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인간 본질에 대한 치명적인 질문, 연극 ‘루시드드림’

“난 내 운명에 살인이 허락되는지 알고 싶었어요.” 철학적이고 논리적이지만 곱씹어 볼수록 섬뜩한 이 대사는 극 중 13명을 살인한 희대의 살인마 이동원의 말로 묘한 여운을 남긴다. 과연 이것이 살해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그가 던진 이 한마디에 가장 강력하게 끌리는 이는 다름 아닌 변호사 최현석이다.

 

- “난 내 운명에 살인이 허락되는지 알고 싶었어요.” 

13명을 살인한 이동원을 변호해야 하는 최현석은 이동원의 진술에 철학적, 본질적 혼란 가운데 놓인다. 그러면서 최현석의 죄에 대한 갈망, 욕망과 본능으로 응집된 또 다른 일면은 하나 둘씩 베일을 벗는다. 결국 이 진술은 극의 중심에서 스토리를 끌어 나가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속도로 군살 없이 진행되고 욕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관객은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처음에는 이동원의 진술과 정체에 모든 관심이 모아진다면 극의 후반에서는 최종 단서가 이동원이 아닌 최현석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변호사 최현석은 살인마 이동원의 영혼이 빙의된 듯 혼연일체가 된다. 점차 이동원의 정체는 투명해진다. 도덕과 죄의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최현석의 연기는 단연 일품이다. 인간의 심리를 뿌리 깊게 관통해 무대 위 적나라하게 무게를 싣는 잔혹극 연극 ‘루시드드림’은 치밀한 연출과 배우의 혼신을 다한 연기로 인간 의식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되묻는다.

 

- 내 안의 ‘악마’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건 내 안의 ‘죄의 본능’이다. 죄의 본능이 도덕보다 강할 때, 우리는 뭔가에 붙들린 듯 넋을 놓고 따라가기 마련이다. 자제력을 잃은 상태에서 누군가가 잡아주길 바라지만, 세상은 저마다의 세계를 지키기에 바쁘다. 연극 ‘루시드드림’은 내 안의 악마를 드러내며 현대인들의 가슴 속 깊이 자리한 고독의 심연을 드러내고 있다. 연극 ‘루시드드림’은 마음 속 굳게 닫혀 도통 열지 않는 캐비닛을 통해 사회 질서 안의 ‘나’와 혐오스럽다고 판단되는 ‘나’의 분리 형태를 설명한다. 생각나면 언제든지 손쉽게 열 수 있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만 꺼내는 성질을 볼 때, 꽤나 적절한 상징체로 보인다. 배우들은 기립박수를 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혼신의 힘을 쏟았고 밀도 있는 연기로 관객들을 인간 본연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배우는 가장 이성적인 인간에서 정신을 잃고 철저한 살인마로 돌변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임에도 팽팽한 긴장감의 끈을 놓지 않고 매끄럽게 표현해냈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무중력 상태의 ‘나’    
연극 ‘루시드드림’은 이성과 환상, 선과 악, 질서와 자유본능 사이에서 방황하는 최현석을 통해 한 인간의 본질적 고통, 혼동을 신랄하게 그려냈다. ‘사회질서’ 대 ‘죄의 본능’의 이분법적 분리로 출발하여 말미는 이 둘을 교묘하게 융합시킨다. 혼돈의 중심에서 최현석은 고요한 듯하다. 끝으로 갈수록 중심을 잡으려는 최현석은 죄의 지배 아래 놓인다. 죄의 지배성은 어느새 그의 머리 꼭대기에서 이성을 압도한다. 끝내 말미에서 치열한 싸움을 끝낸 초토화된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여준다. 연극 ‘루시드드림’은 강렬하다. 무대 위 캐비닛 둘은 문을 활짝 열고, 그 속살을 드러낸다. 샅샅이 파헤쳐진 최현석의 ‘죄성’ 역시 무대 위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치열하게 달려온 뒤 파문을 맞는 연극은 다시 고요한 허공으로 돌아온다. 신호등도 중앙선도 교통표지판도 없는 텅 빈 도로 위에 선다. ‘루시드드림’은 꿈 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하는 ‘자각몽’을 일컫는 말이다. 극의 내용과 ‘루시드드림’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 비현실적 상황과 맞물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발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목과 극의 연계성에 있어 좀 더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뉴스테이지 김미성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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