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무극 ‘푸른 눈 박연’…“새로운 도전”

이시후의 말은 진득하다. 말의 끄트머리는 확신과 비 확신 사이에서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우유부단하진 않다. 단호하고도 부드럽고, 강하고도 유순하다. 무림 고수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표표한 카리스마도 느껴진다. 보일 듯 말 듯한 초연한 미소는 ‘신뢰’라는 단어를 새긴 것 같다.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이시후의 얼굴, 어디까지일까.


서울예술단 단원인 그는 최근 가무극 세 번째 시리즈 ‘푸른 눈 박연’의 타이틀롤을 맡아 무대에 오를 준비에 한창이다. 눈이 부시도록 노란 머리를 하고 한 손엔 꾸깃해진 대본을 들고 나타난 그가 멋쩍게 웃었다. “포스터에 제 이름을 새긴 주역은 처음인 것 같아요”라는 그의 얼굴은 덤덤했다. 하지만 그 이면은 설렘과 열정으로 잔잔하고 깊게 일렁이고 있었다. 10월 25일 공식 연습 일정을 마치고도 연습을 위해 남아 있던 그와 함께 ‘푸른 눈 박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가무극 ‘푸른 눈 박연’ “남다르죠”


가무극 ‘푸른 눈 박연’은 서울예술단의 ‘윤동주, 달을 쏘다’, ‘잃어버린 얼굴 1895’에 이은 세 번째 ‘가무극 시리즈’다. 이전의 ‘가무극 시리즈’가 비장미로 일관했다면, ‘푸른 눈 박연’은 밝고 경쾌한 리듬을 갖는다. 작품은 ‘하멜표류기’에 등장하는 ‘얀 얀스 벨테브레’라는 인물을 바탕으로 한다. ‘벨테브레’는 ‘하멜’보다 26년 먼저 조선 땅을 밟았고 종래에는 귀화한 인물이다.


이시후는 가무극 ‘푸른 눈 박연’에서 ‘박연’ 역을 맡았다. ‘크리스마스 캐롤’, 중국에서 공연된 ‘왕의 우인’ 등에서 주역으로 섰었지만 포스터에 커다랗게 들어간 자신의 이름을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감을 묻자 “남다르죠”라는 말이 툭하고 튀어나온다.


“외부에서 4~5년 활동하다 서울예술단에 들어왔어요. 지금 6년 차예요. 10년 배우 생활을 했는데 중고 신인이죠.(웃음) 서울예술단의 몇몇 무대에서 주역으로 섰었지만 포스터에 제 이름이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부담감도 있어요. 지나치면 집중을 못할까봐 부담감은 갖되, 최대한 편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최근 ‘서울예술단’은 활기를 찾고 있다. ‘윤동주, 달을 쏘다’와 ‘잃어버린 얼굴 1895’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연이어 터져서다. 이시후는 ‘잃어버린 얼굴 1895’ 후 곧바로 무대 오르는 ‘푸른 눈 박연’에 대한 부담감이 있을 법한데도 초연해 보였다. 그는 겹경사에 대한 기쁨의 몫을 후배들에게 돌린 뒤 자신에게는 채찍질을 더했다. “(박)영수, (김)도빈이, (조)풍래 같은 후배들이 정말 잘해주고 있어요. 연이어서 흥행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보다 후배들이 잘하고 있으니 저도 이 친구들만큼은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에요”라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시후는 후배들이 잘 따르기로도 유명하다. 과묵하지만 주변을 묵묵히 챙기는 모습에서 ‘형’이자 ‘선배’로서의 든든함이 묻어난다. ‘타고난 리더’ 아니냐고 물으니 “전혀 아닙니다”라고 답한 그는 “후배들과 자리를 많이 하려고 해요. 전 그냥 나이가 많은 거죠. 애들이 끼워주는 거고요.(웃음)”라며 멋쩍은 얼굴로 뒷목을 긁는다.


그에게 가무극 ‘푸른 눈 박연’은 처음이 많은 작품이다. 주역 도전이기도 하지만 여자 배우와 멜로 연기도 거의 처음이다. 몇몇 인터뷰에서 멜로를 하고 싶다 밝혔던 그에게 멜로 도전의 소감을 물으니 “제가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라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이어 “제가 좀 무뚝뚝해요. 멜로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요. 파트너십을 맞춰야 하는데, 멜로 장르에 대한 경험이 많이 없어서요. 상대역 ‘연리’ 역을 맡은 김혜원 선배나 조연출, 연출 선생님께 많이 듣고 연습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상대역인 김혜원은 예술단 8년 차 선배다. 서울예술단 연차로는 이시후보다 2년이 많지만, 나이는 7살 적다. 하지만 이시후는 꼬박꼬박 선배 호칭과 존대를 붙인다.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는 “저보다 선배세요. 누구누구 씨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선배는 선배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들어오는 후배들도 생각해야 하고요”라고 말한다. 원칙주의자이냐 물으니 “글쎄요. 지킬 건 지키고, 풀어질 땐 풀어지려 하는 편이예요. 하지만 도빈이가 매번 절 원칙주의자라고 불러요”라며 웃는다.


“서서히 변해가는 ‘박연’의 모습에 초점 맞춰”


가무극 ‘푸른 눈 박연’은 코미디의 성격이 다분하지만 사람 냄새가 배어 있는 가슴 따뜻한 작품이다. 서양인 ‘박연’이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는지를 토대로 우정, 사랑, 신의 등을 담는다.


이시후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던 ‘박연’의 선원 시절부터 그림을 그려나갔다. 동인도 회사에 소속된 선원이었던 ‘벨테브레’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해적 생활도 오래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거친 바다 생활을 견뎌왔던 ‘벨테브레’가 외로운 남자가 아니었을까부터 숙제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벨테브레’가 네덜란드에 있는 가족과도 연락이 끊어지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 외딴 섬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거잖아요. 처음엔 ‘벨테브레’를 신기하게 보던 사람들이 서서히 그에게 다가오고 우정을 나누고요. 외롭던 사람이 조선이라는 순수한 나라에 와서 동화되어 가고,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그가 생각하는 가무극 ‘푸른 눈 박연’의 주제도 ‘사람’이다. 아무리 다른 환경 속에 살아온 이들이라도 서로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종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같이 어울리면 살 수 있다를 말하는 것 같아요. 맘 붙이고 살고, 발 붙이고 살면 살 만하다?(웃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에요.”


이시후는 조선으로 귀화한 인물을 설득력 있게 소화하기 위해 ‘벨테브레’의 심적 변화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는 “표류하기 전인 극 초반에는 거친 선원을 연기해요. 외롭고 찌들어 있는 사람이죠. 그러다 조선 사람을 만나며 서서히 변해요. 둥글둥글하게요. ‘연리’에게 마음이 넘어가게 되는 시점도 중점적으로 연기하려고 노력 중이에요”라고 설명했다.


외국인을 연기하다 보니 외적인 면에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그는 이번 공연 때문에 머리도 노랗게 탈색했고, 공연 시에는 렌즈도 착용할 예정이다. 네덜란드어는 물론 한국어 대사도 외국인이 쓰는 것처럼 구사해야 한다. 극 초반에 등장하는 네덜란드어 장면을 위해 교재를 사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지인을 통해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대사 번역을 부탁하기도 했다.


외국인 역이라 어려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닐 것 같다고 묻자 “그런 부분은 연습 초반에 연출님께서 재밌게 풀어나가자고 하셔서 많이 떨쳐냈어요”라며 “한국어 대사를 너무 어눌하게 해도 바보 같아 보인다고 하셔서 담백하게 하려고 해요. 한국어를 못해 보이는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지금은 거의 찾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왜 박연이 조선을 떠나지 않았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잠시 골몰했다. 잠깐의 생각 끝에 그는 “사람 때문이죠”라며 “순수한 조선 사람들과 맺게 된 우정, 포를 만들어주겠다는 인조와의 약속, 연민이 어느새 사랑이 되어버린 연리까지요. 이야기를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조선 사람들이 있더라고요”라고 답했다.


이시후는 이번 공연을 위해 목 관리에도 특별히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연습이 끝나면 재깍 집으로 들어가고, 친구 만나기를 좋아하지만 공연을 위해 술자리도 피하고 있다. 가창력에 대해 ‘기대해도 좋다’는 관계자의 전언이 이어지자 이내 쑥스러운 미소로 손사래를 친다. 그는 “웬만하면 바깥도 안 나가요. 주말에는 꼬박 쉬고요. 감기 조심, 술 조심, 밤이슬 조심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감기 예방 주사도 맞았어요. 바른 생활 소년이 됐죠. 1년 내내 공연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모든 건 하다보면 하게 된다” 배우 이시후


이시후의 고향은 대전이다. 표준어로 조근조근 말을 이어가지만 그 안에는 묵직하고 진득한 충청도 사나이의 우직함이 고스란하다. 그는 고등학교 때 처음 배우의 꿈을 꿨다. 이후 대학 때 연극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의 이력은 조금 특이하다.


“서울에 온 게 스물여섯이었어요. 그땐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었어요. 뮤지컬을 하려면 춤과 노래를 할 줄 알아야 하잖아요. 대학원을 들어갔는데 발레단에서 활동하던 무용수 형이 있더라고요. 형의 추천으로 아카데미에서 발레를 2년간 배웠어요. 하다 보니 욕심이 났죠. 단장님께서도 계속 하고 싶다면 발레단에 들어와서 캐릭터 댄서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클래스를 똑같이 받기 때문에 많이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선심을 써주셨죠. 그래서 뮤지컬을 완전히 접어두고 발레단 생활을 4년 정도 했어요.”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발레단 활동을 가능케 한 것은 순전히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열심히 한 것을 단장님께서 예쁘게 봐주셨던 것 같다”며 겸손해했다. 하지만 얼마간의 노력으로 발레단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당시 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케 한다.


그는 배우 생활로 다시 돌아오면서 댄스스포츠도 배웠다. “‘릴렉스’를 기반으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려고 한다”는 그가 발레로 딱딱해진 몸을 풀어주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다. 댄스스포츠 역시 약 2년간 했다. 한 가지를 시작하면 “진득함지 한다”는 그의 성향을 다시 한 번 읽게 하는 대목이었다.


진득한 그의 성향은 삶에서도 묻어난다. “시작하기 전에는 오랫동안 고민하지만 시작 후에는 끝까지 한다”는 말에도 이시후의 인생관이 묻어있다. “제가 다 늦게 시작했어요. 노래도 춤도 연기도요. 그래서 남들보다 성과도 늦어요. 노래는 부르다 보면 어느 순간 무언가 걸려요. 그걸 넘어서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거든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기 몸에 맞는 발성을 하나하나 하게 되는 거죠. 몸으로 조금씩 알아가고 받아들이면서 하는 것 같아요.”


그는 이번 공연부터가 ‘도전’이라 말한다. 주로 악역이나 강한 역할을 맡았지만 가무극 ‘푸른 눈 박연’에서는 전혀 새로운 얼굴을 연기한다. 타 장르에 대한 기대도 놓지 않고 있다. “도전 의식을 버리지 않아야 사람이 퍼지지 않고 살잖아요. 개인적으로 그걸 놓치면 그렇게 계속 살 것 같다는 위기의식이 있어요. 그래서 낮잠을 안자기도 하고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는 스타일인데, 나이가 들다보니 점점 약해지고 있어요.(웃음)”


마지막으로 이시후에게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요즘 어느 정도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요”라는 말로 운을 뗀다.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자신이 변하면 관객도 알아줄 테니까요. 나중에 ‘누구처럼 될 거야’ 라는 생각은 정말 생각이잖아요. 미래는 모르는 거고요. 계속 끊임없이 구르다 보면 서광이 비치지 않을까요?”


그는 서글서글한 눈으로 웃으며 “모든 건 하다 보면 하게 된다니까요. 박연처럼”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이시후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서광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강직한 그의 뒷모습이 든든하다. 정진하고 갈고 닦은 이시후의 현재가 뜨거운 미래로 발하기를 바래본다.

 

 

 

 

정지혜 기자_사진 박민희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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