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Factory.40] 욕망의 집요한 시선, 연극 ‘안티고네’

우리는 사각 철창 안에 내던져진 안티고네를 본다. 철창우리 혹은 이종격투기장을 연상시키는 무대는 철저하게 억압돼 있고 완벽하게 노출돼 있다. 이는 모든 대립과 갈등을 원초적인 날것의 느낌으로 극대화시킨다. 미화의 여지가 없다. 폭력에 노출된 여배우의 몸을 가릴 것은 걸치고 있는 실오라기 천뿐이다. 잔인하다. 들판의 고양이처럼 헝클어진 안티고네는, 그러나 스스로 갇히길 원한다. 

2010년 한국에서 부활한 안티고네는 여전히 놀라웠다. ‘죽으면 죽으리다’라며 왕 앞에 나섰던 성서의 어느 여인처럼 작은 떨림조차 없다. 우리가 인터넷 쇼핑몰의 미로에서 길을 잃어 정처 없이 방황하고 다이어트에 온 힘을 쏟을 때, 이 여인은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시신에 흙을 덮어주고자 하는 사소하면서도 위험한 행위에 생을 걸었다. 가장 사적이고 시민적인 그녀의 요구가 왕 크레온의 권력에 부딪히자 곧 거대한 모래바람이 인다. 숨이 막히고 눈이 따갑다. 안티고네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적 욕망으로 공동체를 배반하고 국가를 뒤흔들고 있으며, 크레온은 국가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한 가족의 가치와 권위를 희생시킨다. 따라서 두 입장 모두 타당하며 또한 유죄다. 

그리스신화의 교훈적 내력이 그러하듯 안티고네 역시 현대 사회에서도 유의미하다. 아직도 공적인 논리와 기준, 요구가 사적인 욕망을 쉽사리 억누른다. 그러나 ‘국가와 개인의 갈등’이라는 단순명료한 정의로는 그녀의 발조차 어루만지기 힘들다.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부활할 때마다 여러 모습으로 변주돼 등장한다. 자유와 신념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오만한 여인이 되기도 한다. 이 연극은 난무하는 해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다만 처절한 혈투의 현장을 그대로 노출하므로 생생한 갈등을 마음껏 ‘구경’하도록 놔둔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출발한 이 구경이 온 몸을 휘감는 차가운 뱀의 혀로 바뀔 때, 그래서 소름이 돋을 때 무대는 파국을 맞는다. 

연극은 폭력적이다. 관객에게도 그렇고 배우에게도 마찬가지다. 폭력의 가장 큰 원동력은 시선에 있다. 연극 ‘안티고네’의 배우들은 숨을 곳이 없다.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만들어내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불편한 상황에 대해 배우들은 어떠한 불만도 내뱉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을 바라보는 관객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우리 역시 생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또 안티고네냐’고 묻는 관객들에게 ‘안티고네가 끊임없이 부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당신에게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 시선을 받아들이느냐 외면하느냐는 관객의 몫이다.  

극단 백수광부답다. 관객의 상상 안에서 놀기를 거부한다. 역동적인 공연은 배우들의 땀을 관객이 흡수하도록 만든다. 공연에 생동감을 더하는 다양한 악기 연주는 모두 배우들의 몫이다. 그들은 주인공이자 관객이고 인간이자 음악이다. 연극 그 자체다. 그것을 보란 듯이 증명해 낸 배우들의 얼굴에는 서로의 땀과 침, 눈물이 가득하다. 소극장 무대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선보였다. 그러나 상승 후 내려갈 줄 모르는 감정의 그래프는 배우와 관객이 함께 싸우고 지치도록 유도했으나 파국의 충격을 오히려 반감시키는 아쉬움을 낳았다. 

글_뉴스테이지 이영경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강일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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