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리뷰] 마음이 끄덕여지는 한국 창작 뮤지컬. 역시 뮤지컬 ‘빨래’다
소극장을 가득 채우는 개성 넘치는 넘버들
극 중에서 필리핀 세부에서 온 외국인 불법 체류 노동자 ‘마이클’은 힙합과 알앤비 발라드풍의 ‘나 한국말 다 알아’라는 넘버를 노래한다. 대극장 뮤지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힙합 풍의 넘버로 관객들은 흥이 난다. 극장에선 힙합 공연장에서나 벌어지는 주고받기식의 함성과 가사가 펼쳐진다. 배우도 관객들의 호응에 더 흥이 나고 관객들도 마이크를 건네는 배우의 동작에 호응하며 극장의 열기가 달아오른다.
사실 ‘마이클’은 뮤지컬 ‘빨래’에서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지만, 극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한다. 관객들은 ‘마이클’의 서툰 한국말로 벌어지는 다소 엉뚱한 대사에 깔깔거리며 웃는다. 자칫 생뚱맞아질 수 있었던 힙합 스타일의 넘버는 ‘마이클’이 부름으로써 오히려 분위기를 반전시켜 재미를 느끼게 한다.
2부 전반부에 제일서점 사장 ‘빵’이 부르는 ‘책 속에 길이 있네’라는 넘버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준다. 이 개성 넘치는 넘버는 인터미션 이후에 관객들이 다시 극에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책 속에 길이 있네’는 트로트 풍의 멜로디에 록 요소가 가미된 반주로 작곡됐다. 이 역시 다른 뮤지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스타일의 넘버다. 극에서 유일하게 트로트 창법으로 불리는 이 넘버는 나이 들고 탐욕스러운 ‘빵’ 사장의 배역과 잘 어울려 어색하지 않다.
‘빵’ 사장 주변의 두 명의 직원들은 무대에서 작가의 사인회가 벌어지는 동안 과장된 액션과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춤을 춘다. 사인회에 참여하지 못한 관객들은 직원들 덕에 지루함을 잊고 신나는 박수로 호응해준다. 관객은 마치 자신이 제일서점에 정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트로트가 대중가요의 장르인 만큼 2절에서는 1절에서의 가사가 반복된다. 작품은 이를 듣는 관객들이 지루하게 느끼지 않도록 직원들의 코러스를 추가했다. 이는 노래를 더 풍성하게 하며 장난스러운 가사는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주인 할매’의 딸 ‘둘이’가 아플 때 나오는 링크 음악은 흔히 드라마에서 급진적인 전개가 이루어질 때 나올법하다. 뮤지컬 ‘빨래’는 이 부분도 극의 전체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극의 전개의 지루함을 극복하는 긍정적인 요소로 활용한다.
소극장 뮤지컬에서는 반주 세션을 크게 둘 수가 없어 보통 최소한으로 악기를 편성한다. 이로 인해 조금 초라하거나 듬성듬성한 사운드가 날 수 있는데 뮤지컬 ‘빨래’는 이를 가장 잘 극복한 작품이다. 뮤지컬 ‘빨래’는 기타, 드럼, 피아노를 주로 사용하는 최소의 반주 세션을 극복하기 위해 합창의 하모니제이션을 탄탄하게 하여 좁은 공간에서 큰 규모의 사운드를 낸다. 어느 대극장의 뮤지컬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라 놀랍다. 다른 극에서는 볼 수 없는 넘버들로 가득 찬 뮤지컬 ‘빨래’는 관객들에게 극 전체의 전문성을 낮춰 보이는 악효과가 아닌 전개감과 긴장감을 선물해준다.
10년이 지나도 공감하게 되는 유통기한 없는 소시민의 이야기
뮤지컬 ‘빨래’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이야기가 있다. 작품은 10년 전에 초연돼 작품 배경에 요즘에는 많이 사라진 달동네가 등장한다. 현실보다는 과거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이건 그냥 우리 이야기이다. 너무 바쁜 마음에 앞만 보고 사느라 놓쳐버리게 되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10년 전과 비교해 시대가 바뀐 만큼 한때 개작을 고려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잃을 수 있는 불안한 노동시장 등의 문제가 아직도 여전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고수하기로 했다고 한다.
실제로 아직 우리가 사회에서 겪고 있는 일들이 뮤지컬 ‘빨래’에서 펼쳐진다. 제일서점의 ‘지숙’은 직장에서 부당해고를 당하고, 이에 대해 부당함을 주장한 ‘나영’은 부당인사정리를 당한다. ‘나영’은 극 초반에 직장에서 손쉽게 당하나 고발할 수 없는 성추행에 대해서도 노래한다. 몽골에서 온 불법 체류 노동자 ‘솔롱고’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주인이 방을 빼라고 하면 빼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 모두 '갑'에 대해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을'의 입장을 나타낸다. 관객들은 아직도 만연한 사회의 부조리함이 나타나는 이러한 장면들 속에서 법의 무기력함과 슬픈 공감을 느낀다.
뮤지컬 ‘빨래’의 무대에는 구질구질한 잡화와 함께 봉지쌀을 파는 슈퍼, 삼겹살과 소주를 파는 선술집이 등장하고 전봇대에는 빛바래고 찢긴 전단들이 붙어 있다. 오물세 5,000원을 두고 주민들이 다투고, 출·퇴근길 달동네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는 마을버스는 늘 만원이다. 이런 공간에서 공장 사장 아저씨와 슈퍼 가게 주인아저씨는 중국의 저렴한 인력비를 끌어 쓰는 현실 때문에 실직하게 되는 우리나라 소시민의 실태를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에도 변하지 않는 공감의 이야기는 가사에도 잘 나타난다. 한번 부당함을 따졌다고 파주로 인사정리를 당하게 된 ‘나영’은 ‘참는 게 지겹지도 않니!!’라는 울림의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동시에 무대 전체가 암전되고 다른 장면이 시작되는데 이 대사로 관객의 분노의 마음이 각성하게 된다.
뮤지컬 ‘빨래’에는 외국인 불법 체류 노동자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거친 언행과 폭력도 잘 드러난다. ‘솔롱고’가 ‘나영’과 함께 부르는 넘버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에서 ‘우리도 때리면 아프고 슬프면 눈물 나는 사람인데 참다 보면 나도 사람이란 사실을 잊어요’라는 가사가나온다. 외국인 노동자의 월급을 떼어 먹고 그들을 막 대하는 악덕 공장 사장들을 향한 원망이 생생하다. 극의 ‘절정’에 해당하는 이 부분에서 ‘나영’ 역시 ‘솔롱고’와 같은 가사로 어딜 가도 마찬가지란 생각에 참았다고 울부짖는다. 관객들은 ‘솔롱고’와 ‘나영’의 가사에 공감하고 아직도 변하지 않은 현실에 눈물을 흘린다.
극의 후반에서 작품은 빨랫감처럼 보잘것없는 하루가 힘들더라도 힘을 내자고 이야기한다. 스토리상의 역할들뿐 아니라 관객들도 덩달아 힘내고 싶어진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 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라고 노래하는 뮤지컬 ‘빨래’는 옥상에서 얌전히 말라가는 빨래가 받는 볕처럼 따뜻하다.
배우의 역량과 연기가 잘 어우러진 넘버들
첫 대본에서 추가된 넘버 ‘한 걸음 두 걸음’은 인사정리를 당한 ‘나영’이 술에 취해 집에 혼자 돌아오면서 부르는 노래다. 서울에서 혼자 살아내야 하는 이방인의 외로움을 잘 나타낸다. ‘오늘같은 날엔 우리 엄마 물김치 집 앞에 놓여 있었음 좋겠다’라는 대목에서 ‘나영’ 역을 맡은 배우 강연정은 애잔한 연기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계속 반복되는 가사 ‘사는게 왜 이렇게 힘드니’를 처음엔 읊조리는 듯하다가 나중엔 울부짖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영’의 감정을 느끼고 관객들은 공감하고 안타까워한다.
‘나영’은 강원도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혼자 살아간 지 5년이 되는 27살의 아가씨이다. 3곳의 직장을 옮기면서 단칸방에 월세를 주며 힘든 일이 있어도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배우 강연정은 무엇 하나 과하지도 않게, 부족하지도 않게 표현했다. 배우 강연정이 연기하는 나영의 모습을 보면 실제 ‘나영’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있다. 그녀는 ‘나영’이라는 역에 겉모습뿐만 아니라 가창력과 연기 또한 잘 어울렸다. ‘나영’과 ‘솔롱고’가 듀엣으로 부르는 넘버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에서도 분노와 눈물이 섞인 목소리로 배우 ‘홍광호’의 목소리와 잘 어우러졌다. 노래에 두 가지 감정이 잘 느껴져서 관객의 가슴도 눈물과 분노로 넘실거리며 춤을 췄다.
문소현 관객리뷰가 newstage@hanmail.net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