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남명렬, 그의 언어에 끌리다

 

연극 ‘코펜하겐’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

봄의 햇살이 당도했으나 물러나지 않은 겨울바람 때문에 거리의 인파들이 허둥대는 계절의 어느 평일 오후. 배우 남명렬은 스웨터와 점퍼, 목도리에 헤진 가죽가방을 메고 카페로 들어왔다. 관객에게 익숙한 무대 위 고뇌의 눈빛과 카리스마 대신 한결 편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거미여인의 키스’, ‘햄릿 프로젝트’, ‘프루프’, ‘갈매기’, ‘바다와 양산’, ‘에쿠우스’, ‘한스와 그레텔’, ‘마라, 사드’, ‘세자매’ 등. 그가 출연했던 수많은 작품 때문인지 그는 지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거기에 중후한 미소와 끊임없이 재생되는 유머, 쉬지 않는 탐구. 그러니까 대충 중년의 남자 연극배우에게 할 수 있는 찬사를 끌어 모아다가 믹스시키면 배우 남명렬이 남는다.  


“93년도, 첫 공연을 했던 산울림소극장 2층 연습실 마룻바닥이 생생히 기억나요. 지금 그 연습실은 사라졌지만 마치 조금 전에 만졌던 느낌이 들 정도로 선명해요. 그때 나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뭔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크지 않았나 생각해요.” 배우 남명렬은 삼십대에 직장을 그만두고 연극을 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이  쌓여 묵직한 여유로 드러났다.  

- 거대한 담론 속 인간에 대한 탐구 

그는 곧 개막할 연극 ‘코펜하겐’에서 물리학자 닐스 보어 역을 맡았다. 연극 ‘코펜하겐’은 2007년 서울대학교 공대 연극반에 의해 소개됐고 2008년 극단 청맥에 의해 정식 초연됐다. 이 작품은 ‘1941년, 왜 베르너 하이젠베르그(독일의 물리학자, Werner Karl Heisenberg, 1901.12.5~1976.2.1)가 닐스 보어(덴마크 출신의 물리학자, Niels Henrik David Bohr, 1885.10.7~1962.11.18)를 찾아왔는가’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배우 남명렬은 2009년 무대에 올랐다. “보어와 하이젠베르그의 논쟁은 과학계뿐 아니라 문화예술, 철학 등 여러 분야에 많은 담론을 던져줬어요. 과학을 소재로 하지만 결국 인간의 내면을 다루고 있죠.” 원자 세계에서의 불확실성을 통해 인간 내면의 불확실성을 드러내는 이 연극은 생소한 과학 용어와 원리들을 쏟아낸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관객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배우는 파헤칠 것이 많은 작품일수록 매력을 느껴요.” 그래서 그는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 “배우도 모르고 이야기하면서 관객이 알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다들 학구적인 친구들이라 그날 연습하며 모르는 것이 나오면 집에 가서 열심히 찾아봤어요. 그 다음날 ‘그건 이런 거야’ 하면서 알려주죠. 듣는 상대방에게 또 다른 질문이 생기겠죠? 그러면 ‘그건 내일!’하면서 또 찾아보는. 이런 과정을 한 달 이상 반복했어요. 거의 스터디그룹이었죠.”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이 대본을 보며 그 개념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그래도 알아가는 과정들이 참 재밌었어요. 관객 혹은 지인들이 공연을 본 후 물리학에 대해 정말 잘 아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을 때 ‘우리 노력이 헛되지 않구나’라는 걸 느꼈죠.”  

 

이 작품만이 아니다. 그는 유독 어렵고 많은 양의 대사들과 함께했다. 대사 잘 외우는 비법이 있지는 않을까. “잘 해야겠다는 스스로의 강박관념과 작품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든 외우게 하지 않나 생각해요. 외우지 않으면 공연을 못하니까. 누구나 잘 할 수 있는데 단지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뿐죠. 대사를 잃어버려서 공연을 망치게 할 배우는 아마 없을 걸요?” 그럼에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수도 있을 법한데 그가 실수하는 모습을 본 관객들을 찾기도 어렵다. “다른 방법이 아니고 여유 같아요. 무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소화할 수 있도록 여유를 갖는 것. 그냥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죠.” 

- 연극은 인생, 인생은 또 다른 연극 

연극배우라면 경제적 문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삼십대의 나이였다면 더욱이 절실할 것이다. “물론 경제문제에 있어 절대적 빈곤의 수준이 있어요. 일 년에 연봉이 200만원이라면 절대적으로 빈곤하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은 그래도 작업을 하니까’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저 역시 어려운 시기는 있었어요.” 그는 후배들이 시선을 조금 길게 두기를 바랐다.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굶어 죽는 사람은 드물죠.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먹고 살 수는 있어요. 연극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가만 생각해보면 경제문제는 상대빈곤이거든요. 물질적으로 욕망하는 바를 소득 수준 안에서 해결한다면 이 연극이 못할 정도로 좌절할 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는 연극 무대는 시간과 열정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살아가는 세월만큼 무대 위에서 녹아나기 마련이에요. 그 세월은 관객들에게 어필될 수 있어요. 그러니 연극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시선을 조금 길게 봤으면 해요.”

그렇다면 관객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는 한 발 물러난다. “저는 행위를 하는 입장으로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신 사회의 이슈와 유행을 따라가는 과정 속에서 소중한 것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가려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다시 한 번 뒤돌아보며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도 연극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죠. 그러려면 때때로 심각하고 진지하면서도 고뇌하는 모습을 던져줘야 해요. 그런데 그런 연극을 하면 관객이 없어요. 연극계 내부에서는 의미 있다고 이야기를 하겠죠. 그러나 우리만의 의미라면 그것이야말로 의미 없지 않나 생각해요.”
 
그는 연극 ‘코펜하겐’을 통해 관객과 ‘의미 있는’ 소통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현재 재미와 가벼움, 즐거움을 위해 달려가는 말 위에 있죠. 잠시 말고삐를 잡고 ‘속도를 조정해볼까’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이 작품과 함께 했으면 해요. 담론 자체는 거대하지만 그 속에 인간적인 부분들이 많이 있거든요. 유머도 있고.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말초적 세상에서 무언가를 돌아보고 싶다면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애쓰고 있고요.”
 

 

글_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사진_뉴스테이지 강지영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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