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20년 연기내공, <월남스키부대> 서현철

근 2시간의 인터뷰가 이렇게 훌쩍 지나간 것은 오랜만이다. 서현철 배우와의 이야기는 한 편의 따뜻하고 유쾌한 만담을 듣는 것만 같았다. 그가 지하철에서 틈틈이 관찰한 사람들을 흉내낼 때는 작은 손짓만으로도 웃음이 터졌고, 직접 만든 종이인형으로 다섯 살 난 딸과 역할극을 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다정다감한 부성이 담뿍 느껴졌다. 연극 <월남스키부대>를 비롯해 <그날들><사랑별곡> 등의 무대에서 그가 보여준 따스한 인간미는 배우 본연의 매력이었던 것이다.

서현철은 서른 한 살의 나이에 번듯한 직장에 사표를 내고 뒤늦게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돈을 벌기 위해 사는 삶이 아무래도 덧없고 허망해서다. 그렇게 삼십 대에 전업을 한 그는 제대로 연기수업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연기로 이름을 알리며 드라마와 뮤지컬로 발을 넓혔고, 어느새 데뷔 20년을 맞았다. 소소한 일상사에 감춰진 눈물과 웃음을 추출해 표현하는 그의 내공은 무대에서뿐 아니라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한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 뿌리를 둔 그의 활약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월남스키부대>에 출연 중인 서현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Q <월남스키부대>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사랑별곡>을 할 때 제작사 NEW에서 전화가 왔다. 연극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같이 첫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 한참 바쁠 때여서 일단 대본을 보겠다고 했는데, 처음 대본을 봤을 때는 좀 실망스러웠다. 극이 좀 가볍게 느껴졌거든. 그래서 거절을 하려는데 NEW에서 부탁을 했는지 송영창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더라. 좋은 팀이니 인연을 한번 가져보라고. 그래서 하기로 결정을 하고 연습 초반에 연출한테 얘기를 했다. 지금 이 작품은 개그콘서트와 연극의 경계에 있다, 까딱하면 개그콘서트가 되고 우리가 잘 하면 좋은 연극이 될 것 같다고. 그랬더니 연출이 공감한다고, 자기도 일부러 웃기려고 하는 건 하지 않겠다고 해서 연습을 시작했지. 웃기려는 의도가 너무 드러나는 것들은 줄이면서 연습을 했는데, 여전히 웃기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웃기려는 의도를 들키지 않고 태연스레 할 수 있는 것들이고, 나중에 감동적인 부분이 좀 더 잘 드러날 수 있게 연습을 했다.

Q 연습하면서 배우들이 직접 만든 애드립도 많다고. 어떤 게 있나.
공연을 시작하고 나니까 어느 게 대본이고 어느 게 애드립인지 기억이 안 난다. 연습 때 만들어진 애드립을 대본화해서 공연하기 때문에 아마 관객들도 뭐가 애드립인지 잘 모르실 것 같다. 예를 들면 도둑이 와서 ‘김일병이 누구에요?’ 하면 ‘김일병 몰라?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려면 그 집 사정을 알고 들어왔어야지’하는 부분이라든가, 김노인의 캐릭터를 살려주는 애드립이 많다.

Q 다른 공연보다 객석에 중장년층 관객이 많더라. 그저께(19일)는 앞줄에서 전화를 받는 사람도 있던데(웃음).

젊은 관객들도 많이 보는데, 그날 유독 그랬다(웃음). 중장년층 관객이 오면 아무래도 그분들이 이런 문화를 많이 접해보지 않았다는 게 느껴진다. 예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접해보질 않았으니 본인들이 하는 행동이 어떤 행동인지 모르고 그냥 전화 받고 그러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선 좀 안쓰럽기도 하다. 이 작품이 아주 심각한 분위기라면 방해가 되겠지만, 초반에 관객들에게 말도 걸고 웃는 공연이라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중년 관객들은 역시 자식이나 부모님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에 대해서 감정이입을 많이 한다. 옛날 생각도 하는 것 같고. 그래서 특히 끝 부분에서 집중을 많이 하시더라. 많이 울기도 하고.

옛날 어른들은 연극이 어렵다고만 생각해서 잘 보러 가지 않는데, 지금은 연극이 많이 다양해졌다. 안 좋게 생각하면 너무 연극답지 않은 공연도 생겨났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고집스럽게 자기들끼리만 예술하는 것 같은 공연도 있고. 어느 게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관객들이 재미있게 보고 그 안에서 어떤 느낌이나 감동을 받는다면 그게 좋은 연극인 것 같다. 일단은 관객에게 쉽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 같다.

Q 지금 연습 중인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는 어떤 작품인가.
제목에 나온 이름은 체홉을 좋아하는 주인공의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바냐와 소냐, 마샤 세 남매와 마샤의 어린 남자친구 스파이크가 주인공인데, 나이가 60이 다 되도록 집에서만 살아온 바냐와 소냐가 유명한 영화배우였던 마샤를 다시 만나면서 벌어지는 코메디다. 특히 체홉을 아는 독자에게는 너무나 재미있는 작품이다. 중간중간 체홉의 작품에 나오는 상황이 조금씩 들어가 있거든. 약간 고급스러운 코메디라고 할까, 내가 연습하면서 말하긴 그렇지만(웃음) 괜찮은 작품 같다.


Q 코믹한 역할을 많이 맡아왔는데, 처음 연극을 시작할 때는 정극을 할 줄 알았다고 들었다.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중학교 때 어느 대학에서 <왕자와 거지> 공연을 봤다. 공연을 보는 게 처음이었는데, TV도 아니고 무대에서 사람들이 연기를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막연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가끔씩 상상만 했지, 실제로 할 생각은 못했다. 연기자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 해야지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다 대학에 가고 군대를 다녀오고 회사에 들어갔는데, 직장생활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이 돈 벌려고 산다는 게 너무 허무하고 억울하고, 그렇지 않나. 물론 돈을 벌어야 생활이 되지만, 돈만 벌려고 산다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허무함을 없애보려고 산악회 회장을 맡아서 주말마다 산에 가고 동굴탐사도 하고 래프팅도 해봤는데 뭔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건 뭐지? 하는데 연극이 생각난 거다. 한번도 안 해봤으면서 뒤늦게. 그래서 그걸 확인해보려고 토요일마다 퇴근하면 국립극장 문화학교에 가서 연극수업을 들었다. 그걸 수료하고 나서 사표를 냈지(웃음).

국립극장 문화학교에 다닐 때 연기지도를 했던 분이 극단 작은신화의 최용훈 대표였는데, 사표를 내고 그 분을 찾아가서 극단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운 좋게 극단에 들어가자마자 역할을 맡았고, 그렇게 계속 공연을 하게 됐다. 나중엔 외부공연도 하고, 방송국 쪽에서 연락이 와서 드라마도 하게 되고.

Q 연극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의 반대는 없었나.
아버지가 집을 나가라고 하셨다(웃음). 남들의 시선은 크게 신경 안 쓰는데, 어쨌든 내가 선택했으니까 어떤 일이 와도 후회해선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좋았던 건, 대학로에 와보니 내 또래의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데도 초조해하는데 난 아니었다는 거다. 난 이미 직장을 다니다 왔고, 이미 거지가 되든 뭐가 되든 연극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이걸로 큰 돈을 벌 생각이 없으니 마음은 편했다. 근데 이십 대 초반에 연극을 시작한 친구들은 뭔가를 빨리 이뤄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는지 다들 불안해하더라.

Q 뮤지컬은 어떻게 하게 됐나.
처음 했던 게 <판타스틱스>였다. 그 때 내 노래는 한 곡도 없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웃고 재미있게 봐서 뮤지컬을 하는 분들이 나를 많이 기억해 줬고, 이후에도 몇 번 뮤지컬을 하게 됐다. <그날들>도 장유정 연출과 장소영 음악감독, 기획팀에서 서현철 배우와 하고 싶다고 해서 불러준 거다. 처음엔 노래가 없다고 해서 했는데, 나중에 노래가 생겼다. 음악감독이 노래 선생까지 붙여주면서 ‘노래도 연기로 하시라’고 하는데 말이 쉽지 그게 되나(웃음). 그래도 ‘서른 즈음에’는 앞에 대사를 좀 하다가 노래를 부르는데 ‘부치지 않은 편지’는 2막 처음부터 노래가 탁 나온다. 연습 중반에 음악감독이 오더니 ‘선배님 이런 식으로 하면 저랑 같이 산에 올라가서 뛰어내려야 돼요’ 하더라(웃음).

그렇게 연습하다 공연에 올라갔는데 (음악감독이) 많이 늘었다고 너무 좋아했다. 덕분에 노래를 배우게 됐지. 공연하면서 그렇게 긴장해본 적은 처음이다. 절박하니까 자다가도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고, 무대 뒤에 서 있는데 진짜로 손바닥에서 땀이 나고 침이 마르더라. 지금은 다행히 산에서 음악감독이랑 안 뛰어내려도 되는 정도다(웃음). 노래를 잘 하는 건 아니고, 못하는 게 많이 티 나지는 않는 정도가 됐지.


Q 미니홈피와 트위터의 자기소개란에 “초심 평심 동심”이라고 쓰여 있던데, 무슨 의미인가.
그 문구는 오래 전에 만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해보니 일단 중요한 게 초심이겠구나 싶었다. 일을 하다 보면 사심도 생기고 욕심도 생기지 않나. 처음 가졌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초심을 갖자, 해서 초심을 적었고, 또 일을 하다 보면 화나는 일도 있고 감정기복이 생기니까 평심을 갖자고 쓴 거다. 마지막으로는 동심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먹으면 애가 된다고 하지 않나.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애처럼 자주 화 내고 투정부리게 되는데,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아이 같은 동심을 갖고 싶었다. 살아보니 다 부질없고 헛되다는 것을 안다면, 뭘 봐도 선입관 없이 사물을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동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엔 남을 깎아 내리지 않고 작은 것에도 기뻐할 수 있는 그런 동심을 갖고 싶다. 초심과 평심은 살면서 훈련하는 것이고, 그 훈련이 잘 되면 나중엔 동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 문구를 써놓고 틈틈이 보고 있다.

Q 아빠로서의 모습도 궁금하다.
나는 아이와 많이 놀아주는 아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많이 놀아준다. 처음엔 그게 아이들한테 좋다고 해서 무작정 놀아줬는데, 하다 보니 그게 왜 좋은지 알겠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더라. 놀면서 아이의 생각도 알게 되고. 아이들은 정말 스펀지 같아서, 놀이를 하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이 아이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신데렐라 놀이’와 ‘검정고무신’ 인데, 만화 <검정고무신>에 나오는 캐릭터를 종이에 그린 다음에 오려서 그걸로 인형극을 한다. 내가 1인 다역을 맡는데, 캐릭터의 입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거다. 그러면 나중에 아이 혼자 인형을 데리고 놀 때 아빠가 했던 얘기를 똑같이 한다. ‘이거 먹자, 맛 없어도 먹어야 건강해지는 거야’ 하고.

놀아주는 게 좀 피곤하기도 하다. 신데렐라 놀이를 할 때는 아이가 걸어가다가 신발이 벗겨지는 척을 하면서 ‘앗 유리구두가 벗겨진 줄도 모르고!’ 하면 난 그걸 찾으러 다녀야 된다. 누웠다 일어났다 동물원도 가고 차 타고 운전도 해야 되고 온 방을 돌아다녀야 하니까, 아이랑 한 두 시간 놀아주는 게 진짜 2회 공연 하는 것보다 힘들다(웃음). 요즘엔 내가 오전에 나와서 저녁에 늦게 들어가니까 아침 7시만 되면 아이가 와서 깨운다. 그럼 일어나자마자 신데렐라 놀이를 하는 거다. 자기도 미안한지 ‘개미만큼만 놀자’고 하는데, 많이 못 놀아주니까 좀 안쓰럽다.


Q 2003년에 <채플린 지팡이를 잃어버리다>를 직접 쓰고 연출도 했다. 대본을 찾아서 봤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그 전에 썼던 건데 공연을 그 때 처음 했던 것 같다. 극단생활을 하면서 메모해놨던 것들, 사람들을 관찰하며 모아둔 것들을 극화해봐야겠다 싶어서 썼다. 처음 나오는 임산부 에피소드는 아는 분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썼고, 지하철 에피소드는 지하철에서 봤던 한 청년을 생각하면서 썼다. 실상은 정말 고달픈 삶인데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냥 웃기는 일상의 풍경들이 있지 않나. 막간극에 나오는 계란 먹는 할아버지는 내가 직접 연기했는데, 그것도 예전에 지하철에서 봤던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쓴 거다. 어느 할아버지가 물렁물렁한 홍시를 먹는데 물이 뚝뚝 떨어지니까 앞에 쓰레기통을 하나 놓고 껍질을 벗기더라. 근데 알맹이만 쏙 그리로 떨어지는 거다(웃음). 그걸 주워먹을 수는 없으니까 떨어진 홍시를 쳐다보면서 껍데기만 핥아먹는 모습을 보고 썼다.

Q 사람들을 관찰할 때 어떤 걸 보나.
인상 쓰는 사람도 있고 멍하니 있는 사람도 있고 히죽히죽 웃는 사람도 있고, 그러면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더라. 얼굴 표정도 다 다르고, 자다가 손을 움찔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무슨 꿈을 꿨는지 무슨 일인지 괜히 이런저런 생각도 해보고, 가방엔 뭐가 들었을지 상상도 해본다. 다들 사연이 있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를 보게 되더라. 그냥 쓱 지나가면 모르는데, 자세히 보면 특이한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도 있고 습관이나 표정, 행동 같은 것들이 다 다르다.

Q 연기할 때 활용하기도 하겠다.
활용할 때도 있다. <사랑별곡>에서 이순재 선생님 친구 역할을 할 때도 그랬다. 왜 노인들이 얘기를 하다가 괜히 무릎을 툭툭 치는 분들이 있지 않나. 나중에 노인 역할을 하면 써먹으려고 했던 거다.

Q 또 다른 작품도 쓸 계획인가.
글은 계속 쓰고 싶고 또 써왔다. 틈틈이 메모는 하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쓰겠다는 건 좀 건방진 생각 같더라. 나중에 시간이 되면 공연을 접고 한 달이나 두세 달 고민하면서 써야 할 것 같다. 그 동안 메모해둔 건 있는데, <채플린 지팡이를 잃어버리다>처럼 재미있는 코드도 있고 일상적인 이야기도 있다. 예전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단편들이 좋아서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단편들도 다 찾아서 봤는데, 그 중에 되게 코믹한 단편이 하나 있었다. 시골집에 사는 이, 벼룩, 빈대 등이 주인할아버지가 벗어놓은 양말 밑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인간들이 다급한 상황에서 보이는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모습이 다 함축돼 있다. 그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글을 쓰다가 멈춘 상태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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