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사랑과 길의 경계선, 연극 ‘산티아고 가는 길’

길과 사랑의 단면이 공간적 부피감으로 무대 위에 재현됐다. 연극 ‘산티아고 가는 길’의 무대는 길이자 동시에 이별이 남기고 간 상처의 자리다. ‘길’이라는 속성이 그렇듯 헤어진 자리엔 또 다른 사랑의 가능성이 꽃처럼 피어나 아픈 우리 마음을 어루만진다. 연극 ‘산티아고 가는 길’은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만남이 시작되기까지 그 공허하고 텅 빈 시간들을 조명한다. 그리고 상처는 어떻게 다른 사랑으로 치유되는가를 감정의 흐름에 집중해 보여준다. 그 과정에 ‘산티아고 가는 길’이 다만 뻗어있을 뿐, 그곳의 위치적, 지리적 특성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사랑은 진부하다. 연극 ‘산티아고 가는 길’은 이별을 경험한, 그것도 7년이라는 긴 연애를 끝낸 두 남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감정의 경계를 보여준다.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경계선을 구분 짓기가 모호하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연극 ‘산티아고 가는 길’은 시간의 흐름을 빌어 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일방적으로 다른 남자가 좋아졌다고 이별을 통보하는 여자를 잡지 못한 ‘곤’은 ‘산티아고 가는 길’ 위에 선다. 그곳에서 만난 강선생은 풍유와 낭만을 즐기는 가객처럼 보이지만 ‘곤’의 생각을 열어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여유와 감춰진 슬픔이 처연하게 빛난다.

 

시간은 둘의 관계를 정리한다. 사랑은 그대로 있는데 시간이 흘렀을 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곤’은 이제야 진을 이해할 수 있게 됐고, ‘진’ 역시 상처에 대응하는 자세가 조금은 의연해졌다. ‘곤’을 버리고 선택한 민이 자신의 20년 지기 연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술기운에 깔깔 웃어버릴 수 있는 내공. 연극 ‘산티아고 가는 길’은 감정 변화를 비교적 정직하게 드러낸다. 과장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바람피운 애인에 대한 아침드라마식 복수나 치정물로 흐르지도 않는다. 사랑과 상처가 남긴 우리의 마음을 담담히 들여다봐 자신의 깊고 으슥한 곳까지 침잠시킨다. 그렇게 한 없이 가라앉고 나면 언제나 밑바닥이다. 그곳은 주인공들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지가 된다. 또 다른 사랑의 여지를 남겨두고, 작품은 끝난다. 비온 뒤 땅이 굳듯 주인공들의 내면도 단단해졌다.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했고, 사랑하고, 차였던 세 남녀의 관계는 아무쪼록 평등하다. 누구도 패배자가 되거나 사랑의 상실로 인해 좌절하지 않는다. 다만 괴로운 것은 자기 앞에 펼쳐진 ‘길’의 끝없음과 알지 못하는 방향성 때문이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본인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곤’과 ‘진’, ‘연’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 불륜과 바람의 경계에 대해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도 이 작품이 관습적 인간관계를 나열한다기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극 ‘산티아고 가는 길’은 한편 노래극이다. 감정을 뱉어낸다기보다 담담하고 건조하게 노래한다. 가끔은 어떤 대사보다도 재미있고 흡입력 있게 작품의 정서를 대변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총 9편의 노래가 등장하는데 노래는 대사가 되고 대사는 노래가 된다. 시적인 가사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뉴스테이지 최나희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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