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관객이 원하는 배우가 되겠다” <마리 앙투아네트> 이훈진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의 이훈진은 분명 새로운 발견이다. 그간 <맨 오브 라만차>의 산초를 비롯해 <스팸어랏>의 베데베르, <알라딘>의 지니 등 코믹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 연기해온 그는 이번 무대에서 왕이지만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혁명에 휩쓸려 가족과 목숨을 모두 빼앗기는 루이 16세를 연기한다. 무기력한 몸짓으로 “난 왜 나다운 삶을 살 수 없나”라 노래하는 이훈진의 모습에서 그가 그간 연기해온 코믹한 캐릭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짊어진 한 남자의 참담하고 황망한 심경이 느껴질 뿐이다. 그 자신은 “아쉬운 점이 많다.”고 토로하지만, 올해 첫 한국무대에 올라 순항중인 <마리 앙투아네트>호의 우수 항해사를 꼽자면 이훈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활약의 밑바탕에는 “어디서든 관객이 원하는 배우가 되겠다.”는 확고한 배우관이 깔려 있었다.

Q <마리 앙투아네트>는 유독 연습기간이 힘들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커튼콜 때 우는 배우도 많더라.
다른 작품에 비해 힘들었던 것이,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에 원작자 분들이 와서 보기로 했었다. 그 안에 공연을 다 만들어서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거의 매일 텐투텐으로 연습을 한 거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만들어놨는데 원작자 분들이 전체 작업을 뒤집어서, 다들 ‘멘붕’이 왔다(웃음). 다시 만들어야 하니까 너무 힘들었지. 우는 배우도 많았다.

Q 그렇게 힘들었는데, 첫 공연을 끝내고 나니 기분이 어땠나.
벅찬 감동을 느끼기보다는 그냥 멍했다. 앙상블들은 거의 다 울었는데, 아마 다들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연습 안 해도 되는구나. 공연에만 집중하면 되는구나’하는 기쁨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웃음). 그리고 내 경우엔 그냥 멍했다. 사실 루이가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인물과 좀 달라져 있었거든. 나는 좀 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마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을 다 해주면서 ‘허허허’ 웃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 당시 사람들이 루이를 ‘왕관을 쓴 산초’라고 불렀다고 하더라. 그 느낌을 살리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착한 사람으로 비춰지면 마리가 나쁜 사람이 되니까, 순진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제지가 들어왔다. 그게 내 입장에서는 좀 아쉬웠다. 그리고 원래는 루이의 캐릭터를 좀 더 정확히 보여줄 수 있는 노래들이 더 많이 있었는데, 시간사정상 그 곡이 잘렸다. 제한된 시간 내에서 루이를 표현하자니 힘들더라(웃음).

Q 쉽지 않겠다. 그래도 그 안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루이의 모습은 무엇인가.
내가 연습하면서 만나게 된 루이는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다. 그가 단두대를 만든 이유도 사형수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였고, 여자들이 성으로 쳐들어오면 총을 쏘지 못하게 했을 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만큼 어리석은 사람이기도 하다. 나중에 잡히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마차에 와인이며 음식, 옷 같은 것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실어서다. 그래서 말이 빨리 달리질 못한 거다. 잡히면 설마 죽을까? 내가 국민을 사랑하면 국민도 나를 사랑해 주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어리석다기보다 순진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Q 마리에 대한 감정은.
루이가 바라보는 마리는 여신 같은 존재다. 그녀가 누굴 사랑하든 내 아내이기만 하면 돼, 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람인 거다. 또 안쓰러운 마음도 있다. 고증된 바에 의하면 마리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 7년간 몸에 이상이 있어서 누구와도 성관계를 갖지 못했다고 했다. 그걸 치료해야겠다는 생각도 못할 만큼 난관에 처해 있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는다. 그래서 그 이후에 아이도 갖게 된 거다. 7년간 아이도 낳을 수 없었던 왕비의 심정을 우리는 다 상상할 수 없지 않나. 그 당시 마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몸을 치장해서 자신이 아직 건재한 여성이라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것밖에 없었던 거다. 루이는 그런 상황을 다 알고 있었으니 그녀를 더 잘 이해했던 거다.


Q 김소현 배우가 마리에 대해 죽기 직전에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고 했다. 루이의 경우는 어떨까.
그 전에는 백성 위주의 왕이었다면, 마지막엔 가족 위주의 왕이 되고 싶어한다. 그는 죽기 전 가족들이 처한 상황을 정말 죄스럽게 생각하고, 내가 내 가족도 못 지키면서 무슨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건 어마어마한 심경의 변화인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난 왕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아니다, 대장장이면 족하다, 라고 하지 않나.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백성을 위하고자 했던 사람이 마지막엔 가족을 위한 남자가 되려고 했던 거다.

Q 원작자인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가 모두 이훈진 배우가 표현하는 루이 16세에 대해 큰 만족감을 표했다. 특히 노래를 아리아처럼 부르면 안 되고 균형을 잘 맞춰야 하는데 굉장히 잘하고 있다고.
그 분들은 좋아하는데 사실 난 힘들다(웃음). 아리아로 안 부르면 가성으로 속삭일 수밖에 없는데, 그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답답하거든. 지를 수도 없고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음역대도 아니니까. 남이 봤을 땐 ‘왜 그걸 그렇게 불러?’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은 아리아를 조금 섞었다. 마음대로 편하게 지르라고 하면 지를 수 있는데 아마 이번 생애에선 할 수 없을 것 같다(웃음).

Q 김소현과 옥주현, 두 마리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두 배우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가.
소현 누나는 자신이 진짜 엄마라서 아들에 대한 애틋함을 더 잘 표현한다기보다, 마리를 표현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한다. 그에 비해 주현이는 배우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좀 더 가진 것 같다. 노력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노력하는 족족 다 드러난다는 얘기다. 소현 누나는 엄청난 노력파고. 마그리드 아르노의 경우도 똑같다. 윤공주는 시끄러울 정도로 노래를 계속 부른다. 그만큼 연습을 많이 한다. 그에 비해 좀 더 빨리 재능이 드러나는 배우가 차지연이다.

아무튼 루이 입장에서 바라보는 마리는 둘 다 너무나 예쁘고 매력적이다. 소현 누나는 아이 엄마인데도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모를 만큼 너무 예쁘고 귀엽고, 주현이는 원체 본인이 갔고 있는 무게감이 있는데 그게 한번씩 땅, 하고 깨지면 그 모습이 또 참 예쁘다.


Q 원래 신학을 공부하다가 배우가 됐다고. 특이한 경우다.
모태신앙이어서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더라. 어릴 때는 재미있게 공부한 것 같은데, 커서 하려니 복잡한 게 많더라. 내 길이 아니었던 거지(웃음). 그래서 둘째 형을 따라서 서울예대 연극과 시험을 봤다. 둘째 형이 먼저 연기를 하고 있었거든. 지금도 남매가 다 이쪽에 있다. 둘째 형은 한예종에서 연출을 배워서 영화도 하고, 큰 형과 공동대표 형식으로 극단을 운영하고 있다. 여동생도 배우로 활동하고 있고.

Q 연기를 해보니 내 길이다 싶었나.
그랬다. 즐거웠다. 그 전에도 열 아홉 살 무렵부터 교회에서 직접 공연을 만들어 올려봤는데 재미있더라. 둘째 형이 하는 극단에서 일도 좀 해봤고. 그 기억을 갖고 있다가 연극과 시험을 보고 운 좋게 합격을 했는데,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워보니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러다가 무용 하시는 분들을 알게 돼서 한국무용도 3년간 배웠다. 합숙하다시피 하면서 공연도 하고.

Q 그 경험도 연기하는데 도움이 됐겠다.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무용에는 몸으로 표현하는 것 외에도 무언가가 있다. 어머니가 판소리를 하셔서 판소리를 많이 듣다 보니 한국무용을 빠르게 흡수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무용이 갖고 있는 한 서린 느낌이랄까, 그런 표정이나 몸짓을 예민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한번은 <서편제>를 보다가 이자람 배우의 호흡 하나에 미친 듯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호흡 한 번 빠지는 소리일 뿐이지만, 판소리 하는 사람들은 그 호흡 한 번에 담긴 의미를 알거든. 한국무용을 배우지 않았다면 내 연기의 30%는 늦어졌을 것 같다.

Q 공연을 직접 만드는 것에는 지금도 관심이 있나.
둘째 형이 글을 굉장히 잘 쓰는데, 형의 영향을 받아서 써놓은 작품들이 있긴 있다. 지금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연습을 많이 해야 해서 정말 마음 맞는 배우들이 모였을 때 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계획 중인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내가 노래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팀의 이창완 배우한테 소리를 배워서 대학 성악과에 시험을 볼까 생각 중이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웃음).


Q 이훈진, 하면 <맨 오브 라만차>를 빼놓을 수 없다.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작품이다 싶을 정도니까. 난 굉장히 낙천적이어서 웬만하면 다 잊어버리는 성격인데, 2007년 <하루>를 공연했을 때는 좀 힘들었다. 쉬면서 군대도 다녀오고 영화 촬영을 하다가 오랜만에 출연하게 된 공연인데, 갑자기 그 전까지 했던 걸 다 잊고 까막눈이 된 느낌이었다. 오만석 형부터 시작해서 엄기준, 김소현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잔뜩 있다 보니 기가 눌려서 지금 돌아보면 참 바보같다 싶을 정도로 못했다. 그러다가 <맨 오브 라만차>를 하면서부터 다시 페이스를 찾기 시작했지.

당시 김재만 형님의 추천으로 <맨 오브 라만차> 오디션을 보게 됐는데, 보통 오디션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고 가서 딱 ‘좋으니까’ 앞 부분만 불렀다. 김문정 음악감독님이 ‘이게 다에요?’했을 정도였다(웃음). 그런데 안무 오디션을 할 때 회사 측에 내가 많이 각인된 것 같다. 데이비드 스완에게 가서 막 장난을 쳤거든. 다른 지원자들은 경직돼 있는데 내가 놀러 간 사람처럼 ‘커몬 데이비드~’하면서 즐겁게 춤을 췄더니 다들 빵 터지더라. 당시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찍고 있었는데, 김재만 형님의 추천으로 <맨 오브 라만차> 오디션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계속 영화만 하고 있었을 것 같다.

Q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
일단은 관객이 원하는 배우가 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관객이 원하는 배우가 어떤 것인지 묻는다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에 한계가 없는 배우가 아닐까. 재미있는 것 밖에 못하거나 멋있는 것 밖에 못 하는 게 아니라, 어디에서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정성화 선배의 경우 굉장히 진지한 것부터 코믹한 것까지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정말 넓지 않나. 그걸 못하는 배우들도 분명 있긴 하거든. 내가 못하는 것을 노력으로 계속 키워서 모든 관객이 ‘저 배우는 어디에 갔다 놔도 다 소화할 수 있어’하는 사람이 되는 게 최종 목표다. 자만하는 순간 밑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늘 겸손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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