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우맨> 정원조 "뭘 하든, 연극으로 살아야겠다"

세월이 빗겨간 얼굴이었다. "나이가 어디로 갔느냐."라는 말에 "이야기하다 보면 그래도 내 나이가 나온다."며 빙그레 웃는 모습 또한 여전했다. 짧게 막을 올린 두어 편의 연극이 더 있지만, 3년 간 한 달 못되게 공연한 작품이 <알리바이 연대기>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등 두 편에 지나지 않았기에, <필로우맨>에 정원조가 출연한다는 소식에 반가워하는 사람이 많다. 2009년 <멜로드라마>를 마지막으로 3년 간 무대 '위'를 떠나 있었지만 언제나 무대 '가까이'에 있었던 그는 이제 "뭘 하든 연극으로 살아야겠다."고 하니 앞으로 그를 만날 일은 좀 더 잦아질 것 같다.

아일랜드계 작가 마틴 맥도너가 쓴 <필로우맨>은 어둡고 잔인하지만 동시에 꿈 속을 거니는듯한 환상을 펼쳐내고, 그러면서 치열하게 싸우는 작품이다. 끔찍한 방법으로 자행된 아동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형사들과, 용의자가 되어 그들과 대면하면서도 자기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작가, 그리고 작가의 형. 이들이 가진 이야기, 주고 받는 대화, 그리고 작가의 작품으로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의 조합 등은 <필로우맨>을 남다른 작품으로 만들며 매 국내 공연에서도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어 왔다. 2년 만에 공연되는 올 <필로우맨>에서 작가 카투리안 역을 맡은 정원조를 통해서 이번 무대는 작품 속 '이야기'에 더욱 집중될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이야기인데, 소품들도 최대한 줄이면서 영상이나 다른 어떤 장치의 도움 없이 그 많은 이야기를 혼자서 다 해야 하니까. 그 이야기들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 걱정이 많습니다.(웃음)"

공연을 약 열흘 앞두고 하루의 연습 끝에 마주한 정원조는 여전히, 어쩌면 당연하게 작품의 기운 속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작품의 시작과 끝을 잡고 있고 그 안의 이야기들을 진행시키는 중심 화자인 카투리안은 대사 만으로, 그가 지은 이야기만으로 쉽게 보여지고 설명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가 인물을 보는 방식이, 특별하게 접근을 하는 편이 아닌 것 같아요. 모든 인물들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면서 이 사람이 무엇을 더 중요시하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죠. 카투리안은 자기가 하는 일, 자기가 가진 이야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아닐까요? 극단적인 순간이 왔을 때조차 이야기를 선택하니까요."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과거 공연과 같이, 이번에도 티켓 오픈과 함께 많은 좌석들이 이미 주인을 찾아갔다. "프리뷰 본 다음에 기대감 제로라는 말 들을까 봐 스트레스 받기도 해요. 그러면 정말 이 프로덕션에 내가 누를 끼지는 거잖아요. 너무 미안할 것 같"다는 그가 마음을 놓는 한 가지는 동료 배우들을 향한 믿음이었다.

"제가 이 작품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 친구들이 "니 프로필이 제일 후지다."(웃음) 그랬거든요. (윤)상화 선배님은 평범하지가 않아요. 어떤 아티스틱한 느낌이 있어요. 그리고 (김)수현이 형은 워낙 캐릭터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하나라도 뭔가 만나면 집요하게 풀릴 때까지 고민하는 스타일이고, (이)형훈이는 굉장히 핫해서 스케줄 꽉 차 있는 애고요. 그런 사람들과 같이 한다니까 내가 얻을 것도 더 많고 기분 좋죠. 연극은 서로 주고 받는 거잖아요. 다른 배우들이 잘 주고 있기 때문에 잘만 받으면 돼요. 제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야기답게 하는, 제 몫을 잘하는 것만 남았어요."

이러저러한 개인적인 이유로 잠시 무대 위를 떠나 있었지만 무대 뒤에서 공연을 만드는 한 사람으로 지내며 위로도 받고 연극에 대한 생각도 더욱 확고해졌다. 그래서 <필로우맨>은 작품 자체를 잘 해야 하는 과제이면서도, 다시금 대학로 활동에 불을 지피기 위한 시작점으로도 그에게 중요한 의미의 작품이 될 것이다.

"소도시가 주는 여유와 마음의 위안이 정말 컸어요. 그곳에서 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있기에는 뭔가 내가 없구나, 나를 좀 더 채워야겠다, 그래서 서울로 와서 대학원에 들어간 거였거든요. 연극을 전공했다고 하면, 뭔가 그쪽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학교도 정말 열심히 다니고 논문도 열심히 썼고요."

'연극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니 내가 아는 게 너무 없더라'는 자기 고백. 대기업 사원에서 꿈의 소리를 따라 서른 한 살의 나이에 배우 생활을 시작했던 용기 있는 자, 그렇게 올해 데뷔 10년을 맞은 정원조의 이야기는 꾸밈도, 과장도 없이 너무나 담담해 듣는 이를 조금은 당황시킬 정도였다.


"바른 생활 사나이, 맞아요. 지금도 연습을 저녁 9시까지 하니까 11시만 되면 자요. (웃음) 배우로서 스스로를 깨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 당연히 많이 했었죠. 그런데 이젠 일부러 나를 바꾸는 게 싫어요. 내가 싫은데 왜 해야 해? 술 마시기 싫은데 왜 마셔야 해?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그러죠.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그런 역할로 저를 떠올리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변신 보단 굉장히 매력 있는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이 배우로서 크고요."

무대는 '억지 가장'을 하는 게 아니라, 사회라는 시선 안에서 가장해 왔던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들키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바른 청년이자 배우 정원조는 그 무대가, 그 연극이 괴롭고도 좋다고 한다.

"예전에 <뷰티풀 선데이>를 할 때, 3막 첫 장이 형과 울고 불고 하면서 싸우는 장면이었어요. 3막이 시작되면, 나 저기(그 장면으로) 가야 하는데, 막 괴로움이 몰려오는 거에요. (웃음) 그런데 참 오묘한 게, 그게 싫기도 하지만 좋은 것 같거든요. 뭐라 정확히 말하긴 힘든데, 내 속을 보여줘야 되는 게 되게 괴롭고 싫은데, 하고 나서는 좋으니까. 평소 못해보는 걸 캐릭터를 빌려 해봐서 좋은 게 아니라, 그 인물을 파고들어가는 것, 나를 통해서 그 파고들어간 것을 드러내는 거, 그게 재밌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연극이 참 좋아요."

<필로우맨>에 출연하게 된 계기를 묻자 "불러줬으니까 했죠. 배우가, 당연한 거 아닌가요?"라며 웃는 정원조. 최근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 그는, 직면한 자신의 삶에 치열하지만 그 시선을 자신을 넘어 세상을 향해 두고 있었다. 스스로를 "고집은 있지만 악착같지는 않다."며 빙긋 웃는 모습이, 고요한 듯 했지만 멈추지 않았던 그의 지난 날, 그리고 앞으로의 모습과 닮은 듯하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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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3

  • lbd** 2015.08.27

    8/26 공연을 보면서 혼란과 집착, 불안과 맹신,상처와극복 이러한 양면적 상황과 감정을 생각하면서 보다가 정배우님의 눈빛과 얼굴근육이 순수한것같으면서 사악한것 같고 맹목적인것 같으면서도 불안한것같아 인상적이었고 인생의 양면성에 대하여 느꼈던 공연이었습니다 무탈하게 마무리하시길

  • f1he** 2015.08.17

    연극 필로우맨에서 카투리안 역할 정말 잘 어울렸고 좋았어요. 플레이디비 좋은 인터뷰기사 잘 봤습니다. 정원조배우님 앞으로 많은 작품에서 불러줘서 쉴새없이 보고 싶네요.

  • beawoo** 2015.08.01

    안그래도 필로우맨에 대한 기대가 큰데 정원조배우님의 인터뷰 덕분에 안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연극은 서로 주고 받는 것'이란 대한 말씀이 좋네요. 배우들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관객가 배우들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