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한팩 하이브리드 <더 라스트월 비긴즈>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예술은 무엇인가
글 장지영(국민일보 기자)
지난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국내 초청작 가운데 <더 라스트 월(The Last Wall)>은 축제가 개막하기 전부터 주목받았다. 무엇보다 기존 공연단체가 아닌 미디어아트 전문기관인 아트선재 나비가 이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이 무용 연극 영상 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통섭한 총체극이라는 점에서 본격적인 하이브리드 공연의 물꼬가 터질 것으로 기대됐다.
그런데 <더 라스트 월>은 영국의 록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만큼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짙게 담은 작품이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 반대인 개인의 소통 문제로 귀결됐다. 1979년 발표한 <더 월>은 리더 로저 워터스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전쟁과 사회적 모순을 오페라 형식으로 구성했는데, 획일적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등 사회성 짙은 강렬한 메시지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3년 뒤 알란 파커 감독이 이 음반을 영상으로 구성해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워터스는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에서 세계 록스타들을 모아 <더 월-베를린 공연>을 열어 세계의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더 라스트 월>의 전체 연출을 맡은 재독 안무가 김윤정은 예술이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풀어내는 것에 대해 다소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9월 13~16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될 <더 라스트 월 비긴즈(The Last Wall Begins)>는 <더 라스트 월>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당초 의도했던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은 작품이다. 한국공연예술센터와 나비아트센터가 손을 잡고 ‘한팩 하이브리드’ 시리즈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리는 이 작품은 원래 지난해 공연의 기획자였으나 공연 준비도중 교통사고로 빠졌던 류병학 나비아트센터 고문이 대본과 연출을 맡았다. 그리고 류병학이 평소 재능을 높이 평가한 이경(안무), 류한길(음악), 정두섭 정석희(이상 영상) 등 여러 아티스트들이 사실상 재능을 기부하는 형식으로 동참했다. 그리고 이 작품의 티켓 수익금은 새터민에게 전액 지원될 예정이다.
영화 ‘배트맨 비긴즈’를 참고해 제목을 지은 <더 라스트 월 비긴즈>는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서 출발됐다. 영화 배트맨 시리즈의 임팩트가 사라진 뒤 새롭게 만들어진 ‘배트맨 다크 나이트 시리즈’가 배트맨의 원초적인 어둠을 드러낸 것처럼 <더 라스트 월 비긴즈>도 <더 라스트 월>에서 배제됐던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화가·문화비평가·전시기획자·잡지발행인·작가·감독 등으로 활동하는 전방위 문화인 류병학은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너무 사회를 등한시한 채 예술 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며 “이번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인 예술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요즘 ‘통섭’ 공연이 유행하고 있는데, 대부분 말만 번지르르하지 사실상 각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따로따로 노는게 대부분이었다”며 실질적인 통섭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사회의 밑바닥을 알아야 감동이 있는 예술이 나온다”고 믿는 그가 이번 작품의 소재로 선택한 것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남북한의 ‘재통일’이다. 그는 “통일은 원래 떨어져 있던 것이 하나가 될 때 쓰는 말이고 재통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나뉘어 있다가 다시 하나가 될 때 쓰는 말”이라면서 “남북한은 원래 하나였던 만큼 ‘재통일’이란 용어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재통일의 주체는 남북한의 정상도 아니고 주변국도 아니고, 바로 남북한의 주민들, 바로 우리 모두”라고 덧붙였다.
<더 라스트 월 비긴즈>의 배경은 지금으로터 7년 뒤인 2019년 4월이다. 극중에서 남북한이 재통일되는 날을 2009년 4월 13일로 잡은 것은 바로 이날이 임시정부가 수립된지 100년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임시정부 100주년도 있지만 실제 2019년쯤 되면 남북한이 통일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독일의 베를린장벽도 동독 주민들의 서독 여행 자유화 조치 발표 이후 순식간에 붕괴된 것을 볼 때 남북한 역시 6자 회담에서 여행 자유화 조치가 합의되면 금방 재통일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남북한 재통일 이후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탈북자다. 평양예술대학 무용과 출신의 한송이와 그의 연인인 김영식이 자유로운 예술혼을 불사르기 위해 북한을 함께 탈출하면서부터 드라마가 시작된다. 영식이 두만강을 건너다가 국경수비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뒤 송이는 북한의 독재 체제에 저항하기로 결심하지만 하필 다음날 재통일이 이루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남한에 도착한 송이는 생각지 못했던 높은 벽에 또다시 부딪힌다. 남북한 사이의 물리적 벽은 사라졌지만 남북한 주민의 심리적 장벽은 더욱 견고했기 때문이다.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점철된 남한에서 그는 남한의 재벌과 언론 그리고 종교에서도 북한 못지 않은 세습이 이뤄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한의 사회적 병폐에 저항하려는 그의 모습은 증오했던 독재자의 모습에 점점 닮아가고, 그는 그런 자신에게 절망한다. 이때 남한 체제에 반대하는 테러리스트가 등장해 자폭하려는 순간 송이는 남북한 주민을 위해 폭탄에 몸을 던져 희생을 최소화한다. 송이의 죽음은 남북한 주민들의 단단했던 벽을 부수며 서로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토대가 된다.
탈북자 문제라고 해서 이 작품이 내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류병학은 “재미가 없는 작품은 관객의 시선을 끌 수 없다”며 “극중 일부 장면은 개그 콘서트의 몇몇 코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무용계의 경우 그동안 마케팅 측면에서 관객을 분석하는 노력 없이 무턱대고 공연하기도 했지만 이젠 시대 흐름에 맞게 각각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극중 탈북자들의 역할에 진짜 탈북자 3명을 캐스팅했다.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열정이 넘치는데다 실제 탈북자만이 가지고 있는 리얼리티 때문이다. 주인공 한송이 역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북한에서 태어나 11살 때 탈북한 실제 한송이(24)다. 중국에서 8년간 체류하는 동안 최승희의 제자에게 무용을 사사한 그는 2005년 남한으로 넘어와 현재 건국대 의상디자인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다.
또 함흥예술대학 성악과 출신으로 북한에서 ‘생활가요’를 부르던 김충성(36)은 출신성분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다가 2004년 남한에 왔다. 남한에서 뮤지컬 <요덕 스토리>에 출연했으며 다른 가수들과 통일 앨범 <나의 사랑 코리아>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금은 매일 새벽 1~2시 극동방송 <안녕하세요.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 K' 시즌 1에 출연해 화제를 모은 김병수(71) 노인은 평안도 출신으로 북한에서 ’전국선전선동경연대회‘에서 3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가수가 꿈이었지만 출신성분 때문에 엄두를 못내다가 2002년 한국에 온 뒤 막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다가 슈퍼스타K 오디션에 응모해 1차 예선을 통과했다.
류병학은 “이번 공연을 위해 탈북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동안 나를 포함해 우리 사회가 이들의 문제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게 됐다”면서 “200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 온 탈북자들이 2만5000여명 되는데, 이들의 수백배나 되는 또다른 탈북자들이 현재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과 라오스 등지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들의 80%가 여자라는 것을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이들 여자들의 70%가 20~30대인데, 한국에 잘 적응한 소수를 제외하곤 90% 정도는 극빈층에 머문다”고 덧붙였다.
류병학의 <더 라스트 월 비긴즈>에 힘을 보탠 다른 아티스트들은 그동안 탈북자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영상 감독을 맡은 정두섭은 대학에서 조교로 일할 때 신입생으로 들어온 탈북 남학생에게 느꼈던 마음의 답답함을 먼저 떠올렸다. 그는 “당시 조교로서 그 학생이 학교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어울리는 기회를 가끔 만들었다. 그렇지만 통일이나 탈북, 김일성, 이념 등의 이야기는 그 학생 앞에서 솔직히 꺼내기가 어려웠다.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왠지 모를 불편함과 울컥함이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정두섭을 제외한 4명의 아티스트들은 “솔직히 탈북자 문제를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와 함께 한국 예술가들이 사회적 이슈에 유독 둔감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는 이들 아티스트들의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안무가 이경과 영상감독 정석희는 “예술가들이 기본적으로 인간 존재에 관한 탐구를 하다보니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다소 거부감을 느낀다”면서도 “예술가들도 사회의 구성원인 이상 현실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정두섭은 “순수예술 분야에서 남북한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적다고 해서 한국 예술가들이 사회적 문제에 둔감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최근 어떤 화가가 김일성 초상화 형태의 그림을 그렸지만 전시를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작품의 내용이 북한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일반 관객에게는 거부감을 줬던 것 같다. 이에 비해 영화나 드라마 등 대중예술 분야에서는 예전부터 남북한 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관객들의 거부감이 덜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번 작품은 여러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함께 작업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을 지향하고 있다. 최근 한국 문화예술계의 화두로 떠오른 ‘통섭’에 대해 이들은 대부분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정석희는 “여러 장르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면서 “다양한 형식의 작업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연출가가 작품의 메시지를 어떻게 조화롭고 개성적으로 풀어내느냐가 가장 중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동안 조소, 사진, 패션, 파티기획, 그래픽 디자인,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정두섭은 “장르는 내용 전달의 수단과 도구일 뿐이지 감동을 주는 그 자체는 아니다”면서 “작업을 할 때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활용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다양한 장르가 만나는 하이브리드에 불편함을 느끼는 목소리도 있었다. 음악감독을 맡은 사운드 아티스트 류한길은 “개인적으로 총체극의 형식이 지닌 소재주의가 다소 불편하다”면서 “연출가는 다양한 형식들을 하나로 모으려는 욕심이 있는데. 자칫 너무나 많은 형식을 한꺼번에 묶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다른 총체극들이 겪었던 산만함을 고스란히 노출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들 아티스트들은 탈북자를 다룬 이번 작품과 관련해 각각의 창의성을 살리면서도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만만치 않은 수고를 했다. 류한길은 미디어 사회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듣는 자신이 소리가 들리는 상태에 놓여지는 것”이라며 “평소 관객의 상상력을 저해하는 화성이나 멜로디는 기본적으로 배제하고 음향 중심의 리듬을 강조하는 편인데, 이번 작품에서도 가능한 한 악기를 쓰지 않으면서 리듬감의 힘으로 극을 뒷받침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경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 가장 애매모호하고 민감한 문제의식을 관념적으로 형상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특히 이번 작품의 영상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남북한의 역사적 사건이나 재통일 이후의 모습을 모션그래픽,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영상 기법으로 재밌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두섭은 “작업의 특성상 무수히 많은 양의 드로잉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간과 노동의 강도 면에서 그 어느 작품 보다 끈기와 인내가 필요했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럿이 함께 작업하는 것은 혼자 작업하는 것과 차별되는 즐거움이 컸다”고 말했다.
‘르네상스 맨’ 류병학과 일단의 재능 있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인 것만으로 기대가 되는 <더 라스트 월 비긴스>. 류병학의 화려한 입담만큼 의미 있고 기억에 남는 작품일지 빨리 확인하고 싶어진다.
출처 - 월간 매거진 한팩뷰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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