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화동연우회! 배우 이근희] ‘진짜’ 하이레벨 인간형

그는 이십대부터 서른셋까지 연극만 했다. 그가 속한 극단은 돈을 주는 곳이 아니었다. 서른넷에 스카웃 돼 방송에 출연했다. 몇 달 후 CF를 찍었다. 이틀에 1억을 벌었다. “이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했어요. 감이 안 오잖아.” 그는 그해 신춘문예를 뒤적였다. “내가 오천만원을 갖고 나머지 오천만원을 마음에 드는 작가에게 주겠다고 생각했어요. 3년 정도 라면 값은 되잖아요. 그러니 열심히 자기 작품을 쓰라고. 단, 조건은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뭐든 좋으니 하나만 써달라는 거죠. 주고 싶어서 찾아다녔어요. 돈은 그렇게 써야 해요. 여기서는 선배들이 밥 사주고 하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배우 이근희와의 인터뷰 과정은 대략 이렇다. 공연과 역할에 대한 ‘뻔’ 한 질문을 하다가, 조금 더 사적이고 주관적인 견해에 대해 묻다가, 그 답을 들으며 한없이 빠져들다가, 일종의 취재라는 것을 망각한 채 무아지경 웃다가, 결국 고민 상담에 이르기까지. “연극은 보물창고다”라고 말하는 이근희야말로 ‘돈 빼고’ 가진 게 너무 많아 연기를 하고 연극을 하는 배우다. 누구보다 유쾌하고 누구보다 편안하며 누구보다 지적이고 그 누구보다 진실 된 그는 태생적으로 예술과 미美, 구별된 사고 능력의 축복을 타고났다. 그러니 가난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좀 가난하게 살면 어때요. 어느 나라에 가도 연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니까. 나 같은 사람은 운 좋게 방송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했으니 감사하지요. 그때는 후배들에게 이것저것 잘 사주고 그랬는데 지금은 돈이 없어요(웃음).” 극단 화동연우회의 20주년 기념작이자 제20회 정기공연 ‘페리클레스’에서 뚜쟁이(포주) 역을 맡은 그가 “셰익스피어 오빠”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연극과 예술적인 삶에 대해 풀어놨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편해졌어요. 예전에 배우들 보면 새벽까지 아르바이트하고 아침에 잠깐 자고 오후에 나와 연습하고 포스터 붙이러 다니고. 그런데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연극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화동연우회는 동문들이 모인 극단이라는 차별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항상 초연을 해요. 저는 제2회 때부터 참여했는데 매년 연말 3, 4개월은 그냥 없다고 보면 돼요. 이번 20회는 19회까지 참여했던 모든 동문들이 다 모일 수 있는 작품이 뭘까 고민하다가 ‘페리클레스’로 정하게 됐죠.” 그는 여기서 창녀촌의 포주다. 그러니까 아줌마다. 기르던 수염도 잘랐고 그 ‘아줌마’들의 제스처를 연구하기도 했다. “어쨌든 성에 관한 문제는 인류와 함께 해 온 거니까. 실제 셰익스피어 시대에도 극장이 창녀촌과 함께 있었어요. 여관이 극장 바로 옆이고 셰익스피어가 거기서 하숙도 했고. 그런데 대사가 전부 욕이야. 아마 들으면 흉할지도 몰라요. 제가 그 역을 조금 희화시키고 희석시킨다고 할까. 제가 여자로 분장해도 모두 알잖아요. 그 장면들을 더 연극화시키는 장치로 저를 캐스팅했다고 생각해요.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모르긴 몰라도 그만큼 이 역을 제대로 소화할 배우는 드물 것이다. “우리 동문들은 제가 TV에서 하는 연기보다 무대에서 하는 연기를 더 좋아하는데, 아마 쇼크 받으실 지도 몰라요. 우리가 했던 연극 중 처음으로 15세 이상 관람이라니까.”

 

[연극을 ‘전도’하다] 배우 이근희는 연극을 하며 수백, 수천 년 전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이 만든 캐릭터와 함께 웃고 울었다. 그가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도 이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연극을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연극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캐스팅이 들어와요. 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유명하다 할지라도 무대에서 잘할 수가 없어요. 연극을 권하는 가장 큰 이유는, 관객과 내가 만든 캐릭터가 주고받는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돼요. 예를 들어 관객들이 나를 보고 있는지 상대배우를 더 주시하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죠. 그것을 시작으로 관객들이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게 만드는 경험을 해야 해요. 내가 객석의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아두고 그들을 몰입시킬 수 있을 때, 내가 ‘울어’ 하면 관객이 울고 ‘웃어’ 하면 관객이 웃어요. 화면은 보는 사람과 연기를 하는 사람 사이에 카메라가 있어 감정을 유도하는 등의 중간 역할을 하지만 연극은 그게 아니거든요. 오백 석 관객을 쥐고 흔들지 못하면서 수백만 명이 보는 영화라니. 그들을 흔들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려면 연극을 해야지. 젊은이가 몇 년 투자할 수 있잖아요.” 그는 마이크 없이 오백 석 극장에서 연기를 잘 하는 배우가 “진짜 잘 하는 배우”라고 말한다. “내가 어느 순간에 관객을 웃겼어요. 육백 명의 관객 얼굴이 동시에 딱 뒤로 넘어갔어요. 그런 경험을 카메라 앞에서는 못해. 순식간에 콧구멍 천이백 개를 봤다니까.”

 

[연극과 돈은 서로를 잘 몰라요] “연극을 하겠다, 연기를 하겠다고 하는 젊은이들에게 일단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라는 거지. 그 사람들 유전자체계가 하이레벨이야. 장사를 해서 돈을 벌겠다, 공부를 해서 박사가 되겠다는 현실적인 유전자가 아니에요. 물론 어른들이 보기에 철딱서니 없고 어려워 보이고 엉덩이에 바람들어갔다고 하지만 아니라니까. 이 길이 분명 어려운거라는 걸 알거예요. 그런데 감각적, 감정적으로 아름다운 것, 미, 예술을 하고 싶어 하는 거죠. 당연한 거 아니야?(웃음). 모자란 사람들은 그런 생각 안 해요. 연기를 기똥차게 해봐요, 희곡을 잘 써 봐요, 디자인을 기막히게 해봐요, 사진 하나를 죽도록 멋있게 찍어봐, 그건 평생 남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무보수지만 어차피 보수가 대신 할 수 없는 일이다. “무보수뿐이야? 후배들 밥 사줘야지 술 사줘야지 돈 무지 깨져요. 그런데 왜 하느냐? 여기 한 번 보세요. 작품을 대하는 자세나 진정성이 대단해요. 연극의 즐거움은 말 그대로 즐겁다는 데 있지.”

 

[재밌는 돈과 염색체의 상관관계 ‘놀이’] 연극은 심오하고 즐거우면서도 가난하다. 연극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에 대해 물었다. “염색체 배열이 낮으면서 돈이 많은 애들이 있어요. 이런 애들이 돈은 없지만 레벨이 높은 애들에게 돈을 줄 수 있게끔 시스템을 만들어야하는데, 그 시스템을 만드는 쪽에 있는 애들의 레벨이 중간밖에 안돼요. 돈 많은 애들이 지원한다, 후원한다 했을 때 배우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아요. 주면 주고 말면 마는 거지, 연기는 그거랑 상관없거든. 그래도 주도록 해야죠(웃음).”

 

그가 대학교 1학년 때 이문열 소설의 ‘사람의 아들’이 출판됐다. 소설을 읽은 배우 이근희는 충격을 받았다. 희곡으로 각색해 경기고등학교 후배들과 전국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에 참가, 상을 휩쓸었다. 어느 때는 뒷골목을 지나가다 비보이들을 만났다. 학교도 안다니는 그 “쉐키”들이 너무 마음에 들어 공연을 만들었다. 지금 비보이 공연문화는 이미 정착 된지 오래다. 이근희 교수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는, 등단한 희곡작가들도 여러 명 있다. 연극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 현상을 보면 그 속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게 됐다. 이 하이레벨에 속한 배우이자 연출가, 교수는 행복과 자부심에 취해 술 한 잔 하자고 말한다. 

 

 

글, 사진_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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