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내 진짜 얼굴을 찾아서, <수탉들의 싸움> 박은석&김준원

<필로우맨><히스토리 보이즈> 등의 수작을 소개해온 노네임씨어터가 내달 11일 새로운 연극 <수탉들의 싸움>을 무대에 올린다. 노네임씨어터라는 이름만으로도 신뢰가 가는데, 박은석·김준원·손지윤·선종남 등 출연진의 명단이 한번 더 눈길을 끈다. 유년기부터 약 15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연기에 뜻을 두고 모국에 돌아온 박은석은 <히스토리 보이즈><햄릿> 등에서 섬세한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고, <날 보러와요><필로우맨> 등에서 묵직한 연기를 펼쳐온 김준원 역시 더 말할 것 없이 믿음직한 배우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 작가 마이크 바틀렛이 쓴 <수탉들의 싸움>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헷갈려 하는 주인공 ‘존’의 이야기를 담았다. 동성의 애인 ‘M’과 새로 만난 여자 ‘W’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존은 자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혼란을 느끼고, 그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각기 얼마나 다르고 고유하며 또 복잡한 존재인지를 상기시킨다. 공연을 3주 앞둔 지난 18일, 한창 연습에 몰입해 깊이를 더해가고 있는 두 배우를 만났다.

Q <수탉들의 싸움>은 어떤 작품인가.
박은석(이하 은석): 일단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고, 정체성의 혼란,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이 사회가 사람을 정의하는 틀이 본인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주인공 존은 사실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자신이 게이인지 이성애자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자신이 누군지를 잘 모른다. 남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그에게 최대한 맞춰주고 공존하려 하는데, 혼자 있을 때는 그냥 백지와 같다. 그래서 옆에 있는 남자친구(M), 혹은 여자친구(W)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사람이 되는데, 나중에 셋이 같이 모이게 되니까 컴퓨터가 과부화되는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존은 게이여서 M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M이 좋아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넌 게이야.”라고 규정짓는다. 난 그냥 이 사람이 좋고, 하필이면 그가 남자였을 뿐인데. 그런데 사회가 게이라고 도장을 찍어버리니 남자만 좋아해야 된다는 억압된 사고방식을 갖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여자가 좋아지는 거다. 그렇게 처음으로 존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을 때 사회적으로 문제가 일어난다.

또 그 상황에서 남자친구의 아버지(F)가 등장해서 셋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는데, 그가 말하는 대사에 이 작품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는 존에게 “너는 네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 결정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존은 그 말에 계속 반박하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사실 그에게는 더 다양한 모습이 있는데도, 사회가 만든 틀 때문에 게이, 호모,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 안에 갇혀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안타까운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일단 존의 관점에서는 그런 이야기다.

김준원(이하 준원): 동성애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작품에서 동성애는 주제가 아니라 소재일 뿐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게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이 작품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가치를 말하고 있다. 이성애자·동성애자를 떠나서 내 이름을 찾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한 인간을 어떤 사회적 부류로 나눠서 남자 혹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김준원 혹은 박은석,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진 ‘바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같다. 보시고 나면 단순히 성정체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에 끌려가듯 살 것인지 등의 화두가 던져질 것 같다.


Q 그렇다면 사회적 틀에 갇히지 않은 진짜 존과 M은 어떤 인물인가. 또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나.
준원: M의 대사 중에 “나는 전적인 헌신을 원해.”라는 대사가 있다. 존을 너무 사랑해서 존이 형제 같다는 이야기도 한다. M에게 존은 연인관계를 넘어서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은, 헤어질 수 없는 관계인 거다. 존과 절대 헤어질 수 없고, 존을 내 나무 그늘 아래에 두고 싶어하는. 그런 인물 같다.

은석: 존은 이런 말을 한다. “난 이 여자가 좋아. 나한테 관심이 있고, 나한테 부드럽고 친절하고, 내 말을 들어주고, 같이 대화를 하고, 공유를 해.”라고. 근데 M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게 일방적이다. 항상 M이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만 활동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그 밖으로 나가면 M은 존이 다시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도록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M이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존을 잃을까봐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는 거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섹스를 하든 요리를 하든 옆에서 같이 도와주면서 함께하고 수다 떨고 웃는 것인데, M은 항상 내 말을 끊고 들어와서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킨다.

그래서 존이 지쳐있을 때 여자(W)를 만나는데, 그 여자가 먼저 존에게 접근해서 내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그 여자와의 관계에서 뭔가 특별한 걸 느끼는 거다. 만약 존이 M과 정말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그 여자에게 안 넘어갔겠지. M과의 관계에서 공허함을 느꼈을 때 W가 그걸 다 채워주기 때문에 존이 둘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거다. 근데 하필이면 한 사람은 남자고 한 사람은 여자다. 그러니 그게 존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의 문제로 보이는데, 존에게는 그것보다 ‘이 사람’ 이냐, ‘저 사람’이냐갸 중요한 거다.

Q 대본에서 인상 깊었던 대사를 꼽는다면.
은석: 아까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데, “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정의를 내려야 하고, 프레젠테이션 하듯 만들어서 너희에게 보여줘야 하냐.”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난 그냥 나고, 이 사람이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은 것이 나인데, 왜 나를 하나로 모아서 보여줘야 된다고 말하는 거냐, 그 부분이 와 닿는다. 사회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모습이나 행동이 있지 않나.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살고 싶은데 계속 그런 것을 강요받으니까. 나도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을 했고. 내 국적이 미국인지 한국인지, 영어가 더 편한지 한국어가 더 편한지,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난 그냥 이럴 땐 한국어를 쓰고 또 어떤 땐 영어를 쓰는 건데. 그런 부분이 비슷하다.

준원: 내가 좋아하는 대사는 존의 대사인데, “내가 누구랑 잤냐고 물어보지 않고 왜 내가 무언가랑 잤냐고 물어보냐.”고 하는 장면이 있다. 그게 좋고, M의 대사 중에는 “존, 들어올 때 불 끄고 쿠션 갖고 들어와.”라는 대사가 있다. 일상적인 대사이지만 아마 공연을 보시면 그 대사에서 여러 가지를 느끼게 되실 것 같다.


Q 연습하며 가장 고민되는 부분은?
은석: 너무 많다(웃음). 일단 내가 이제까지 연기해왔던 캐릭터는 대개 외향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정체성이 확실하고 자기주도적이고, 유머도 있고, 능글맞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도 있었고. 그런데 존은 그들과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인물이다. 예전의 캐릭터는 내 안에 있는 외향적인 모습을 조금 증폭시키면 표현할 수가 있었는데, 내가 원래 갖고 있는 존의 특성들은 워낙 작아서 그걸 증폭시켜도 (존에게) 못 미치는 것 같다.

Q 그 작은 부분은 어떤 것인가.
은석: 내 안에 어딘가는 있겠지. 나는 이런 사람이야,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이게 맞는 건지, 옳은 선택을 했는지, 옳은 사랑을 하고 있는지 등의 생각들이 많지 않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 조금씩 닮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존이 “사랑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나는 내 안에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하지 못하는 캐릭터거든. 하지만 나도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고 그 마음은 같으니까, 계속 연습을 하면서 그 작은 부분을 증폭하는 과정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Q 김준원 배우는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든가.
준원:
힘들다기보다 중점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 템포, 리듬감이다. 때리는 싸움이 아니라 말로 하는 싸움인데, 다양한 리듬과 템포를 타고 공격이 들어가고 받아져야 그 느낌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 그 부분을 굉장히 중요시하면서 연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캐릭터적인 면에 있어서는 동성애자를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끼리 게이 클럽에도 함께 가봤다. 은석이가 인기가 되게 많았다(웃음). 같이 가서 어울려 보기도 했는데 그걸 다 경험하고 나니 표면적인 걸 가져오는 것 보다 내적인 걸 충실히 하면 (외적인 것도) 자연스럽게 생기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든 남자든 자기 안에 굉장히 여러 가지 모습이 있지 않나. 남자들 중에도 소심한 사람이 있고, 여자들 중에도 대범한 사람이 있고. 그렇게 내 안에 많은 내가 공존하는데,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면 되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M의 대사가 더 여성스럽게 써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좀 남자답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웃음). 일부러 게이처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더 게이같지 않게 하려고.

은석: 게이스럽게 하려는 것 자체가 게이를 한 가지 유형으로 정의하는 거니까. 우리가 참 많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작품을 통해서 그런 선입관을 깨고 사람들의 정체성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도록 연결고리를 좀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Q 존처럼 주위 사람들이 규정지은 자신의 정체성에 거부감을 느꼈던 적이 있나.
은석:
다 있지 않나?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대학교 시절이었는데, 내가 사람들을 좋아하고 노는 것,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어떤 자리에서든 항상 내가 주도하고 웃겨야 된다는 생각이 있다. 근데 나중엔 사람들이 그런 내 모습을 너무 당연시하는 거다. 나도 좀 가만히 앉아있고 싶은데 뭘 해야 한다는 이미지가 박혀버리니까. 그래서 그 때부터 좀 바뀌었다. 사람들이 “넌 웃긴 애야, 분위기 메이커야.”라고 규정짓는 게 싫어서 그런 자리는 안 나가고, 만나는 사람들도 바뀌고 그랬던 것 같다.

Q 그런 경우 주위의 기대를 수용하지 않는 편인가.
은석: 그렇다.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내가 원해서 하는 거라면 그 몇만 배 이상을 해줄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면 아예 안 한다. 내 의지와 다르게 행동하는 건 스스로 허용하지 않는다.
준원: 오늘 은석이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되는데?(웃음).

Q 김준원 배우는 어떤가.
준원: 사실 모든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경험을 할 거다. 태어나면 “하지 마, 울지 마, 떠들지 마, 싸우지 마.” 이런 말부터 배우지 않나.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우는 법을 까먹고, 웃을 때도 가식적으로 웃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숨기는 것이 사회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오지 않았나. 그래서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자신이 진짜 뭘 원하는지 모르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해야 한다는 것들을 따라가는 거지. 권위, 권력,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도 그럴 때가 많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강요받으며 자라온 것 같다.

Q 그런 행동에 스스로 제동을 걸었던 시점이 있었나.
준원: 아는데 제동은 못 걸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래도 배우들은 그런 표현을 무대에서라도 간접적으로 할 수 있고 또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인 것 같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그걸 알고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EBS에서 정의에 대한 마이클 센델의 강의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 사람이 능동적인 삶이란 내가 목마르다고 코카콜라를 사서 마시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건 머릿속에 코카콜라가 주입되어 있기 때문에 나오는 수동적인 반응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이란 뭘까. 그것을 아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문제 같다. “하지 마, 하지 마.” 이런 소리를 듣다가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찾으려 하니 잘 모르는 거다. 아마 존도 그런 인물인 것 같다. 그건 아마 평생 찾아가야 할 것 같다.


Q 이번 작품을 통해서 처음 같이 연기를 하게 됐는데, 서로에게 받은 인상은 어떤가.
준원: 난 남자배우한텐 관심 없는데(웃음). 은석이는 워커홀릭이다. 엄청 성실하고, 대사를 이렇게 빨리 외우는 친구는 처음 봤다. 분량이 가장 많은데도 제일 먼저 외웠다. 정말 대본을 손에서 안 놓는다. 다른 친구들은 몰래 연습할지도 모르지만 이 친구는 대놓고 열심히 한다. 이렇게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연기도 잘 하는 배우가 성실하기까지 하면 안 되는 거다. 이건 반칙이다!(웃음)

은석: 성실한 게 아니라, 내가 불리하니까 안달이 나서 그렇게 한 거다. 준원이 형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이 <필로우맨>이었는데, 공연을 보며 언제쯤 저 사람이랑 같이 무대에 설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항상 내가 배우고 싶고 존경하는 배우들이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한다. <푸르른 날에>를 봤을 때는 (이)명행 형이 그랬고, <필로우맨>을 보면서는 준원 형이 그랬고. 근데 이 작품에 캐스팅되면서 형이 출연한다고 하길래 무조건 한다고 했다. 지금도 어떻게든 배우고 싶으니까 (연습) 준비를 해오는 거다. 이 사람이 뭘 가지고 올지 모르니까 미리 싸울 준비를 해오는 거지. 수탉들의 ‘싸움’이니까.

준원: 앞으로 더 친해지려고 노력해야겠다. 왜냐면 이 친구가 엄청 잘 될 것 같거든(웃음).

Q 마지막 질문이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몇 단어로 꼽는다면.
준원:
지금 바로 떠오르는 것은 ‘사랑’. 그리고 ‘존중’.

은석: 요즘 들어 생각하는 것은 ‘감사함’이다. 감사할 줄 알면 나머지는 다 해소되는 것 같다. 욕심도 안 나고, 딴 생각도 안 하게 되고, 내 자신을 탓하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게 되고. 내가 감사할 줄만 알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많이 한다. 너는 빨리 장르 바꿔서 영화나 드라마도 하고, 미국에 가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근데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게 좋고, 이런 작품들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물론 좋은 작품을 하다 보면 좋은 시너지 효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있지만, 지금은 여기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품, 좋은 일을 하고 있어서 좋다.

준원: 사랑과 존중, 그리고 하나 더 꼽자면 ‘연기’.

은석: 나는 감사함과 ‘윤리’. 난 ‘상위 1%’ 같은 말로 사람들을 나누는 것이 너무 싫다. 내가 너보다 이걸 많이 했으니 더 얻고 갈 거야, 라는 생각은 안 하면서 살고 싶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배경훈 (Mr.Hodol@Mr-Hodol.com)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