호감을 뛰어 넘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악만 끼치는 캐서린이라는 존재를 그냥 품고 가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취향의 문제로 물어보면 이사벨은 대답을 할 수가 없다.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지금도 간혹 있다. 주변을 보면 정말 사소해 보이는 어떤 것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가끔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런 걸 절대 못 하는 거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평소 모든 면에서 선행을 하는 건 아닌데, 그 부분만 유독 지킨다. 이사벨도 그렇다. 자기가 뭔가 약속을 하고 신념을 가졌으면 그걸 죽을 때까지 밀고 나가려 하는 사람인 거다. 그게 상당히 슬프기도 하지만, 이 인물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이사벨을 통해 "이상주의자가 가진 한계도 표현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사벨은) 사실 굉장히 편협한 성격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게 된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준으로 봤을 때 부도덕하거나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면 그걸 꼭 꼬집어 얘기해야 하는 여자인 거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는 사람들은 많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처럼. 그런데 이사벨은 그렇게 사랑과 연민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가치관을 굉장히 이성적으로 쫓아가는 사람이다. 성인(聖人)의 대열에 든 사람은 아닌 거지. 그게 이상주의자 같다. 정치적인 진보주의자, 혹은 이상주의자를 말할 때 떠오르는 모습이 있지 않나.

남에게 관대하지 않은 인물이겠다.
그렇다. 어떻게 관대할 수가 있겠나. 단점이 막 눈앞에 보이는데. 오히려 캐서린처럼 너무 약자이거나 성격 파탄자인 경우에는 그냥 감싸줄 수 있지만, 그런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그래도 그런 한계를 표현해야지, 이사벨을 그냥 성인으로 표현해버리면 이 인물이 극적으로 의미를 주지 못한다.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감을 얻지도 못할 테고. 작가도 분명 그 지점에서 고민을 많이 한 것 같다. 곳곳에 이사벨의 결점이 드러나게 썼다.


함께 출연하는 이명행 배우와의 호흡은 어떤가.
명행 씨의 가장 큰 장점은 참 밝다는 거다. 성격이 굉장히 외향적이더라. 굉장히 해맑고 순수하고 선하다. 그래서 어떤 장면을 연기할 때 여과 없이 돌직구로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투명함이 있다. 배우로서 굉장히 좋은 점이다. 그리고 목소리와 발음도 굉장히 좋지 않나. 배우로서 장점이 정말 많은 것 같다. 명행 씨와는 맨날 아기 이야기를 한다. 아기가 있는 사람들만의 애로사항이 있거든(웃음).

김광보 연출과는 2005년 <프루프> 이후 9년 만에 함께 하게 됐다. 작품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많이 나누나.
연출님이 "이 작품은 이사벨이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과 타인이 이사벨에게 끼치는 영향, 딱 그거다"라고 하셨는데 그게 맞더라. 한 마디로 사람들간의 관계, 가치관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끼리 "그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연출님도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인간들이 저러냐" 이런 환멸에 찬 이야기도 하시고(웃음). 나머지는 그냥 사담한다. 인생 사는 이야기도 하고, 아이들 이야기도 하고.

본인도 세속적인 가치를 좇는 사람들을 보면서 회의감을 느끼나.
내가 이사벨을 좀 닮은 면이 있다면 남들보다 물질이나 성공 같은 것을 좀 덜 추구한다는 면일 것이다. 추구를 전혀 안 한다면 거짓말이지만(웃음). 왜냐면 그건 노예가 되는 것이니까. 돈과 물질은 다스리라고 있는 거지 노예가 되라고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돈을 좇는 것도 일종의 중독 같다. 그게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결과적으로 그런 삶이 자기에게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생각하지 않고 눈이 벌게져서 좇아가는 거지. 그런 데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것이 미디어고. 그런 풍토들이 좀 불쌍하다. 그래서 난 이런 작품이 좋은 작품 같다.

요즘 대학로도 그렇다. 5년 전만 해도 이 작품 괜찮겠다, 어떤 성찰을 하게 하는 작품이겠다 싶은 포스터들이 보였는데 어제 대학로를 돌아봤더니 로맨틱 코미디만 있는 것 같더라. 문화예술은 관객들이 멈춰 서서 사회 풍토를 좀 들여다보고 성찰하게 해줘야 하는데, 그냥 같이 휩쓸려서 가는 것 같았다. 예술의 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웃음). 다 본 건 아니니까.


그간의 인터뷰를 보면 이지적이고 이성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 배우로서 감성적·직관적인 면도 있을 텐데, 작품에 접근할 때는 어떤 면을 주로 활용하는지 궁금하다.
일단 처음에 작품에 접근할 때는 분석을 많이 한다. 논리적인 분석이 필요한 작업을 할 때는 거기 최대한 집중하고, 지금처럼 공연을 열흘 남겨놓고 정말 그 인물이 되어야 할 때는 직관과 감정이 필요하다. 특히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꼭 돼야 하는 것은 내가 이 인물을 사랑하는 거다. 연기를 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이 역할을 끝까지 갖고 가기 위해서. 내가 이 역할에 매력을 느끼고 좋아하고 불쌍해하고 그래야 애착이 생겨나고 열정이 생겨난다. 사실 나는 그 애착이 배우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기에 재능이 아무리 많아도 인물에 대한 애착이 없으면 굉장히 드라이해지거든. 진정성이 없어지는 거다. 지금은 그 애착을 만드는 과정에 있다. 또 이러다 감정이 과잉되면 이성으로 눌러주기도 하고. 조절과 균형이 되게 중요하다.

다독가로 알고 있다. 요즘 관심 가진 책이나 작가는.
최근에 <울분>이라는 책을 봤다. 필립 로스라는 미국 작가가 쓴 책인데, 퓰리처상 등 상을 많이 받은 작가다. 요즘엔 그걸 봤다.

육아에 대한 책도 수십 권 읽었다고. 어떤 책이 제일 도움이 많이 됐나.
제일 좋았던 건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라는 책인데, 주 별로 아이의 특성들, 이상행동들이 쭉 나온다. 갓난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장통도 있고, 어떤 호르몬이 나오기도 해서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거나 하는 이상행동이 있다. 그런 걸 엄마들이 모르면 완전 황당한 거다. 외계인 하나 갖다 놓은 것처럼(웃음). 그 책을 읽고 많은 도움이 됐다. 또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도 기억에 남았다. 문성근 선배의 고모인 문은희 박사가 쓴 책인데, 엄마의 상처가 아기한테도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 내 마음이 어떤 상태가 돼야 하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근데 사실 육아 책을 많이 본 것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굉장히 힘들고 고단한 일이다. 어떤 날은 기계적으로 하게 되고, 또 난 일하던 엄마기 때문에 그런 데서 살짝 우울증이 올 수도 있고 여러 위험요소가 있지 않나. 그래서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육아 책을 많이 읽었다.

아이를 키우며 인간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을 것 같다.
사랑에 대한 관점이 좀 바뀌었다. 나도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떤 결핍이 있어서 다정한 말이나 포옹 같은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 것들이 사랑의 첫 번째 표현방법이라는 얄팍한(웃음)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아이를 키워보니 그렇지 않을 때가 많더라. 아이가 너무 예쁘지만 이 아이를 야단치고 규율을 잡아야 할 때가 있다. 나는 크리스찬인데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사랑의 매가 왜 필요한지 알게 되고. 물론 아직 매를 때리지는 않지만, 하나의 은유로서 말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예의만 차리는 것이 좋은 건지, 경우에 따라 무슨 말을 해주는 것이 좋은 건지,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고. 더 확대해본다면 사회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지,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지,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다고 들었다. 앞으로 연출가·작가로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부분 같다. 내가 왜 사는가 하는 본질이 무너졌을 때 병이 들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지 않나. 어떤 사회적 이슈를 개인의 문제로 푸는 영화, 개인의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건드리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그래야 많은 분들이 공감도 할 수 있고. 우리는 이런 병을 앓고 있다, 지금 이런 사회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같이 이야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좋은 것 같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배경훈 (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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