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호동①] 봄보다 싱그러움 한수 위, 발레리나 이은원
첫 리허설 때 받은 대본에는 작품의 구체적 사항들이 세세하게 적혀있었다. 이은원은 읽고 또 읽으며 이미지를 그려나갔다. 사랑에 대한 경험도 적은데다가 아버지를 외면하고 나라도 배신하려니 마음이 여간 무거운 게 아니다. 알브레히트에 대한 배신감으로 광적 상태에 빠져 비극을 맞이한 지젤의 감정을 다시 떠올려보기도 한다. 책이나 영화 등도 참고한다. “결혼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첫날밤 침대에서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 있어요. 그 부분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무작정 행복한 것만은 아닌 것 같고, 여운을 좀 남겨야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연륜과 경험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직 쑥스럽고 어려워요.” 여유보다는 긴장이, 익숙함보다는 설렘이, 안정보다는 도전이 어울리는 나이 스무 살. 청춘의 시작이다. 수줍은 듯 경직돼 있지만 이은원의 목소리만은 차분하다. 그녀는 잘 웃는다. 딱 봄의 스무 살과 어울리는 미소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로 입학한 이은원은 2010년 졸업과 동시에 국립발레단 연수단원으로 입단했다. ‘백조의 호수’에서 파 드 트루와, 세 마리 백조, 스페인 공주 등을 맡아 시선을 사로잡더니 같은 해 12월 연수단원임에도 ‘호두까기 인형’ 마리 역으로 주역 데뷔무대를 가졌다. 2011년 국립발레단 정단원으로 입단한 이은원은 모든 발레리나가 꿈꾼다는 지젤이 되어 포장되지 않은 신선함으로 무대를 밝혔다.
그게 약 두 달 전이다. 이제 이은원은 낙랑공주가 되어야한다. 지젤과 낙랑공주가 돼 연타로 사랑의 비극을 맞이하다보니 슬쩍 우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작품마다의 여운이 있어요. 지젤 공연이 끝나고 나서 기분 좋은 반면 계속 씁쓸하고 안타까운 뭔가가 있었어요. ‘돈키호테’가 끝날 때는 벅찬 마음과 행복함이 가득했는데…….”
설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창작발레 ‘왕자호동’은 1988년 초연됐으며 2009년 문병남 부예술감독에 의해 재탄생됐다. 반듯한 외모에 문무까지 겸비한 엄친아 호동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는, 낙랑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호동의 밀지내용에 따라 자명고를 찢는다. “창작발레에 참여하게 돼 기쁘다”는 이은원이 만약 낙랑공주였다면, 호동왕자를 위해 자명고를 찢을 수 있었을까. 웃자고 꺼낸 이야기인데 이은원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실제 낙랑공주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노릇이다. “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만약 저라면 낙랑공주처럼 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조국은 너무 커요, 나라는 지키고 싶어요. 그럼에도 낙랑공주처럼 사랑에 빠진다면…… 아, 정말 어려운 질문이에요.”
어린 나이에 주역을 맡아 다양한 감정들을 소화해야하는 이은원은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다. 지나친 욕심이 스스로를 힘들게 함을 알기 때문이다. 고민 많은 그녀에게 지금, 기둥이 되는 마음의 스승이 있다. 바로 국립발레단 최태지 단장이다. “단장님은 무용수들이 무대에 서기 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세요. 은원아, 편안하게 그리고 즐겁게 해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사소한 말일지 모르는데 정말 힘이 되고 편안해지더라고요.” 발레리나 강수진 역시 이은원의 롤 모델이다. 닮고 싶은 발레리나다. “물론 발레를 잘 하시지만 인격적으로도 훌륭하세요. 저도 강수진 선생님처럼 여유롭고 좁지 않은 시각을 가진 넓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국립발레단의 ‘왕자호동’은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낙랑공주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은원은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남자 무용수들의 멋진 군무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라고. 한창 ‘왕자호동’ 연습 중인 그녀는 이 작품 후 곧바로 ‘코펠리아’ 무대에 오른다. 당연히 힘들고 스트레스도 받는다. 그럼에도 절대 하고 싶은 발레다. 무대 위의 행복을 알기 때문이다. “예전에 선생님들께서 무용수들은 관객의 박수를 먹고 산다고 하셨어요. 그 말이 요즘에서야 조금씩 이해되고 있어요.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를 받을 때 아, 내가 발레하길 잘했구나 생각해요.”
글, 사진_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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