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 이순재와 '회오리' 신구의 만남! <황금연못>

스크린과 무대를 오가며 활약하고 있는 연기파 노장들이 처음으로 한 작품에서 만난다. 그 작품은 내달 9일 개막하는 연극 <황금연못>으로, 이순재·신구와 나문희·성병숙이 황혼을 앞둔 노부부로 분해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이순재와 신구는 무뚝뚝한 말로 딸에게 상처를 주는 아버지 노만 역을, 나문희와 성병숙은 따스한 어머니 에셀 역을 맡았다. 각각의 이름만으로도 벌써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배우들인데, 이들이 한데 모여 그려낼 인생사는 과연 얼마만큼의 깊이를 갖추고 있을까. 

미국 극작가 어니스트 톰슨의 처녀작 <황금연못>은 1979년 첫 무대에 올라 토니상을 수상했고, 1981년에는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돼 아카데미상 남·여우주연상과 각색상을 수상했다. 당시 영화에 출연한 헨리 폰다·제인 폰다 부녀는 실제로 서로 소원한 사이로 지내다 이 영화를 통해 화해를 했다고 한다. 초연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명작의 힘은 여전한 것일까, 배우들은 이 연극에 대해 “너무도 아름답다.”고 입을 모았다.

나문희와 신구의 첫 만남
한 역할 맡은 신구·이순재의 다른 모습도 기대


Q <황금연못>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이순재: 워낙 많이 알려진 작품이고,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배우 헨리 폰다와 캐서린 헵번이 출연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나이 먹고 한 번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번에 마침 제의가 들어왔다. 힘들고 어려운 작품이지만 용기를 내서 참여하게 됐다.

신구: 이 역할이 우리와 나이가 같다. 쉽게 말해 죽음을 앞둔 사람인데, 그 모습이 내 모습과 비슷해서 택했다.

나문희: 이순재 선생님과 신구 선생님의 상대역을 맡아서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이 했지만, 언젠가는 해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이 남편들과 살면서 실제로 많이들 겪는 상황이 그려져 있고,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들이 보이는 안간힘 같은 것들, 즐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즐기면서도 동시에 많이 참는 그런 모습이 담겨 있다. 그래서 최대한 우리나라 엄마들의 현실에 초점을 맞춰서 해보려고 한다.

성병숙: 이순재 선생님이 어느 날 전화를 해서 같이 하자고 하시길래 스케줄도 안보고 바로 한다고 했다. 선생님과 <늙은 부부 이야기>를 하면서 만났었는데, 삶의 자세에 있어서, 또 선배로서 존경할 점이 많은 분이시다. 그런 선배님이 하자고 하시니 당연히 출연하고 싶었다.
내가 평소 제일 부러워하는 것이 황혼 무렵의 노부부가 팔짱을 끼고 서 있거나 공원을 걷는 모습이다. 현실에서는 그런 걸 못하니까 여기서라도 한번 해봐야지 싶었다(웃음).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남편에게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무대에서라도 해봐야지, 라는 생각으로 기쁘게 연습하고 있다.

Q 나문희와 신구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인데.
나문희: 항상 잘하신다고 생각했고 한번 같이 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하게 됐다. (신구) 선생님이 불편해하실지는 몰라도 선생님이 갖고 계신 것이 워낙 많으니 맞춰서 잘 해보고 싶다. 이순재 선생님하고는 잘 맞는다.

이순재: 나문희 씨와는 여러 번 해봤다. 이번에 본격적으로 연극을 같이 하게 됐는데, 상대방이 워낙 든든하니까 걱정이 없다. 이 연극이 미국 작품인데, 어떻게 보면 서양의 노인들의 모습도 우리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걸 느꼈다.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좀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적 노마, 한국적 에셀을 보여드리려고 한다.

Q 신구와 이순재의 더블캐스팅도 화제다. 두 배우의 연기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다.
신구: 어차피 생긴 게 다르니까 연기도 다르게 나온다(웃음). 똑같다면 볼 이유도 없지.

이순재: 연극의 역할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어느 하나의 규정된 틀이 있어서 거기 맞추는 게 아니다. 신구 선생이 표현하는 게 있고 내가 표현하는 게 있다. 또 그 차이가 볼만한 것이다. 그게 바로 역할의 차이고 해석의 차이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무대에 선 수많은 햄릿이 있었지만, 동일한 햄릿은 없지 않나. 그게 연극의 볼거리다.

신구: 난 여태까지 연극을 더블캐스팅으로 해본 적이 없다. 이렇게 상대를 바꿔서 교차출연을 해본 적은 더군다나 없다. 그래서 좀 얼떨떨하고 약간 혼란스럽기도 한데 적응되리라 생각한다.

Q 신구는 얼마 전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에 출연했는데, 이 작품과는 어떻게 다른가.
신구: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의 경우는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하는 경우고, 이 작품에서는 그렇게까지는 죽음을 바로 앞둔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나이가 되면 죽음이 바로 내 문제로 생각된다. 이순재 형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인이 되면 5분마다 한 번씩 죽음을 생각한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수시로 하게 되는 것 같다. 이게 바로 우리 문제구나 싶다.

이순재: 이 작품에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 곧 닥칠 죽음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삶에 애착을 갖고 있는 모습이 아주 절묘하게 녹아 있다.

Q 이순재는 전작 <사랑별곡>을 포함해 가족, 사랑 등 일상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을 많이 해왔는데.
이순재: <사랑별곡>과 이 작품이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노인들의 세계가 비슷하다 보니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연극은 공연을 3주 남겨놓고 관객들이 더 몰리기 시작했다. 그 관객들은 거의 동숭동에 안 오시는 분들이다. 예산에서 올라오는 사람, 천안에서 올라오는 사람, 대부분 40~50대 부부이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올라오는 자녀들이었다. 연극이 바로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또 나이 먹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개똥철학일지는 몰라도 인생의 철학이 담겨있다. 아주 가볍고 일상적인 이야기일지라도 그 안에 의미가 있다. 젊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는 재미있는 코미디도 좋지만, 그와는 좀 다른 차원의 연극이 바로 이런 작품이 아닐까.

Q 나문희는 얼마 전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 작품은 어떤가.
나문희:
이 작품은 아무래도 서양 작품이다 보니 감성이 더 풍부하게 글로 표현돼 있다. 에셀은 상당히 긍정적인 인물이고, 남편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남편은 계속 죽음이 앞에 있다고 조바심을 내지만, 에셀은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무대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관객들이 ‘저렇게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항상 사회적으로 좀 영향을 미치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웃음).

Q 성병숙은 네 사람 중 막내인데, 선배들과 같이 연습하는 것이 어떤가.
성병숙: 막내가 참 편하다(웃음). 왜냐하면 조금 봐주시는 것도 있고, 많이 알고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실수한다고 여겨주시니까. 그리고 남편 두 분이 너무나 다르다. 아시다시피 한 분은 ‘직진’이시고 한 분은 ‘회오리’시다 보니 두 분이 연기하는 노만도 너무나 다르다. 하루는 이순재 선생님과, 하루는 신구 선생님과 연기를 하는데 하는 맛이 달라서 굉장히 흥미롭다. 연극은 연습기간이 길다 보니 공연도 중요하지만 2달 동안 연습하면서 배우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두 분이 연습하는 방식을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또 다들 얼마나 체력적으로 강하신지 모른다. 의외로 막내인 내가 제일 빌빌댄다. 나문희 선생님은 스케줄이 바쁜데도 일주일에 세 번 나오시고 토요일 일요일은 풀로 나와서 연습하신다. 신구 선생님은 정말 건강하시고, 말은 무뚝뚝해도 디테일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신다. 이순재 선생님은 술도 안 드시고 열심히 하시고. 나도 선배님들 나이가 됐을 때 저렇게 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관계없이 지금도 무대 서면 떨려”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극하고 싶다."

Q 이 연극이 20~30대 관객들에게는 어떤 지점에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신구: 젊은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똑같이 고민해야 될 문제가 담겨있다. 투표를 나이 먹은 사람들도 하고 젊은 사람들도 하는 것처럼, 나이에 관계없이 살아가는 데 다 필요한 이야기다.

나문희: 극중 아버지가 딸과도 갈등이 많다. 그래서 엄마가 중간에서 상당히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한다. 우리 집 영감도 딸하고 갈등이 깊게 있었기 때문에 친근감이 확 느껴졌고, 이게 남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극적으로 누가 죽거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깊은 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젊은 사람들에게도 많이 공감될 것 같다.

성병숙: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시집을 보낼 때까지 편안하기만 한 집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내 경우도 딸과의 사이가 굉장히 힘들었다. 부모님의 삶이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부모님과의 불화가 어떻게 풀어질 수 있는지를 보면서 여러 감정을 느끼실 것 같다. 이 연극의 포인트는 디테일이다. 감정의 미묘한 부분들,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자식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며 또 칭찬이 얼마나 힘을 주는지, 부모는 그걸 어떻게 깨닫게 되는지 등이 연극에 녹아 있다. 어느 집이든 ‘우리 집 얘기’가 될 것 같다. TV에서만 보던 이 대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를 보실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Q 네 배우 모두 수십 년 연극을 해왔는데, 여전히 무대에 올라가기 전 긴장이 되나.
신구: 나이와 관계 없이 늘 새로운 관객을 처음 맞이하는 것이니까 긴장될 수밖에 없다. 또 그 긴장감이 없으면 연기자가 루즈해진다.

나문희: 많이 떨린다. 젊었을 때와는 또 다른 책임감이 느껴지고.

성병숙: 당연히 떨린다. 공연하기 10분 전이 되면 손이 싸늘해진다. 그리고 호흡은 가빠지고 화장실 가고 싶고. 그런데 나는 그걸 즐긴다. 물고기를 잡았을 때 퍼덕퍼덕 살아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꼭 그 물고기가 된 것 같다. 떨리는 그 감정이 나를 젊어지게 하는 것 같다. 그만큼 연습을 더 열심히 충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연극은 영화·드라마처럼 편집이나 감독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배우의 부담이나 외로움이 큰 장르다.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면서도 꾸준히 무대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성병숙: 나는 나문희 선생님이 연극을 이렇게 계속 해주시는 게 너무 감사하고 좋다. 대선배들이 와주시니까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받고 큼지막한 작품들이 연극계에 계속 자취를 남기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연극을 하는 이유는 가장 아날로그에 가깝기 때문이다. 기술이 많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친구가 보고 싶으면 ‘야, 만나자’ 하지 않나. 연극은 바로 그런 만남이다. 눈을 마주치고 만지고 같이 밥을 먹는 것이 가능한 것이 연극이다. TV같은 경우는 방송 한번 나가면 몇 만 명에게 퍼져 나가는 효력이 있지만, 연극은 정말 가장 아날로그하기 때문에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문희: 연극에서는 관객과 무언가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연극은 발이 땅에 딱 닿아야 한다. 그러려면 기운도 좋아야 하고,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굉장히 힘이 든다. 한 대본을 갖고 두 달쯤 연습하면 처음엔 땅에 발을 잘 못 디디고 상당히 어색한데, 훈련을 계속 하다 보면 그게 좀 된다. 관객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더 많이 되고. 일할 때 호흡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 부분을 연극에서 많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극을 하고 싶다.

Q 젊은 배우들이 연기에 대해 많은 조언을 구할 것 같다. 그런 경우 어떤 이야기를 해주나.
이순재: TV 드라마의 경우 옛날에는 보통 대본이 일찍 나왔다. 그래서 이틀 사흘 정도 대본 읽기를 하는데 거의 연극 연습하듯 했고, 작가나 연출자한테 구체적인 디렉션을 받았다. 또 과거엔 연출이 작품에 맞춰서 의상, 소품까지 다 디렉션을 했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당일치기 대본으로 촬영을 하다 보니까 작가는 거의 현장에 나오지 않고, 연출은 시간에 쫓겨서 제대로 된 연출을 못한다. 그러다 보니 배우 본인이 알아서 하게 돼 있는데, 노련한 사람들은 자기가 알아서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게 안 된다. 그래서 심한 경우 역할과 맞지 않는데도 코디네이터가 갖다 준 옷을 그냥 입고 나온다. 가끔 보다 못해 한 두 마디 해줄 때도 있다. 그걸 수용하는 친구는 대화가 되는 거고, 수용 안 하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연극은 한달 반 두 달을 연습하니까 후배들, 동료들과 구체적으로 교감을 해가면서 맞춰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시작할 때는 좀 엉성해 봬도 나중에는 호흡이 맞아간다. 영화의 경우에도 정밀하게 작업을 이뤄지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TV에서만 그런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신구: 난 별로 이야기 안 한다. 먼저 물어오는 경우에는 내 경험과 아는 한에서 이야기해주지. 근데 요즘 젊은 친구들이 영악하고 잘 한다. 언어구사에 있어서는 좀 걸릴 때가 있는데, 우리 때보다 훨씬 똑똑하다. 재주도 많고.

이순재: 조금만 기본을 만들어주면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Q <황금연못>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꼽는다면.
나문희: 아직 연습 중이어서 하나를 골라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장면 장면마다 다 아름다움이 있다.

이순재: 평생을 함께 한 부부가 생을 마지막까지 함께 가면서 이루어낸 사랑이 너무 아름답다. 그걸 극대화해서 수식하는 명대사는 하나도 없지만, 일상적인 대화 안에서도 그 사랑이 다 나타나 있다. 창 밖을 내다보는 뒷모습이라든가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상징적이고 아름답다. 그것을 관객 분들도 공감하도록 하려면 우리가 열심히 해야겠지. 정말 아름다운 연극이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