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기] 관객들에게 언어를 퍼붓다! 욕보다 물보다 더한 모욕의 카타르시스, 연극 ‘관객모독’
작성일2009.04.27
조회수27,595
오만하다. ‘단 하나의 다른 연극’이라는 타이틀도 부족해서, ‘관객을 모독’하겠다고? 조명 아래서 땀을 찔찔 흘리면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배우들이 어지간히 감정이 쌓이기는 쌓였나 보다. 어둠 속에서 편안히 주말의 여유를 즐기려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쏘아댄다. ‘이 싸구려들아, 이 아무것도 아닌 놈들아, 이 쓸모없는 작자들아, 이 가치 없는 인생들아.’ 30년 넘게 공연되어 오고 있는 <관객모독>의 가장 유명한 특징은 바로 이 욕설과 물벼락이다. 이렇게 콧대 높은 작품에 사람들이 왜 돈을 내고 들어가는지 궁금해진다.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일까.
- 관객과 배우와의 대치 현장
네 개의 의자. 무대 위는 깔끔하다 못해 무성의하다. 관객들이 가방 하나 끼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무대 위의 배우들도 아무 준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배우들 속에는 어느 연극보다도 많은 대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비록 ‘말’이 아니라 ‘언어의 편린’이지만 말이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사들은 더러는 알아들을 법하고, 더러는 앞뒤가 맞지 않아서 더더욱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도대체 이 대사들이 알아들으라고 내뱉는 말은 맞는 건지. ‘아울러, 자기 나름대로의 변증법적 방법으로, 꿰뚫어 보고…….’ 운운하는데 골치가 다 아플 정도이다. 배우의 덕목인 관객과의 소통을 무시해버렸는데도 그들은 굉장히 당당하다. 오히려, ‘여러분은 아무것도 얻어갈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관객들의 수준을 무시하며, 생각 없이 편하게 앉아 있는 것을 질타한다. 모욕적이다. 그러나 긴장감에 등을 꼿꼿이 세우고, 모독을 주는 배우들을 직시하는 것은 분명 신선한 재미를 가져온다. ‘뚫어지게 집중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기’라는 관객들의 규칙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 언어를 해체하여, 감정을 조립하다.
배우들이 드디어 연극을 해준다니 감사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극중극 형식의 이 부분은 <관객모독>의 백미. 이 속에서 ‘피터 한트케’의 관객 행위에 대한 이론들은 완전히 해체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배우들은 언어 조각을 가지고 새로운 상황을 조립해낸다. 어투와 표정, 말의 높낮이로 새롭게 표현되는 내용은, 권력에 좌절하고 마는 연인과 그들의 동료를 그린 싸구려 멜로드라마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설계도는 의외의 재료와 정교한 기술 덕분에 대단한 작품으로 표현된다. 속도의 변주를 이용하여 음악적으로 재탄생 한 언어, 비슷한 발음이나 동음이의어로 교묘하게 상황과 일치되는 언어는 감탄스럽다. 또, 극중 연출의 지시사항을 과장하여 표현하고, ‘사람 죽이는 방법’등 관객들의 요구에 즉흥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웃음이 터지게 한다. 이 배우들, 과연 오만할만하다.
- 욕으로 관객들의 웃음을 끌어낸다는 것
극이 막바지로 치닫자, 드디어 배우들은 담아뒀던 욕설을 퍼붓는다. 물도 거침없이 뿌려댄다. 지금까지 안 들리던 말들이 아주 시원하게 들린다. 사실, 관객들에게 욕을 하는 장면은 이 공연의 전 장면을 통틀어 가장 평범한 언어 행위를 구사하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뜨악하던 표정들의 관객들이, 안도의 기쁨 때문인지 여기저기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앞부분의 언어 해체와 연결해 볼 때, 다소 생뚱맞은 부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마치 한 판 격하게 싸운 뒤 친해지는 친구 같은 시원함이 있다.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계속 생각을 시키고, 때론 조명을 받게 하였다. 우리를 ‘계몽키’위해서라며 ‘개’와 ‘Monkey’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관객들도 불편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귀찮게 하는 배우들과의 투닥거림은, 이내 고조되어 싸움으로 번진다. 그리고 한 관객이 일어나 배우들에게 물을 쏠 때, 드디어 이 장소의 현실은, 연극적 상황이 아니라 배우들의 현실이 되고, 관객들의 현실이 된다. 관객과 배우가 동등해지는 것이다.
90분 동안 관객들에게 퍼부어진 것의 대부분은 욕도, 물도 아니었다. 바로 언어였다. 그 내용을 이해하건, 그렇지 못하건 상관없다. 언어 조각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유쾌한 볼거리이다. 이 정도의 폭소를 위해서라면 욕이나 물정도의 모독이야 참을 만하다. 아니다. 사실, 몇 번은 더 당하고 싶은 한 판의 짜릿한 모독이다.
백수향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박하나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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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과 배우와의 대치 현장
네 개의 의자. 무대 위는 깔끔하다 못해 무성의하다. 관객들이 가방 하나 끼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무대 위의 배우들도 아무 준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배우들 속에는 어느 연극보다도 많은 대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비록 ‘말’이 아니라 ‘언어의 편린’이지만 말이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사들은 더러는 알아들을 법하고, 더러는 앞뒤가 맞지 않아서 더더욱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도대체 이 대사들이 알아들으라고 내뱉는 말은 맞는 건지. ‘아울러, 자기 나름대로의 변증법적 방법으로, 꿰뚫어 보고…….’ 운운하는데 골치가 다 아플 정도이다. 배우의 덕목인 관객과의 소통을 무시해버렸는데도 그들은 굉장히 당당하다. 오히려, ‘여러분은 아무것도 얻어갈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관객들의 수준을 무시하며, 생각 없이 편하게 앉아 있는 것을 질타한다. 모욕적이다. 그러나 긴장감에 등을 꼿꼿이 세우고, 모독을 주는 배우들을 직시하는 것은 분명 신선한 재미를 가져온다. ‘뚫어지게 집중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기’라는 관객들의 규칙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 언어를 해체하여, 감정을 조립하다.
배우들이 드디어 연극을 해준다니 감사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극중극 형식의 이 부분은 <관객모독>의 백미. 이 속에서 ‘피터 한트케’의 관객 행위에 대한 이론들은 완전히 해체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배우들은 언어 조각을 가지고 새로운 상황을 조립해낸다. 어투와 표정, 말의 높낮이로 새롭게 표현되는 내용은, 권력에 좌절하고 마는 연인과 그들의 동료를 그린 싸구려 멜로드라마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설계도는 의외의 재료와 정교한 기술 덕분에 대단한 작품으로 표현된다. 속도의 변주를 이용하여 음악적으로 재탄생 한 언어, 비슷한 발음이나 동음이의어로 교묘하게 상황과 일치되는 언어는 감탄스럽다. 또, 극중 연출의 지시사항을 과장하여 표현하고, ‘사람 죽이는 방법’등 관객들의 요구에 즉흥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웃음이 터지게 한다. 이 배우들, 과연 오만할만하다.
- 욕으로 관객들의 웃음을 끌어낸다는 것
극이 막바지로 치닫자, 드디어 배우들은 담아뒀던 욕설을 퍼붓는다. 물도 거침없이 뿌려댄다. 지금까지 안 들리던 말들이 아주 시원하게 들린다. 사실, 관객들에게 욕을 하는 장면은 이 공연의 전 장면을 통틀어 가장 평범한 언어 행위를 구사하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뜨악하던 표정들의 관객들이, 안도의 기쁨 때문인지 여기저기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앞부분의 언어 해체와 연결해 볼 때, 다소 생뚱맞은 부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마치 한 판 격하게 싸운 뒤 친해지는 친구 같은 시원함이 있다.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계속 생각을 시키고, 때론 조명을 받게 하였다. 우리를 ‘계몽키’위해서라며 ‘개’와 ‘Monkey’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관객들도 불편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귀찮게 하는 배우들과의 투닥거림은, 이내 고조되어 싸움으로 번진다. 그리고 한 관객이 일어나 배우들에게 물을 쏠 때, 드디어 이 장소의 현실은, 연극적 상황이 아니라 배우들의 현실이 되고, 관객들의 현실이 된다. 관객과 배우가 동등해지는 것이다.
90분 동안 관객들에게 퍼부어진 것의 대부분은 욕도, 물도 아니었다. 바로 언어였다. 그 내용을 이해하건, 그렇지 못하건 상관없다. 언어 조각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유쾌한 볼거리이다. 이 정도의 폭소를 위해서라면 욕이나 물정도의 모독이야 참을 만하다. 아니다. 사실, 몇 번은 더 당하고 싶은 한 판의 짜릿한 모독이다.
백수향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박하나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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