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뜰리에.8] 가장된 평화가 주는 짧은 위안, 연극 ‘허탕’

‘이곳’에는 지켜보는 불특정 다수와 관찰당하는 한 명의 인간이 있다. 관찰당하는 한 명의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볼 테면 보라지. 자유를 빼앗기다 못해 매 순간을 감시당하는 ‘이곳’의 생리에 사내는 어깃장으로 맞선다. 말은 작위적으로 여유를 가장한다. 카메라 노출에 익숙해진 몸은 노골적이다. 천장에서 스프링클러처럼 쏟아지는 검붉은 사이렌 소리. 바깥세상의 문이 새로운 죄수를 토해낸다. 신참에게 태연히 커피와 담배를 권하는 사내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체득했다. 여유를 가장해야 살만해지는 ‘이곳’은 24시간 관찰당하는 7성급 감옥이다.

 

환한 백색의 무대. 사이렌이 울리는 짧은 시간을 비켜가면 감옥 안은 대체로 평화롭다. 해 종일 쫓기듯 살아가는 바깥세상의 삶을 비웃듯 감옥 안 죄수들은 자유와 맞바꾼 편의를 만끽한다. 유유히 커피잔을 기울인다.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피워도 숨어서 피우는 게 죄수의 예의’고, ‘유능한 죄수라면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감옥에 대한 예의’라며 능청을 떤다. 이 여유작작한 베테랑 죄수의 능청은 ‘감옥이 꽤 살만한 곳’이라며, 지켜보는 관객을 그럴듯하게 설득한다.

 

7성급 감옥의 ‘이중성’과 ‘열린 결말’이 던지는 질문

 

감옥 속 가장된 평화는 강간범의 기도처럼 짧은 위안으로 사라진다. 죄수에게 ‘천국’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감옥은 무생물 같은 가면을 서서히 벗으며 어두운 실체를 드러낸다. 능청을 떨고(죄수1), 필사적으로 적응하고(죄수2), 바깥세상을 잊으며(죄수3) 간신히 이뤄낸 ‘거짓 평화’는 망각에서 자각으로 돌변한 죄수3에 의해 무참히 깨어진다. 환상의 깨진 틈으로는 어둠과 폭력, 비명과 절망이 흐른다. 감옥의 맨얼굴이다. 

 

장진 감독은 ‘감옥’이라는 폐쇄공간에 그럴듯한 가면을 씌웠다 벗겨 내는 실험을 통해 ‘7성급 감옥’의 이중적 명암을 더욱 대조적으로 드러낸다. ‘벌을 받기 위해 갇힌 공간이 안락하다’는 껄끄러움에서 출발한 관객은 ‘감옥답게 변해가는 폭력성’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의 꿈틀대는 욕망을 읽는다. 자유를 위해 투쟁한 자와, 지배에 굴복하며 안주를 택한 자에게 서로 다른 결말을 선사하는 장진감독의 반전은 관객에게 꽤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장진 감독은 “세상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우뚝 서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나갈 것이고, 이 세상이 주는 재화에 익숙해져 이곳에 안주하는 사람은 결국에 나가지 못하고 불행해진다는 것이 이 작품의 결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분명한 것은 없다. 쉽게 보여주지 않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부조리극을 택한 ‘허탕’의 본질이다.

 


능청스럽거나 섬뜩한, 죄수들의 열연

 

부조리로 틀어진 조각의 여백을 채우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들의 연기다. 이철민 배우는 능청스런 베테랑 죄수 연기로 이중적인 감옥의 본질을 노련하게 드러냈다. ‘카메라에 대고 원하는 걸 소리치면 돼’,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끔찍한 곳’, 그의 두 연기는 같은 얼굴이되 날 선 깊이가 다르다. 능청스런 가면 속에 숨겨진 모의와 모반을 최후까지 들키지 않고 굳건하게 연기한다. 여죄수를 연기한 송유현 배우는 임산부의 몸과 기억을 잃은 심리, 상처받은 내면을 모두 담아내야 하는 고도의 연기를 무난히 해냈다. 특히 싸이코드라마를 통해 실제 자아와 대면하는 그녀의 섬뜩한 연기는 현실감각을 일깨우는 잔혹한 칼날이 되어 객석을 파고들었다.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현실을 꼬집는 것은 현대식 직설화법이다. 13년 전 포스트모던 시대에 부조리극으로 초연된 이 작품은 90년대식 의뭉스런 풍자화법을 따른다. 내뱉어진 대사들 간의 의미 간극도 의도된 여백이 있다. 정확한 해설이나 과학적 인과가 존재하지 않는 모호하고 부조리한 흐름은 불친절한 만큼 신선하다. 대사와 상황을 곧이곧대로 해석하기보다 자유로운 상상으로 나름의 주석을 달다 보면 때에 따라 코믹과 철학, 환상과 뼈있는 현실감각을 적절히 즐길 수 있다.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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