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낼 때까지 진짜 끝난 것이 아니다” <유도소년> 박훈

2014년 상반기 대학로에 단연 화제로 꼽히는 연극은 <유도소년>이다. 극단 간다가 선보이는 창작 연극 <유도소년>은 고등학교 운동 선수들이 저마다 사람과 세상에 부딪히며 성장해가는 이야기로, 웃음과 감동의 조화가 기막히게 어우러져 연일 매진을 기록 중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대본에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잘 노는' 극단 간다 배우들의 합이 돋보이지만, 그 중에서도 주인공 유도 선수 경찬 역을 맡은 박훈에게 시선을 뺐기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체육관에서 몸을 단련하고 운동 선수처럼 삭발을 한 그는 외형 뿐 아니라 시종일관 촌스럽고 저돌적이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뜨거운 가슴을 지닌 경찬의 내면을 짙게 펼쳐내며 생기 넘치는 인물로 변신 중이다. "인터뷰를 하러 오는 길이 무척 설레었다."며 함박 웃음을 짓던 박훈의 얼굴 위에 경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비춰지는 건 그와 경찬이 그리 다르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일 것 같다.

'경찬의 감성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이런 감성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분명히 계시겠지만 얼마나 좋아하실까 반신반의 했었거든요. 그런데 첫 공연하는 순간 느낌이 왔어요. 이거 되겠구나, 하고요."

구르고 뛰고 소리치고 웃는다. <유도소년>의 에너지는 무대와 객석을 가리지 않고 넘실댄다. 배우들은 두꺼운 유도복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관객들은 눈물이 나도록 웃다가 뜨거워지는 가슴에 손을 살며시 얹게 된다. 극단 간다 10주년 퍼레이드 작품으로 성공적인 초연을 이어가고 있는 <유도소년>에서 주인공 경찬 역을 맡은 박훈은 간다 배우는 아니다. <올모스트 메인> 출연으로 맺어진 극단과의 인연이 계속된 셈인데 "티켓이 많이 팔리게 도와주거나 창작 공연 경험이 많은 배우도 아닌데 민폐가 아닐까" 우려했던 부분을 이제 말끔히 씻어냈다.

"시키는 거 다 한다고, 운동하라면 하고 다른 배우들이 못하는 것도 다 한다고 했어요. 어떤 사명감 같은 게 있었거든요. 지금 이렇게 많은 관객들이 좋아해 주시는 건 간다가 좋은 판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전 대단한 놈이 아닙니다. (웃음) 요즘엔 너무 과대평가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해요."


만 서른 세 살의 나이로 고등학교 2학년생을 연기하는 것 역시 그에게 또다른 도전일 터. "극중 '딱 봐도 내가 동안인데'라는 대사에 그렇게 많은 분들이 빵 터지실 줄은 몰랐다."는 그는 선 굵은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어리다고 일부러 어린 척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단다.

"외형보다 그 사람의 감성을 표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경찬 역을 하는데 제 삶이 안 묻어 나올 수는 없지요. 다행히 저도 시골 사람이고, 어렸을 때 운동도 했기 때문에 경찬의 감성들을 잘 알고 있어요. 또 어린 시절 가슴 떨려 다가갈 수도 없는 사랑의 추억은 누구나 다 있잖아요."

강원도 정선 사북 탄광촌에서 나고 자란 박훈은 초등학생 때 단거리 육상 선수도 했고 태권도, 배구도 했다. 운동신경은 타고 났지만 오로지 TV만이 유일한 문화예술의 통로였던 해발 700미터 마을의 한 소년은 TV에 나오고 싶었고, 그렇게 배우의 꿈을 품기 시작했다.

"공연에 대한 개념도 없었죠. 그런데 당시 TV에 나오는 이휘재 같은 사람들이 다 연극과를 나왔더라고요. 그런데 시골에서는 그런 곳에 가는 게 흔하지 않잖아요. 대학 체육학과에 원서를 넣어 합격을 했지만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그게 그거라더라"라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셨다면서 뮤지컬학과를 말씀하셨죠."

백제예술대학 뮤지컬학과에 입학했지만 연극과 뮤지컬은 낯선 세계 그 자체였다. 발레 수업, 분장 수업은 시골 아이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지만 배우에 대한 꿈은 더욱 뚜렷해졌다. 스무 살이 넘어 처음 가본 영화관에서 <쉬리>를 보고 나오던 길, 관객들이 최민식, 한석규를 두고 "정말 연기 잘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군대 갔다 와서 6만원 들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어요. 서울은 기회의 땅이었으니까. 야식, 자장면, 피자 등 배달 3종 세트, 단란 주점 웨이터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어요. 서울의 야경이 얼마나 예쁜지 아세요? 밤에 대리 운전 끝나고 차도, 사람도 없는 고요한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에서 야경을 보는데 매일매일 희망이 생기더라고요. 마치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처럼, '나도 여기에서 시작할 수 있다, 분명히 잘 할 수 있다.' 하고요."


배우는 삶의 마지막 희망, "버티면 기회는 올 것이다"

"20대는 경험이다, 돈 한푼 벌지 않고 경험을 위해 살자고 생각"했기에 스물 일곱 살 남들 보다 늦은 나이의 데뷔까지 조바심은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만큼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중에 만난 <오! 당신이 잠든 사이>(이하 <오당신>)는 자신의 삶과 닮은 모양이 많아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뮤지컬이라는 걸 좀 이상하게 봤거든요.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노래를 한다는 게 굉장히 어색했죠. 시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웃음) 그런데 <오당신>은 제가 겪었던 비슷한 가족 해체의 이야기를 담은 것도 있고,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마침 2007년에 <오당신>은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대상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던 터라 직후 공연 오디션엔 역대 최다 배우들이 몰려들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베드로가 된 박훈은 스스로도 뽑힌 이유가 궁금해 물었더니 장유정 연출이 "네가 열심히 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단다.

"<오당신>에 '상처는 깊이만 있지 크기가 없어서 누구의 것이 더 큰지 알 수가 없다.'라는 대사가 있어요. 그 말에 아! 딱 꽂혔죠. 꼭 그 작품을 하고 싶었어요. 형의 자살, 부모님의 이혼 등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연기는 절대 놓아서는 안 되는 저의 마지막 보루, 유일한 희망이었거든요."

데뷔 후 7년, 이젠 고향에서 산 만큼 서울 생활도 쌓이고 경험도 더해져 삶의 농도를 더해가는 걸 느낀다는 그다. <늑대의 유혹> <형제는 용감했다> <젊음의 행진> 등의 작품에서 유쾌한 역할을 맡아 한때는 '코믹전문 배우'로 불리기도 했다는 그는 <모범생들> <퍼즐> <트라이앵글> 등을 통해 배우로서의 또 다른 모습을 펼쳐내었다. 무조건 틀리지 않게, '마치 암기 잘하는 것'처럼 했다는 연기에 대한 태도도 "대사가 주는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기에 이르렀단다. "남들보단 늦었지만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의 길로 가고 있구나, 하는 걸 느낀다."는 그는 속도가 아닌 방향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이 분명하다. 호탕한 그의 아버지는 "TV에 나오지도 않으면서 무슨 배우냐."라고 무심한 척 하시지만 배우인 아들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신단다.


"우리 동네 제일 유명한 배우가 원빈이에요. 그 사람 정도 되어야 배우라는 게 아버지 생각이신데 "그럼 아버지가 날 그렇게 낳으셨어야죠."라며 대응하죠. (웃음) 김태형 연출을 만나 <모범생들>을 하면서 코믹 배우가 아닌 진지하고 날카로운 면들을 보여줄 수 있었고, 민복기 선생님을 만나 <바람난 삼대>를 하며 배우가 한계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후배들에게도 어떤 역할을 맡는 것보다 그 역을 맡는 순간부터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해요. 버티고 열심히 하면 기회는 반드시 주어진다고 믿으니까요."

사진 촬영에 유난히 쑥쓰러워하던 그는 크고 맑게 웃었고 대화에 위트가 넘쳐났다. "낙관주의가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말하던 지난 시간들이 지금의 박훈을 더욱 단단하고 결이 짙은 배우를 만들어주었음이 분명하다. 배우를 꿈꾸게 했던 영화와 드라마로 활동의 폭을 넓히고 싶은 마음도 여전하다. 어디에서든 쉽게 자기를 볼 수 있게 된다면 흩어진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더해진 것이다. 인생이 보이는 얼굴이 탐나 빨리 늙어 30대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스무 살 기억은 이제 "경험을 잘 쌓아 그 모습이 묻어나는 40대"의 꿈으로 이어진다. 아, 그런데 그가 무척 유머러스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에이~ 이렇게 동안 역 할 줄은 몰랐죠. 내가 20대 때 잘못 생각했구나 싶어요. 요즘 그렇게 스킨 케어를 한다니까요."(웃음)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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