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까지나는 곧 이혜영"…네번 고사 끝 수락한 무대

국립극단 '갈매기' 출연 4년 만에 연극 복귀 "때가 된 듯하다" 안톤 체호프 대표작이자 스테디셀러 1994년 희곡 읽고 '니나'에 빠졌으나 이제는 아르까지나 역할에 몰입 "잘하는거 해라 조언 듣기 잘했다 싶어"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로 4년 만에 무대에 돌아온 배우 이혜영. 그는 “아르까지나 역은 오랜 숙제였다. 이 역을 맡아 기존의 익숙한 나를 깨고 파괴하며 해체되는 듯한 경험을 하고 있다”며 “이번 아르까지나는 예술에 도전했다가 좌절과 실패를 맛본 한 여자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사진=국립극단).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네 번을 고사했다. 별로 내키지 않았다. 마냥 낡고 고루할 것 같은,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다.” 제안받은 역할보다 다른 배역에 눈길이 간 것도 선뜻 결정을 못 내린 이유였다. 그래도 결국 배우 이혜영(54)은 무대로 돌아왔다.

오는 29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연극 ‘갈매기’에서 이혜영은 이미 수차례 거절했던 유명여배우의 역할 ‘아르까지나’를 연기한다. 이번 작품은 2012년 연극 ‘헤다 가블러’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은 후 4년 만의 복귀작이다.

‘갈매기’는 여배우 아르까지나와 연인인 소설가 뜨리고린, 아르까지나의 아들 뜨레쁠레프와 연인 니나의 얽히고설킨 인연을 풀어놓는다. 이들의 사각관계를 축으로 예술과 인생, 인간의 욕망·갈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데 120년 전 희곡이지만 요즘도 자주 공연하는 현대 고전 중 하나다.

최근 기자와 만난 이혜영은 “오랜 숙제를 풀겠다는 생각으로 출연을 결심했다”고 했다. “연극배우로 연기인생을 시작했다. 꽤 많은 연극에 출연했고 상을 받았다. 그런데도 나를 연극배우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때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연극배우로 자리매김하려면 잘하는 거를 해야 한다며 갈매기의 ‘아르까지나’를 연기해보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희곡을 다시 읽어보니 이번에는 니나가 아닌 아르까지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태생적 아르까지나 이혜영의 ‘갈매기’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태생적 아르까지나 ‘이혜영’

“마샤가 젊어 보여요, 내가 젊어 보여요”라는 대사를 할 땐 영락없이 한물간 여배우였다가 아들의 전위극을 보고 난 뒤 “예술계에 대한 반항, 패배주의”라 비꼬는 대목에선 자식을 걱정하는 엄마로 돌변한다. “항상 긴장하고 있다”는 외침에선 예민한 배우의 집념도 비친다.

명동예술극장 무대 위에는 한물간 여배우로 치부했던 아르까지나가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지루하거나 내면화한 갈등 속 관념적이던 체호프의 대사가 뾰족하게 가슴을 후볐다. 쌩 고개를 돌리거나 도도한 손짓·표정만으로도 캐릭터의 화려하면서도 불안한 고뇌를 뿜어냈다. “이혜영은 자연인인 배우와 극중 등장인물이 일치하는 태생적 아르까지나”라는 김윤철 감독의 말이 이해가 되는 무대였다.

이혜영이 ‘갈매기’를 처음 접한 건 연출가 김광림 덕분이었다. “희곡을 읽은 게 1994년 김광림 연출의 연극 ‘집’이란 작품에 출연할 때였다. 김 연출이 갈매기 4막의 니나 독백을 내 대사로 극에 집어넣었다. 당시 읽었던 희곡 중 최고였다. 읽자마자 펑펑 울었다. 그때는 니나밖에 안보였다.”

이후 수차례 ‘갈매기’ 출연 제안이 들어왔지만 니나가 아닌 역할이라 매번 거절했다고 했다. “이번에 다시 제안을 받고 희곡을 읽는데 엄마이자 여배우인 아르까지나의 처지에 더 몰입하게 됐다. 때가 됐다고 느꼈다.”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2002),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2004), ‘패션 70’s’(2005) 등. 이혜영은 TV와 스크린에서 주로 활동하는 배우로 알려졌지만 무대가 고향이다. 1981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데뷔한 35년차 배우다. 1996년 ‘문제적 인간, 연산’으로 각종 연기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줄곧 영화계에서 활동했으나 13년 만인 2012년 ‘헤다 가블러’의 타이틀 롤을 맡아 연극상을 두루 수상했다.

이번 역할은 그녀의 연기내공을 입증하는 무대다. “니나처럼 어린시절에 배우가 되고자 갈매기처럼 산 여자다. 실패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여자다. 한물갔다니. 천만에. 모든 캐릭터와 관계하고 평등하며 아직도 왕성히 활동하는 성공적인 캐릭터다. 그러면서도 외롭고 고독하다. 한 인물로서 그처럼 멋진 인격도 없다.”

◇음악·오필리어 대사 삽입…지루하단 편견 날려

연극 ‘갈매기’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보통 중산층 시민이 평범한 공간 속에서 특별한 사건도 없이 살아가는 체호프의 전형적인 소재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아무런 어색함 없이 겹친다. 그 순간 체호프는 곧 삶이란 언어로 읽힌다. 바로 ‘고전의 힘’이다. 연출을 맡은 루마니아 출신 펠릭스 알렉사가 이 같은 체호프의 대작을 영리하게 재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뜨레쁠레프가 작가가 된 순간 종이 수백장이 쏟아져 무대를 뒤덮는 장면이나, 실패한 여배우 니나가 ‘목이 마르다’고 외치자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장면은 삶은 연극과 구분되지 않는 인생이란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2막 시작에 원작에 없던 오필리어 독백을 추가한 것은 백미. 더욱 적극적으로 인물관계의 균열을 일으키도록 아르까지나 연기에 연극성을 더한 것이다. 음악효과는 ‘신의 한수’였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아리아나 뜨레쁠레프의 극중극에 흐르던 곡 ‘카르미나 부라나’를 적재적소에 사용해 인물과 객석, 극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알렉사 연출은 “이혜영 배우는 굉장히 예민하고 감각적이다. 좋은 직감을 갖고 있다. 캐릭터와 배우가 너무 잘 맞으면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완벽하게 소화하려고 매번 열심히 노력하더라. 새로운 아르까지나를 만났다”고 칭찬했다.

이혜영 외에도 뜨리고린 역을 맡은 이명행을 비롯해 오영수·이창직·박완규 등 중견 배우들이 나서 안정된 발성과 단단한 연기내공으로 극을 이끈다. 반면 뜨레쁠레프(김기수), 니나(강주희)의 무게는 신인이 이끌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극 전반에서는 이상을 품은 청년을 잘 표현하는가 싶더니 후반으로 갈수록 세밀한 심연은 들여다볼 수 없고 절규로만 흘러 아쉬움을 남긴다.

연극 ‘갈매기’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연극 ‘갈매기’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연극 ‘갈매기’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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