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배역 만났다” <웃음의 대학> 이시훈

이시훈은 올 봄 초연한 연극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에서 지킬 박사의 악한 인격 하이드를 연기하는 무명 배우 빅터로 온 몸을 불사르며, 혼신의 연기를 펼쳐 보였다. 얼굴 위에 번지던 굵은 땀방울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그의 연기 열정의 결과물이다. <월남스키부대>의 김일병, <미스 프랑스>의 호텔 종업원 로익,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에서 1인 4역으로 조금씩 관객들의 눈도장을 찍으며 작품 안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그가 드디어 인생 배역을 만났다. 오랫동안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웃음의 대학>에서 웃음을 사수하려는 작가 역으로 유쾌한 웃음을 예고 하고 있다. 지난 20일 개막을 앞두고 만난 이시훈은 웃음을 없애려는 검열관과의 불꽃 튀는 대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Q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초연을 한 공연인데 “일본 배우가 어떻게 했다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배우이기 때문에 그것과는 다르게 가고 싶은 게 있으니까 처음에는 ‘어떻게 다르게 가볼까’를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사람 머릿속에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완전하게 다른 게 나오기 보다는 오히려 더 비슷한 것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중에는 그런 부담감을 버리고 자유롭게 연기했다.

빅터 역할이 원 캐스트에 괴상한 소리도 많이 내고 퇴장이 거의 없고, 의상도 두꺼웠다. 땀이 많은 편인데 무대 조명이 세서 공연 시작과 함께 땀이 줄줄 흘렀다. 나중에는 힘들었다기보다는 처음 느껴보는 색다른 경험이라 아주 즐겁게 공연했다.

Q 지금 연습 중인 <웃음의 대학>은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의 제작진과 정태영 연출님이 "네가 소화할 수 있는 작품일 것 같다"고 기회를 주셔서 참여하게 됐다. <웃음의 대학>은 예전부터 관객 입장으로 봤을 때도 좋아하던 작품이고, 남자 2인극에 너무 대본이 좋아서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로망이었던 작품이었다. 이번에 기회가 와서 앞뒤 안 가리고 하겠다고 했다.

Q 그동안 해왔던 <너와 함께라면>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 이번에 무대에 올라갈 <웃음의 대학> 모두 미타니 코우기 작품이다.
미타니 코우키의 작품은 정말 버릴 것이 없다. 작품이 촘촘하고 대본이 너무 좋다. 미타니 코우기는 철저하게 상황에 의존해서 코미디를 만들어간다. 어떤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나와서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기 때문에 웃긴 것이 아니라 그냥 어수룩한 사람이 나와서 말 몇 마디를 주고 받는데 그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고 그 어이없는 상황을 꾸역꾸역 넘기고 헤쳐가는 모습이 웃긴 거다.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배워가는 게 참 많다. ‘정말 진지한 극이든, 코미디 극이든 상황에 집중했을 때 나오는 그 진정성이 보여야지만 관객들을 웃길 수도 있고, 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 공연 장면

Q 최근 코미디 작품에서 볼 기회가 많아졌다.
그동안 진지하거나 무거운 작품을 하면 바로 다음에는 코미디를 했다. 운 좋게 번갈아 가면서 한 작품씩 해왔는데. 재작년부터는 코미디 작품에 많이 출연을 하게 됐다. 어느 것이 연기하기 편하다를 나눌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정극 보다는 코미디가 더 어렵다. 최근 들어 코미디 작품 제안이 들어오다 보니까 더 고민을 하게 된다. ‘그냥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더 많이 생각하고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작품하고 있는 정태영 연출님은 항상 내 외모를 보시고 “넌 코미디를 할 얼굴이다.”라고 하거나, 나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려주시는 분들은 “코미디를 할 때 얼굴 표정이 살아있다. 너만의 독특한 호흡이 있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큰 힘이 되고 있다.

Q 대학에서 영어영문과를 전공했다가,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편입했다고 들었다.

심정적인 계기와 상황적인 계기가 있는데 심정적인 것은 아버지 직업이 성우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아버지가 연기 연습하는 걸 많이 봤다. 대본을 연습하고 녹음하고 이런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도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상황적인 계기가 생겼다. 군대를 가기 직전에 영미 희곡 수업에서 작품을 정해서 영어 연극을 실제로 무대에 올렸다. 연출을 맡아서 했는데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그 일에 다가갔고, 그걸 하면서 ‘내가 가장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바로 군대를 갔고 거기서 고민을 많이 하고 제대하고 나서는 바로 준비에 들어가서 편입을 했다. 그리고는 졸업하기도 전에 데뷔를 하게 됐다. 운이 좋았고, 타이밍 잘 맞아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다.

Q ‘이 길이 내 길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나.
겁은 나는데 겁이 나니까 더 단호해졌다. 제대하고 얼마 동안 기간을 정해놓고 이때 만약 성과가 없으면 그만 두려고 했는데 다행히 작지만 원했던 결과가 나와서 ‘나도 할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 생겼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감을 잃지 않았던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Q 주변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아버지는 걱정을 하시고 어머니는 반대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허락을 하셨는데, 어머니는 “너보다 잘생기고 연기 잘하고 키 큰 애들이 얼마나 많니”라며, 아들이 뒤늦게 연기를 하겠다고 하니 걱정이 많으셨다. 그래서 이제 갓 군대 제대해서 이십 대 중반인데, 충분히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시작도 못해보고 꺾이면 안 되니까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드렸다.

사실 아버지는 이 세계를 아시니까 더 많이 걱정을 하셨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쩔 수 없다. 나한테서 나온 자식인데 말릴 수 없다”고 하시더라. 특히나 아버지가 대학 졸업 작품으로 <벚꽃동산>을 했는데 나도 졸업작품으로 아버지와 똑같은 작품에 심지어 같은 역할을 했는데 그걸 보시고는 처음으로 “먹먹했다”고 말씀하셨다.


Q 얼마 전 KBS <독립영화관>에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해독제는 없다>가 방송됐다.
안 그래도 친구들이 공중파 데뷔를 남들 다 자는 자정에 했다고 그러더라. (웃음) 독립영화 위주로 많이 찍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면 매체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다. 드라마는 재작년에 한 편 했다. 아주 빠르게 종영한 JTBC의 <세계의 끝>이라고, 괴 바이러스라는 독특한 소재의 드라마였다. 질병관리본부 멤버 중 다섯 번째 멤버가 11회 때 바이러스에 걸려 죽어서 그 후임으로 12회부터 참여하게 됐다. 24부작 드라마라 끝까지 출연할 줄 알았는데 시청률이 안 나와서 12부에 종영을 했다. (웃음) 짧은 출연이지만 드라마 현장에 대한 도움이 많이 됐다.

Q 연기하면서 언제가 제일 재미있나.
연습할 때도 재미있지만 아무래도 본 공연 올라갈 때가 제일 재미있다. 특히 첫 공연할 때가 제일 좋다. 평소에도 객석의 미묘한 소리까지 들릴 때가 많은데 첫 공연에는 아무래도 약간의 떨림과 긴장감이 있으니까 좋은 건 들리고 나쁜 건 안 들린다. (웃음) 연습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상황, 관객들의 반응이 생기니까 첫 날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다. “너 잘했다”는 말도 물론 듣고 싶지만, “작품이 재미있다”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왜냐하면 작품이 재미있다는 건 나도 이 작품에 녹아들었다는 거니까.

Q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가끔은 지칠 때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 매일 틀에 박힌 것 같고, 똑같은 것만 같고, 나는 ‘나에 대해서 지극히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잘 안됐다. 남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난 맞는 것 같고. ‘내가 무조건 맞다고 생각한 것들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 혼란스러운 적도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남들에게 조언을 많이 구하는 편이다.

Q 공연이 없을 때는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외국어를 좋아해서 통번역 공부를 하고 있다. 일본어는 일본에서 공연하면서 기회가 돼서 배웠는데, 배우고 싶은 게 많다. 스페인어도 하고 싶고.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 뭐라도 해야 되는 성격이라 이것저것 한다. 최근에는 중국어의 필요성을 느꼈다. 얼마 전에 창작집단에서 낭독회를 했는데 거기서 첫 마디가 중국어로 하는 건데, 객석 앞 줄이 내 중국어를 듣자마자 빵 터졌다. 그때부터 당황해서 혼자 버벅거리고 자존심이 상해서 이제부터 중국어 공부를 제대로 해보려고 한다. (웃음)

Q 앞으로 꿈은?

지금껏 무대를 지키고 있는 선배님들이 연기를 하면서 지킬 것은 지키고 버텨 오신 것처럼 그만큼만이라도 나도 하고 싶다. 그걸 해낸다면 그 이후에 뭘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그만큼도 해낸다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렵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터무니없이 항상 마음속에 연예인이란 욕심이 있었는데 (물론 지금도 있지만) 우선 순위가 바뀐 것 같다.

글: 강진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jini2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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