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주 "<프로즌>은 앞으로도 우리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해도 된다는 힘을 주었다"

소아성애자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한 딸, 수십 년의 세월을 죄책감에 허덕이는 엄마, 연쇄살인범의 뇌를 연구하며 또 다른 부정으로 죄의식에 사로잡힌 정신과 의사, 그리고 아동학대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이한 한 남자. 등장 인물의 상태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의 <프로즌>은, 그 숨이 막힐 요소들만이 공개된 개막 전에 전석 매진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개막 후 배우들의 열연이 더해진 밀도 높은 작품을 통해 '해프닝'이 아닌 '증명'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누구보다 <썸걸즈><14인 체홉><은밀한 기쁨> 등을 선보여온 극단 맨씨어터에게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흥행 코드'가 아닌 자신들의 의지를 작품 제작의 1순위로 두는 용기를 내고서도, 한편으로 "이런 용기는 마지막이라 되뇌였다"는 <프로즌>의 낸시, 극단의 대표 우현주는 지금 "더 큰 힘을 얻었다"며 웃고 또 준비하는 모습이다. 쫓아가는 자는 부표를 얻지 못할 수 있지만, 나아가는 자는 누구보다 새로운 부표를 발견할 수 있음에 맨씨어터는 확신을 더한 듯하다. 우현주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프로즌>이 극장을 바꿔 연장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Q. 개막 전 전 회차 매진을 기록했다. 대단히 드문 일일 뿐더러 연극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다.
공연 전에 꿈을 자주 꾸는데 이번엔 꿈에 범고래가 나와서 '좀 잘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매진이 되었다고 하니 깜짝 놀랐다. 이제 관객들도 이 안에 발을 들여 놓으셨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망이라는 반응이 나오면 어떻게 하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더 열심히 하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열심히 안 하는 건 아니겠지만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린 게 사실이다. 좋은 건 당일 딱 하루였다. (웃음)

Q. 공연을 보기도 전에 관객들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흥행이라는 건 정말 알 수 없다. <프로즌>은 '내가 하고 싶은, 우리 배우들 돋보이겠다고 하는 마지막 작품이다'라는 각오로, 흥행이 안 될게 뻔하다는 각오로 올렸다. 솔직히 왜 매진된 건지 잘 모르겠다.

제일 큰 덕은 <엠 버터플라이>가 끝나자마자 <프로즌>이 시작돼서 김광보 연출님, 이석준, 정수영 배우 팬들이 오셨기 때문일 것 같다. 근데 박호산 배우의 회차도 다 팔린 걸 보면, 뭔가 이런 작품에 대한 갈증, 이 소재에 대한 관심이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Q. 극장 객석 규모(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약 100석)에 대해 아쉬움이 남겠다.
더 컸으면 전석 매진이 안 됐을 수도 있다. (웃음) 극장 크기에 비해서 객석 수가 적긴 하다. 티켓 오픈을 해 놓고 관객들이 많으면 보조석을 깔까, 이야기도 했었는데 1열 앞에 보조석을 까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원래 없던 일요일 저녁 공연을 하고 보조석을 안 까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Q. <프로즌> 뿐 아니라 극단 공연 작품 선택을 직접 하는 것으로 안다.
작품에 인물이 몇 명 나오는지, 소재는 뭔지, 작가는 누구인지 보고 아마존에서 (희곡) 3, 40권을 쫙 주문한다. 일단 등장인물이 적으면 제외. (웃음) 우리 배우들이 다 나와야 하니까. 처음 열 페이지만 읽어도 이 작품이 좋은지 아닌지 감이 온다. <프로즌>은 첫 페이지를 읽었을 때부터 마음이 확 끌려서 앉은 자리에서 쭉 읽었고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게 3, 4년 전이다.


Q. <프로즌>의 어떤 점이 마음을 사로잡았나?
작가(브리오니 래버리)가 희곡을 많이 쓴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본인이 배우라, 배우가 연기하기에 어떤 의식이나 감정의 흐름을 잘 탈 수 있게끔 쓰여져 있었다. 그 외에 구조적으로 '쉽게 넘어갔구나' 하는 부분들도 있다. 예를 들어 감옥에서 랄프가 벨트로 자살을 하는데 대본상엔 벨트라고 나왔지만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티셔츠를 찢어서 하네, 비닐 봉지를 묶어서 하네 등.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게 없어서 그냥 작가 핑계를 대고 그대로 했다. (웃음) 그런 부분들이 있긴 한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역시 배우의 연기를 잘 끌어내도록 작품을 썼다는 것이고 그건 외국 작가에게도 잘 없는 미덕이다.

또 영미 희곡들을 보면 정치적인 문제, 동성애, 인종차별, 이런 내용들이 꼭 들어가 있다. 미국의 경우는 9.11 사건도 자주 등장하고. 그런데 이것들이 우리에겐 쉽게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프로즌>은 그 누구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모성'이 기장 큰 토대이고 또 사이코패스, 소아성애 등에 대한 것도 이제는 우리에게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부분이다.

Q. 보고 있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 정도로 배우들의 에너지 소모가 상당할 것 같다.
연습 초반엔 연기로 다가가지 못하고 내가 낸시로 훅 들어갔다. 우리 아이들이 실제로 낸시 아이들 또래다. 그러니 연기를 할 수 없고 펑펑 울고. 연습 시작 후 열흘 쯤 되니까 뭔가 꾹 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파서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았다. 그런데 극장에 들어오니 이건 연극이고 난 배우로 관객 앞에 서는 거라는 게 정리가 되어서 오히려 괜찮다. '연극이다'라는 안전장치가 생긴 거다. 그거 아니면 할 수가 없다.

(이)석준이는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된다고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했었다. 공연장 들어올 때부터 괜히 눈물이 나서 미치겠다고도 했고. (박)호산이는 "난 불가능이란 없는 남자야~"(웃음) 이런 스타일인데 그런 천하의 박호산도 하루에 두 번 공연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더라. 너무 괴롭고 힘들다고.

Q. 랄프 역은 박호산, 이석준 더블 캐스트다.
두 배우의 랄프가 굉장히 다르다. 캐릭터도 그렇고 여배우들과 주고 받는 것도 다르다. 석준이는 극이 순식간에 하나로 뭉쳐져서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진짜 감정이 매말라 있는 사이코패스 그 자체.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 그런 랄프다.

박호산이라는 배우와 작품도 많이 했고 실제로도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데 어느 순간 눈이 마주치면 얼굴을 쳐다 보고 있을 수 없는 괴로움이 있다. 원래 이 작품에서 랄프와 아이 컨택이 계속 있는데 호산이와 할 때는 도저히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다. 아이 컨택이 되는 순간 내가 너무 낸시로 변하니까. 정말 두 랄프가 느낌이 전혀 달라서 시간이 된다면 각각 두 번 이 작품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연극 <프로즌> 공연장면

Q. 맨 마지막 장면에서 낸시의 행동을 두고 용서인가, 아닌가 등의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끼리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연출님의 노선은 '복수지만 작정한 복수는 아니다'였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복잡한 게, 용서를 위해서 범인을 만나러 갔다 해도 막상 대면하는 순간 증오가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누르고, 그 순간 범인에게 강한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복잡한 거다. 난 내 아이를 죽인 범인은 용서 못할 것 같다. 용서의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은 평생 끊임없이 바뀔 거고. 낸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용서다, 아니다' 조차 잊어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서야 해방이 되는 거지.

낸시가 아그네샤에게 하는 말과 행동도, '진실을 대면하자, 거기서부터 시작하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은 용서를 얘기한다고 했는데 우린 '용서에 대한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용서를 하는 이야기'라고는 안 했다. (웃음) 용서, 위로, 치유, 이런 것들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Q. 극단 맨씨어터가 올해로 창단 8년이다.
가장 큰 수확은 (극단) 식구들 15명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점이다. 또 이석준, 박호산 등은 물론 연극계에서 유명한 배우들이지만 연예인 캐스팅을 하지 않고 우리 극단 식구들끼리 했는데 이렇게 잘 되었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나름대로 이 안에 있는 걸 기뻐하고 우리끼리 뭉쳐 하면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운도 있다. 특히 <프로즌>은 '관객들이 좋아할지 안 할지 모르는, 자신 없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앞으로도 우리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동력이 됐다.

Q. 극단을 왜 만들기로 했는가.
배우는 아무리 어떤 작품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선택 받지 못하면 소용 없지 않나. (8년 전) 당시 우리 또래 여배우들은 이미 30대 중후반이었는데 할 작품이나 역할이 많지 않았고 또 결혼과 육아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할 순간이 오면 재능 있는 사람들도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래서 우리가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어려우니까. 그 점이 굉장히 컸다. 내가 '왜 이렇게 밖에 안될까, 왜 날 캐스팅해주지 않을까', 이런 고통 속에 있을 때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옆에 있고 같이 이런 작품 해보자, 이 대본 읽어보자, 하던 게 큰 힘이 되어 지금까지 온 것 같다. 금전적인 손해도 물론 많이 봤지만 그건 나만 그런 건 아니니까. (웃음) 다 같이 꿈꿀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Q. 연출작업도 했다.
대학에서 실험극을 전공했는데 내가 속했던 그룹은 배우이지만 연출도 하고 작품도 쓰는, 그런 아티스트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훈련도 그런 식으로 받았다. 그게 자연스럽게 나에게 배어 있다. 그런데 극단을 안 했으면 연출을 안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앞으로 5년 정도는 조금 더 연기에만 집중하다 50살 쯤 되면 서서히 연출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Q. 이유는?
왜 대부분의 극단 대표가 연출을 하는지, 이제 (극단 창단한 지) 8년 째 되니까 알겠더라. 외부 연출가들은 대부분 다 일류이실 거고, 그러니 다른 작업들, 활동들로 바쁘시더라. 김광보 연출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애정을 쏟아주시지만 그래도 바쁘신데 어떻게 해. (웃음) 그래서 결국 이 안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가 책임을 져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Q. 뉴욕대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해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종종 한국 공연계 환경 차이 때문에 괴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더라.
난 그런 거 없었다. 브로드웨이에 진출했었다면 모를까,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 몇 번 서 본 거라. 다 마찬가지다. 아무리 뉴욕대, 예일대를 나와도 투잡 뛰면서 소극장 공연한다. 브로드웨이 시스템은 물론 완전 다르겠지만 그건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차이지, 실 작업 과정은 그곳이나 여기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거기도 몇몇 작품만 잘 되고 스칼렛 요한슨 나오면 표 다 팔리는 건 마찬가지다.

다만 그곳에선, 연극 무대에 서 있는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그분들께 물질적이든 태도나 정신적인 것이든 적절한 대우를 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른 점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물론 관객층이 얇다는 것이겠지만, 대 선배님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분들이 우리의 미래고 또 현주소 아닌가. 그분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때 이 산업이 어떻게 발전하겠는가.

Q. '배우 우현주'로서의 활동도 무엇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겠다.
그간 배우로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나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다. 공주병일 것이다, 우아를 떨 것이다, 같은. (웃음) 초창기 배우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여기저기 불러 주시는 곳도 많았는데 결혼하고 주춤, 극단 만들고 나니까 주춤, 그런 주춤이 연속되다 보니 어떤 분은 날 캐스팅하려고 했는데 연기 그만 둔 걸로 알고 있었다고도 하시더라.

그래서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길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안티고네>(2013)도 오디션을 보고 나니 피디님이 작은 역도 할 수 있냐고 물으시더라. 한태숙 선생님과 작업하고 싶은데 안 불러주셔서 왔다고 했다. (웃음) <태양왕>(2014)은 뮤지컬을 하고 싶어서 보컬 트레이닝도 엄청 열심히 받고 연습했는데 노래가 없었다. (웃음) 극단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다. 작은 역이든 큰 역이든 하고 싶은 걸 위해 적극적으로 방법을 모색하고 또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극단 대표나 배우로서나 길이 없으면 길을 뚫고 안 불러주면 찾아가자는 마인드다. 다만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는 배우, 이거 하나는 철칙이다.

Q. 하고 싶은 게 많은 것 같다.
극작도 하고 싶고 연출도, 제작도 계속 하고 싶고, 다 연극과 관련된 거다. 오늘 아침에 남편이 이야기하길, 어떤 교수님이 가장 행복한 삶은 목적이 있는 삶이라고 했다며, 나보고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 요즘 정말 행복하다. 이제는 더 유명해지고 싶다든지 다른 욕심들이 다 사라져서 이 안에서 연극을 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기쁘다. 다만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었으면 하지만 (웃음) 자기 일을 하면서 행복한 사람 많지 않지 않나. 뮤지컬도 하고 싶다.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 극단에서도 할 거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드림컴퍼니 제공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