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리뷰] 뿌리 깊은 삶의 고찰, 연극 ‘템페스트’
새벽에 산사의 스님이 동살에 향을 피운다. 향은 정처 없이 떠돌다가 불투명한 의식을 이승에 내맡긴다. 미련 없이 내어주며 스스로 형체를 잃어감에 관대한 웃음을 짓는다. ‘템페스트’란 폭풍을 뜻한다. 연극도 항해 중 폭풍으로 시작된다. 폭풍에 휩쓸려 생의 위급함과 극에 달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몸과 정신은 자연재해 등의 무리수에 꼼짝달싹 못한다.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왕과 그의 아들들 역시 마찬가지다. 권세와 부귀는 여기서 어떤 것도 발휘하지 못한다. 연극 ‘템페스트’는 인간의 생사를 쥐고, 초월한 절대자가 있음을 직시하고 스스로 나약함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극중 프로스페로가 요술을 부리며, 세상을 멋대로 굴복시키는 것 같지만 그도 스스로 인간적인 본질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지위에 눈이 멀어 그를 살해하려했던 원수들도 그의 너그러운 수용에 마음이 녹는다. 또 그들도 그러한 이치를 받아들이며 긴장이 완화된다. 연극 ‘템페스트’는 이 모든 과정이 의식을 치루 듯 성스럽다.
- 사람(人)
연극은 인간의 의식을 들추지 않는다. 추악한 내면을 살며시 덮는다. 이해하고, 인정하며 품안에 품어버린다. 그 가운데 관객은 법과 질서, 세리(勢利)에 묶었던 마음을 놓는다. 한국의 정서를 담는 애잔한 음악과 저절로 어깨춤이 나는 운율은 인간을 말하기 전에 ‘사람’을 말하고, 우리의 뿌리, 그 안식처로 인도한다. 이승과 저승의 구별이 사라진다. 계급과 위계질서는 그 경계를 상실한다. 잔잔한 물결이 인도하는 배에 타 멀리 뿌옇게 형상을 감춘 세리(勢利)를 본다. 그들이 펼쳐놓은 신명에 관객도 마음이 동한다. 어머니의 자궁 속 따뜻함과 고요함이 마음에 향처럼 스민다. 그리움도 실리고, 추억도 담긴다.
- 용서(容恕)
“좋은 사람이 되려면 바람과 비, 이슬에게 배워야 한다.” 아픔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우리는 바람을 만난다. 가슴을 쓸어 담고 인내하던 모습은 어느새 잊히고 마음에 용서가 꿈틀댄다. 용서는 바람으로 우리네 가슴을 훑는다. 홀가분한 마음이다. 작품은 관대함과 ‘용서’를 담는다. 화해는 마음의 화학적 과정을 거쳐 ‘흥(興)’을 돋운다. 화선지에 붓끝으로 점을 찍고, 일파만파 퍼지는 파장을 우리는 본다. 이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용서’와 화해 없이는 ‘흥(興)’에 겨울 수 없다. ‘흥(興)’은 어울림을 만들고, 어울림은 더욱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낸다.
- 정체(正體)
정체성을 잃어버린 극은 그 존재가 희미하다. 관객들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무대에서 즐거움과 쾌락을 얻고 한편으론 채워지지 않는 허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갈증을 채울 만한 무언가를 갈망한다. 즐거움과 쾌락이 채워주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정체성은 중요하다. 관객은 극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동시에 스스로 자아의 정체성을 재발견한다. 연극 ‘템페스트’는 정체성, 굳은 심지가 확고하다. ‘인간과 삶’, ‘이해와 용서’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정직하고 정확하게 조준해 우리 마음에 꽂는다. 꼭 이 극이 우리의 음악, 우리의 정서를 토대로 해서만은 아니다. 그 스스로를 강하게 주장하기 때문도 아니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삶을 고찰, 되돌아보게 하는데서 증명된다. 이 연극은 뿌리 깊은 정체성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나아가 관객은 작품 속에서의 정체성을 일상의 삶으로 바통을 넘겨받는다. 이 연극에서 관객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반을 넘는다. 일상의 삶에서 연극의 삶으로 초대받은 관객들은 작품에서 주인공이다.
뉴스테이지 김미성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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