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들은 미친 사람일까, 연극 ‘드레싱’

누군가에게 헌신적으로 애정을 쏟아 부어 본 일이 있는가. 한쪽만 주는 사랑은 균형이 비틀어져 깨지기 쉽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의 경험이 없이 서툰 사람들이 만났기 때문이다. 서툴기에 풋풋했고, 풋풋했기에 아련하다. 시행착오를 통해 관계를 이해하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면 우리는 결혼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른다.

 

현대인들은 더 쉽게 상처받는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정’과 같은 다른 관계가 필요하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만큼 깊은 관계는 쉽지 않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굳어 흉터로 남고, 흉터를 감추고자 마음의 벽을 쌓는다. 외로움을 쌓고 고독을 쌓아 점점 자기 속으로 숨는다.

 

내밀한 욕망을 드러내 상처를 쓰다듬다

 

연극 ‘드레싱’은 관계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한다. 극도로 마음의 벽을 쌓은 두 남녀의 내면을 사회자가 의사 가운을 입고 나타나 찰 지게 설명한다. 바텐더가 되어 술 한 잔 따라주며 둘을 위로하기도 하고, 감정의 극에 치달은 남녀를 뜯어말리기도 한다. 작은 찰과상이라도 입을까 온몸을 웅크리며 사는 관객에게 사회자의 등장은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그는 ‘내가 네 인생의 사회자가 돼 줄게’라고 속삭인다. 자신도 모르는 나의 내면을 청량하게 설명해 줄 내 인생의 사회자는 없을까.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추상적인 외로움이 아니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함께 자고 싶은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스스럼없이 그린다. 고독한 남녀는 단백질 인형 ‘리얼돌’에게 사랑을 요구한다. 인형에게서 받은 육체적인 애정은 ‘언제까지나 함께 있어 달라’는 병적인 집착으로 망울진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그들은 ‘병적’이다. 사회자는 이들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과연 그들은 미쳤을까. ‘정신병’인지 아닌지의 기준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정신질환을 진단할 때 이론적인 문장을 하나 두고 ‘그렇다’, ‘좀 더 그렇다’로 점수를 매긴다. 많은 문장이 모여 정신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점수가 탄생한다. 과연 그들은 미친 걸까.

 

최근 SNS에서 떠다니는 영상 중 애완동물을 키우는 중년 남녀들의 인터뷰가 있었다. 밤늦게 술을 먹고 들어가도 항상 엉덩이 박차고 현관까지 나와 반겨주는 이는 강아지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자식보다 아내보다 나은 것이 애완동물이란 주장이다. 단백질 인형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것과 다른 맥락이라 할 수 있는가.

 


고독과 상처를 더욱 붉게 물들이는 ‘無’의 무대

 

연극 ‘드레싱’이 보여주는 고독과 상처, 그리고 본능적인 욕망은 ‘無’의 무대에서 오롯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무대장치도, 소품도, 색깔도 없다. 무대, 배경, 의상, 신발, 단 하나 등장하는 작은 소품 하나까지 모두 희다. 심지어 배우의 메이크업조차 없다. 그래서 관객은 배우의 감정선에 더 집중하고, 그들의 진한 내면연기에 눈길을 내리꽂는다. 이를 인도해주는 것은 사회자의 몫이다.

 

연극 ‘드레싱’의 무대는 배우의 힘이 강렬했다. 작품에서 배우는 어떤 무대에서보다 자신의 속 깊은 곳까지 까발려야 한다. 마임을 하듯 물을 마시고, 채팅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인형을 상대로 사랑을 나눈다. 배우는 등장인물 남녀와 인형의 1인 2역을 한다. 상대배우의 감정선을 살리기 위해 순식간에 감정이 없는 인형이 돼야 한다. 인형과 사람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순간, 관객의 몰입도는 떨어진다.

 

외로움과 상처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리얼돌’이라는 소재 때문이다. ‘리얼돌’은 감정도, 표현도 없다. 남녀와 인형 사이에는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소통되지 않는 ‘無’의 관계에서 혼자 울고 웃고 소리 지르고 애무한다. 그래서 남녀의 아픔은 더 선명하고, 공허함은 팽창한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무대 주변 사방의 거울은 공허함을 무한히 팽창시킨다.

 

 

이소연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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