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이기는 연기는 없다” <잘자요, 엄마> 염혜란

“엄마, 나 오늘 죽으려고.” 연극 <잘자요, 엄마>는 중년의 여성 제씨가 엄마에게 자살을 예고하며 시작된다. 이후 90분 동안 이 연극은 삶의 희망을 모두 놓아버릴 수 밖에 없었던 한 여자의 인생과 그런 딸의 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된 엄마의 애달픈 심정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알고 보면 세상 여느 모녀와 다르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관객들로 하여금 무대에 깊이 몰입하게 만들고, 그 몰입을 더욱 높이는 것은 무대에 선 배우들의 열연이다.

염혜란은 이 연극에서 간질과 이혼, 아들과의 불화를 겪어온 제씨를 맡아 나문희·김용림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공연 전 조재현이 “괴물같은 후배”라고 소개한 바 있는 그녀는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2012) 이후 오랜만에 오른 무대에서 조재현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했다. 극이 흘러가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는 죽음을 결심한 자의 서늘한 결의와 피로, 엄마를 향한 짙은 정과 슬픔이 동시에 스쳐가고, 어느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경계 사이사이의 오묘한 표정은 보는 이의 시선을 조용히 사로잡는다. 그 흡입력은 화려한 역할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지난 시간에서 나온 것일까.

Q 오랜만의 연극 출연이다. 제작발표회 때 조재현 대표가 “괴물같은 후배”라고 칭찬하며 “이번엔 전작에 비해 강렬하지 않은 역할을 맡았다.”고 했는데.
대표님이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다(웃음). 예전에 했던 캐릭터들이 워낙 성격적으로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었는데, <잘자요, 엄마>의 제씨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쉽지 않냐는 얘기를 대표님이 하셨는데, 사실은 오히려 더 접근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래서 공연 사이사이 쉬는 기간에 자꾸 했던 공연을 되돌아보게 되고, ‘이렇게 했었어야 했는데’ ‘이게 맞는 걸까’하는 생각이 든다. 제씨라는 인물을 연기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Q 제씨가 엄마에게 자살을 예고하는 초반 장면부터가 일반적인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처음 연습하면서 제씨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했나.
나도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됐고, 공연을 하면서도 어떻게 이런 엄마를 두고 떠날 수 있을까, 꼭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차라리 말을 안 하고 가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제씨로서는 그게 그래도 가장 가슴이 덜 아픈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만약 제씨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었다면 엄마의 상처는 더 컸을 것이다. 유서를 남긴다 해도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나. 그건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인 거니까. 그래서 제씨는 엄마가 너무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혹은 자책하지 않도록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또 엄마의 이야기도 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말을 한 것 같다. 제씨로서는 엄마를 배려한 것이다. 배려라는 말조차 안 어울리긴 하지만.

Q 그동안 창작극을 주로 했는데, <잘자요, 엄마>가 번역극이라서 겪은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번역극처럼 안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안 그래도 권총이 나오고, 우리나라의 여느 모녀작품에서는 있을 수 없는 구조로 극이 시작되기 때문에 말로써까지 관객에게 거리감을 두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 이름이 제씨고, 단번에 죽을 수 있는 방법이 권총자살이라는 것 말고는 우리나라의 여느 모녀관계와 똑같다고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출님도 그렇게 생각해서 2008년 공연 때보다 대사를 구어체로 더 많이 바꾸셨고, 나도 그런 시도를 했다.

그런데 대사를 구어체로 고치려다 포기한 것들도 있다. 왜냐하면 제씨는 성격상 ‘엄마, 나 이건 싫어!’라고 감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씨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말하기 쉽지 않은 대사라도 내가 그걸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듣기로는 ‘누가 저렇게 말을 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씨는 깊은 고민 끝에 한 말이기 때문에 그냥 친구한테 하듯 가볍게 말하는 것보다 더 진지한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Q 이 작품을 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다고.
극중 제씨가 ‘나 어렸을 때는 정말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누군가였다. 볼이 통통하고 외로움도 모르고 병도 모르는 아이였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랬던 아이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많은 일들을 겪고 난 다음 변하게 된 거다. 그런 제씨를 보면서 나도 우리 엄마 생각이 나더라. 우리 엄마도 나에 대해 기대하고 예상했던 모습이 있었을 테고 아마도 내가 그 예상치에서 많이 벗어나 있을 텐데, 엄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고.

또 엄마가 한창 많이 아프신 적이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삶이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단계가 왔던 적이 있다. 당연히 늘 옆에 있을 것 같은 엄마, 모든 걸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엄마가 그렇게 되니까 충격적이었다. 그때 제씨가 그랬듯 처음으로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시기가 좋기만 했던 건 아니지만, 지나고 보니 의미 있는 고난이었던 것 같다. 더 늦어지기 전에, 더 나쁜 일들이 생기기 전에 그런 시간을 겪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더라. 제씨도 그 단계를 좀 더 일찍 지나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연극을 보시는 분들도 다 그런 생각을 하실 것 같다. 그런 단계를 밟으셨거나, 앞으로 밟으실지도 모르는 분들이 와서 미리 좀 느끼고 가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Q 예전 인터뷰를 보니 아이를 낳고 나면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연기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동시에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엄마가 되고 나서 무대로 돌아오니 어떤가.
처음 연습실에 왔을 땐 좀 무섭기도 했다. 여기는 일상에서와는 전혀 다른 호흡을 해야 하는 곳이니까.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는 ‘애가 왜 떼를 쓸까, 왜 내 뜻대로 안 될까’가 고민거리였는데, 여기에서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게 되는 거다. 반대로 애를 키우면서 ‘그게 뭐가 고민이야’했던 것들도 여기서는 큰 고민이고. 마치 선로를 바꿔 끼워야 하는 느낌이랄까. ‘아, 여기가 이런 곳이었지, 일상에서와는 좀 다른 호흡을 가져야 하는 곳이었지’ 하면서 긴장감이 바짝 생기더라.

오랜만의 연극이고 쉽지 않은 역할이라서 심리적으로는 힘들지만, 배우로서는 너무 좋은 기회고 행복한 경험이다. 예전엔 실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을 많이 맡았다. 그래서 처음에 <잘자요, 엄마>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반 농담으로 ‘제가 엄마는 아니죠?’라고 묻기도 했다(웃음). 그런데 오히려 아기를 낳고 처음 하는 작품에서 나와 나이가 똑같은, 그리고 예전과는 좀 다른 역할을 맡게 된 거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 정말 좋은 작품, 좋은 역할로 다시 시작하게 돼서 감사하다.

Q 임신을 하고 난 후 정말 해야 할 공연과 안 해도 될 공연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겼다는 말도 했는데. 그 기준은 어떤 것인가.
그동안은 나와 맞는, 염혜란이 잘 할 수 있는 작품을 계속 해왔던 것 같다. 보통 쇼핑을 가면 남들이 ‘이건 너한테 맞는 옷이야’ 하는 걸 고르지 않나.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그렇게 익숙한 옷을 입어왔다면, 아기를 낳고 나니까 ‘입어본 옷을 굳이 또 왜 사’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건 옷장에 많이 있으니까. 이제는 나랑 좀 안 어울리더라도 새로운 옷을 사보고 싶은 거다. 왜냐하면 이제 아기 때문에 전처럼 1년 내내 연극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상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엔 일 년 내내 옷을 살 수 있었다면, 이제는 1년에 세 번 밖에 옷을 못 사니까 ‘가만있어보자, 그럼 무슨 옷을 살까? 늘 입던 건 말고.’ 이렇게 바뀐 거다.

아기가 있어서 그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정말 급하면 입어본 옷이든 아니든 생각할 겨를이 없이 당장 입을 옷을 사야 하니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된 것 같고, 당장 연극이 아니어도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해질 수 있게 됐다.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는 일도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니까.


Q 2000년에 데뷔해 이제 16년차 배우다. 여배우들은 나이가 들수록 무대에 남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꾸준히 연기를 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처음 연우무대에 들어가 활동했을 때 틈새시장을 파고든 것 같다. 내 얼굴이 틈새시장이다(웃음). 당시 다른 여배우들이 다들 예쁘고 날씬했다. 말하자면 주인공감이었던 거지. 그러다 보니 엄마, 아줌마 같은 조연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 때 내가 신입단원으로 들어갔는데, 아줌마 역할을 하게 생겼으니 여러 기회가 빨리 주어졌다. 운이 좋았다. 만약 내가 예쁜 여배우였다면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결혼하고 나면 아가씨 역할도 하기 어렵고, 예쁜 아줌마 역할은 적고, 여자 캐릭터가 워낙 다양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나는 다행히 예쁜 여배우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나이 드는 것이 크게 고민이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한 건 아니지만 축복이었다(웃음). 그러다 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아이를 갖게 되어 쉴 수 있었고, 그 후에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된 거다.

Q 대학에서 국문학과를 전공했는데, 혹시 글을 쓰는데도 관심이 있었나.
글쓰기보다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국어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국문과를 갔고, 졸업 후에 선생님이 되려고 잠깐 공부를 했다. 근데 공부가 너무 하기 싫더라. 왜 이런 공부까지 해야 되지,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국어선생님과 연극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하다가 연극을 하기로 한 거다.

Q 나중에 연기를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도 있나.
사실 지금도 누구를 봐주고 있다.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근데 가르칠 때마다 이건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는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완성된 연기, 완성된 배우라는 건 없지 않나. 어떤 작품에 맞춰서 완성된 연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배우 자체가 완벽해질 수는 없다. 그런 불완전한 존재로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심적으로 힘들더라. 그리고 그 사람이 내 공연을 보러 왔다고 생각해 봐라. ‘당신 나한테 그렇게 가르치더니 전혀 아닌데?’할 수도 있고(웃음).

나도 내 연기를 객관적으로 모니터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너무 친한데다 같은 ‘선수’들이라 ‘저렇게 하는 게 원래 염혜란 스타일이야’하면서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 기획팀의 경우에도 공연 전체를 위해 해야 될 일이 있다 보니 그런 말은 아낀다. 그러다 보니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사람이 없는 거다. ‘여기선 그런 걸 보여주는 게 독이 돼요, 이럴 땐 사투리가 안 나와야 합니다’라고 나를 정확히 보고 말해줄 사람이 정말 필요하다. 외국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 메릴 스트립 같은 경우엔 영화를 하나 할 때 다섯 명의 액팅 코치가 연기를 봐준다고 하더라. 워낙 잘 하는 배우지만, 괜히 잘 한 게 아니었다(웃음).


Q 좋은 연기란 어떤 것일까.
10년, 16년 전과 바뀌지 않은 생각이 있다. 진심을 이기는 연기는 없다는 것이다. 신입단원이었을 때 이렇게 이야기해준 선배님이 있다. ‘앞으로 너희의 테크닉은 갈수록 늘 거야. 어떻게 하면 슬프게 보이는지, 어떻게 하면 고통스러워 보이는지에 대한 테크닉은 늘어날 거야. 그렇지만 진심은 놓치지 말아야 해’라고. 너무 소중한 가르침이었고, 그걸 따르려고 노력해왔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의 단점들이 보이면서 그걸 상쇄할 수 있는 테크닉을 추구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진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결국 진심이더라. 어떤 배우가 남이 써준 말이 아닌 자기의 말을 하고 있을 때, 진심을 품고 있을 때 나도 그런 배우들에게 감동을 받는다. 앞으로도 그걸 놓치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Q 앞으로 바라는 배우로서의 모습은.
나문희, 김용림 선생님을 보면서 깜짝 놀랐던 게 있다. 그렇게 오래 연기를 해오신 분들인데도 첫 공연 때 무대 위에서 긴장하시는 게 보이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이런 게 무대구나,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공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 오랫동안 서는 것이 때로는 지겹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무대를 지켜내는 일이 되게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리고 연극을 오래 하신 선생님들이 새삼 달리 보이더라.

연극을 하는 배우들이 마치 다른 매체에서 도태되어 하는 수 없이 남은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지 않나. 그런 것들이 속상할 때가 있다. 무대 연기만이 주는 깊이가 있고, 그게 좋아서 연극을 하는 것인데 역량이 안 되고 기회를 얻지 못해서 남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속상하다. 나도 앞으로 그런 배우는 안 되고 싶다. TV나 다른 매체에 갈 수 없어서 못 가는 게 아니라, 무대만이 주는 깊이가 있어서 여기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전처럼 활발하게는 못하겠지만, 연극을 할 때 좀 더 정성껏 하고 싶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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