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Factory.47] 소멸의 또 다른 이름은 탄생, 연극 ‘하얀앵두’
몸 안의 지층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가늠해봐야 백 년도 채 안 되는 삶일 진데 나름 여러 개의 층이 생겼다. 그 안에는 어느 날의 잊힌 사건이 화석이 돼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처 돌아보지 못한 시간들로 가득 찬 우리 몸의 지층이 허물어지면 화석이라도 남아 다른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 있을까. 안쓰러워진 몇 십 년 앞에 5억 년이라는 거대한 시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억’ 소리 나도록 급작스런 출현에 보잘것없는 우리의 삶은 고개를 숙이겠지만, 인자한 5억 년의 시간은 우리네 시간을 위축시키지 않는다. 가만히 그러안고 곧 우리가 그임을 나지막이 속삭인다.
1년 전도 가물가물한 우리에게 5억 년은 막연한 환상과 비슷하다. 그 길고 험난했던 시간이 하나의 화석으로 축약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경이의 순간이 찰나처럼 지나가고 우리는 곧 심드렁해질 것이다. 1년 전에 죽은 우리집 똥개의 뼈가 나왔다면 차라리 오열했을 것을. 연극 ‘하얀앵두’는 그 엄청난 시간을 극 안으로 끌어들이는 배짱을 발휘했으며, 놀라운 것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들어와 제 자리인 것처럼 안착했다는 것이다. 이어 그 영겁의 시간이 우리의 네모난 마음을 어루만지며 가만히 쓰다듬는다. 성급한 위로는 없다.
연극은 마음에 구멍을 갖고 사는 어느 지질학자(권오평)가 그다지 ‘유명하지 못한’ 연극배우(하영란)에게 삼엽충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삼엽충이 길고 지난했던 5억 년의 여행을 마무리 짓고 도착한 곳은 하영란의 손바닥이다. 여배우의 남편 반아산은 ‘글 안 써지는’ 작가다. 수술 후 영월에 내려온 그는 할아버지의 정원을 되살리고자 한다. 자, 눈을 감고 할머니가 우리를 반겼던 시골의 풍경을 상상해보자. 정작 고향이라 부를 만한 시골을 경험하지 못했을지라도 상상 속 시골은 대게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강아지(상상 속 시골 강아지는 진돗개일 가능성이 크다), 나무 한 그루, 꽃, 평상 정도는 갖춰져 있다. 여기 반아산의 기억 속 할아버지의 마당 역시 그렇다. 조금 더 특이하다면 하얀앵두가 있었다는 것. 진주처럼 작은 하얀앵두가 달빛을 받고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걸,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다. 하얀앵두가 그토록 반짝거리는 이유는 현재 부재하기 때문이다. 소멸되는 것일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이렇듯 연극 ‘하얀앵두’ 속에는 여러 시간이 교차한다. 그 간극은 상당하며 5억 년이 바라보는 인간의 시간, 인간이 바라보는 개의 시간이 동시에 존재한다. 인물과 시간이 무작위로 선택돼 엉켜버린 것 같은 와중에도 지층처럼 정갈하게 정돈되는 맛이 있다. 소멸과 탄생을 아우르는 인간에 집중한 탓에 연극은 싱싱하다. 연극의 두 시간가량은 황폐해진 정원을 가다듬고 식물을 심는 과정과 비슷하다. 흙을 정돈하고 기다림을 담보하는 씨앗을 뿌린다. 버석거리는 황토색 땅 깊숙한 곳에 곧 이슬 맞으며 몸을 내밀 어린잎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간질거리는 생명력이 있다. 연극은 마지막까지 열매를 보이지는 않으나 열매를 기다리는 희망의 따뜻한 온기를 전한다.
과학시리즈로 무대에 오른 ‘하얀앵두’는 과학과 인간, 자연과 소멸된 모든 것을 하나의 끈으로 연결시켰다. 물처럼 흘러 서로를 쓰다듬고 바다로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불가능함에도 등장하는 귀신 송도지와 분명 존재함에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강아지 원백이 역시 우주의 순환 안에서 숨 쉰다. 죽음은 소멸 대신 새로운 탄생을 예고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연극 ‘하얀앵두’는 삶의 본질과 가까운 추상적 주제를 구체적인 일상으로 제시, 그들의 거대한 시간 속에 관객이 스며들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들뜨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위트로 가득한 이 작품은 농익은 배우들의 연기로 보이지 않는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5억 년 동안 긴 여행길을 지나 이곳에 다다른 화석 하나가 괜찮다, 괜찮다, 당신을 위로한다.
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