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Factory.69] 2010년의 마지막 축제, 연극 ‘휘가로의 결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규모의 선물이라 할만하다. 이 거대한 내용물은 겉포장만 요란한 상투적 선물일수도 있겠다는 우려와 달리 이미 알고 있음에도 선물의 가장 큰 매력이자 절대조건인 서프라이즈!에 성공했다. 참으로 실속 있고 아기자기하며 위트로 가득하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이 연극은 제목처럼 휘가로의 결혼을 둘러싼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내용을 나열하는 것이 결례가 될 만한 보마르셰 원작이 이토록 유쾌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단언컨대 배우들의 기절할만한 연기에 있다. 국내 연극계에서는 보마르셰라는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배우들, 이를테면 이영범, 김태훈, 이지하, 이항나, 이승호, 차유경 등등등. 비록 오페라의 아리아는 없을지라도 한없이 귀여워지길 마다않는 배우들의 사랑스러운 연기는 보는 재미의 무한상승선을 그린다.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당시 프랑스 귀족사회, 축소해 말하자면 권력의 악용을 비판하는 이 작품은 한가로운 귀족생활과 생명유지를 위해 모든 기지를 발휘해야하는 천민의 대립을 그려 프랑스 대혁명의 전주곡으로 불린다. 신랄한 사회풍자, 재치, 외설성 등으로 서민층 관객들에게 환호를 받았으나 보수적 관객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휘가로의 결혼’은 알마비바 백작의 어리석은 오만함과 그의 하인 휘가로의 기지를 축으로 진행된다. 하루 동안 정신없이 벌어지는 사건들은 스스로 초야권을 포기했으나 하인의 아내가 될 스잔느를 탐하는, 당시 귀족의 전형으로 읽히는 알마비바 백장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상황과 대립되는 욕망은 백작뿐 아니라 백작부인, 세르뱅, 마르세린느 등을 통해서도 표출되는데, 이 작품에서 욕망은 인물들의 성격과 직결돼 있다. 휘가로와 결혼하길 원하는 마르세린느, 아직 어린 소년인 세르뱅과 백작부인의 은밀한 정 등, 실제 이 작품이 공연될 당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날카로운 풍자보다 진한 외설성과 관련돼 있다고 할 만큼 욕망은 주요 소재로 자리한다. 그러나 우리가 당시의 부도덕한 사회문제를 보며 무릎을 칠만한 통쾌함이나 기분이 언짢아질 불쾌함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방면에서 만연하고 있는, 이른바 막장성 불륜과 은밀한 욕망 역시 농도만큼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실험극장 50주년 기념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연극 ‘휘가로의 결혼’에서 이 시대를 사는 관객들이 가장 크게 섭취할 수 있는 영양은 희극, 그 희극의 재기발랄함과 솔직함이다.

 

앞서 언급했듯 연극 ‘휘가로의 결혼’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연출과 배우들은 인물의 특성을 예리하게 캐치, 시원하게 표현하므로 저마다 독보적 성격의 캐릭터들을 부활시켰다. 이는 보마르셰가 탄생시킨 캐릭터의 개성이 매우 매력적이라는 것도 한 몫 한다. 감상적이고 몽상적이나 아직 도덕에 대한 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백작부인, 꾀가 많고 반항적이지만 명랑하며 유쾌한 휘가로, 아직 소년인 만큼 열정적인 반면 충동적이기도 한 세르뱅,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즐거움으로 가득한 스잔느 등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는 기가 막힐 희극적 조화를 이룬다. 또한 원작 그대로 살려낸 재치 있는 언어와 순발력 좋은 제스처 등은 중첩돼 터지는 어지러운 사건들이 산발되지 않고 하나의 축으로 단단하게 묶이도록 돕는다. 개구지고 천진한 듯한 표정 뒤에 숨은 희극의 영리함이 빛을 발한다. 폼생폼사 귀족들이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이 시끌벅적 요란한 한바탕 소동은, 그러나 그 누구도 매몰차게 내치지 않는다.

 

무대, 의상, 언어, 인물 등 연극 ‘휘가로의 결혼’은 원작에 충실했다. 상징성 짙은 의자, 리본, 발령장, 핀 등의 소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지금도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재치와 유머, 통찰력이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연극은 정직하면서도 진실했고, 무엇보다 관객을 존중했다. 예고된 해피엔딩이 2010년 마지막 축제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더불어 극단 실험극장의 50년 역사와 그 시간만큼의 노고에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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