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지금' 묻는 연극 3편…현재 마주하다

'산허구리'…1930년대 어촌 배경 처절한 생존기로 사회모순 그려 '김정욱들'…쌍용차 해고자 고백 인터뷰기사 토대로 재구성해 '함익'…한국배경 21세기판 '햄릿' 복수보다 현대인 어긋난 내면 초점
김영란법·헬조선·흙수저금수저·검열·폭력, 부패·비리·불신·갈등. 한국사회의 아픈 이면을 명징하게 포착한 연극 세 편을 모았다. 셰익스피어 원전의 행간을 파고든 ‘함익’(맨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과 1930년대 어촌마을의 비극을 들춰낸 ‘산허구리’, 70m 굴뚝 위 89일간의 사투를 그린 ‘김정욱들’(사진=세종문화회관·국립극단·차이무).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누나야. 왜 우리는 밤낮 울고불고 살아야 한다든? 왜 그런지를 난 생각해볼 테야. 긴긴밤 개에서 조개 잡으며, 긴긴낮 신작로 오가는 길에 생각해볼 테야”(‘산허구리’). “8시간의 긴 인터뷰 뒤 미안하다는 그의 말뜻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의 미안하단 말은 ‘함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김정욱들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미안합니다(함께삽시다)라고”(‘김정욱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문제도 아니야. 살아 있는 것으로 살 것인가 죽어 있는 것으로 살 것인가 그게 진짜 문제야”(‘함익’).

되풀이되는 현대사의 비극을 통해 지금 여기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끄집어낸 연극 세 편이 동시에 무대에 올랐다. 1930년대 어촌의 비극을 다룬 연극 ‘산허구리’(고선웅 연출)와 실제 인터뷰를 토대로 대본을 쓴 극단 차이무의 신작 ‘김정욱들’(민복기 연출), 햄릿을 재창작해 현대인의 내면을 파고든 ‘함익’(김광보 연출)이다. 세 작품 모두 보통 사람의 상처로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굵직한 문제의식을 엮어내 올해의 수작이라 할 만하다.

‘산허구리’의 고선웅 연출은 “극 중 셋째아들 석이가 어린 자아지만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다’고 한 깨달음 같은 게 좋아 연출을 맡았다”며 “다만 생각을 넘는 어떤 구체적인 실천이 없더라. 과연 그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으면 싶더라. 물질로는 풍요롭지만 내면의 결핍을 가진 오늘날 관객에게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고선웅표 첫 사실주의극 현실 관통하다…‘산허구리’

고선웅 연출.
1930년대 어촌의 생활상과 비극을 극사실적으로 재현했다. ‘각색의 귀재’로 통하는 고선웅(48) 연출이 프로 무대 처음으로 사실주의 연극에 도전한 ‘산허구리’(10월 31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다. 그동안 공연한 적이 없던 작품을 국립극단의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를 통해 살려냈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근대 천재 희곡작가들이 남긴 연극유산이 많은데 너무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다”며 “산허구리는 극적 상황의 전개나 대사, 성격창조 등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산허구리’는 1930~1940년대 한국 연극계에 큰 족적을 남긴 극작가 함세덕(1915~1950)의 초기작. 함 작가가 21살이 되던 1936년 ‘조선문학’을 통해 발표했지만 월북작가란 한계 때문에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삶의 터전이자 처절한 생존공간이던 서해안 어촌마을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모순을 그린 작품은 원작에 살을 붙여 추가한 장면(실성한 어머니와 둘째 아들 복조의 재회)에 방점을 찍었다.

김 감독은 고 연출을 감성연출가라고 부르며 “40년 넘게 연극을 해왔지만 연출가가 꺼억꺼억 우는 건 처음 봤다.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려는 세계에 대한 철저한 믿음, 인물이 겪는 고통을 실제처럼 느끼는 마음이 고선웅 연극의 힘”이라고 말했다. 당시 사회의 모순을 생생하게 꺼내놓은 연출력 덕에 작품은 시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지금의 이야기이자 내 주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읽힌다. 1930년대 어촌을 재현한 무대가 백미. 한 가정에 닥친 비극을 손질하지 않은 초가로 형상화했다.

◇쌍용차 해고자의 고백…‘김정욱들’

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70m 굴뚝 위 89일.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김정욱들’(10월 23일까지 아트원씨어터 3관)은 ‘미안하다’ ‘함께 살자’를 쉼없이 되뇌게 하는 극이다. 2014년 12월 13일 김정욱·이창근 씨는 ‘쌍용차 해고 희생자 26명의 명예회복과 187명의 복직’을 요구하며 평택 쌍용차공장 내 굴뚝 위에 올랐다. 김씨는 89일 만인 2015년 3월 11일, 이씨는 101일 만인 3월 23일 굴뚝에서 내려왔다.

작품은 사회의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김정욱들의 이야기다. 김씨와 이재훈 한겨레 기자의 인터뷰 기사를 기초로 민복기 극단 차이무 대표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우리가 몰랐던 쌍용차 해고자의 상처, 6년간의 농성이야기가 갈무리 없이 펼쳐진다.

실제 경험한 것처럼 담백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차이무식 연기가 힘을 더한다. 배우 오용·송재룡·이중옥·공상아 등 8명이 ‘김정욱은 평범한 한 집안의 가장이자 아빠, 그저 보통사람이었다며 누구나 김정욱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담하게 전한다. 민복기 연출은 “주변인으로서 지켜보는 미안한 마음이 작품으로 나온 것 같다”며 “우리 모두가 김정욱들이란 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잘 헤쳐나가고 있는 배우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복수 대신 개인의 심리 좇다…‘함익’

연극 ‘함익’의 한 장면.
고전의 가치는 역시 새로운 해석에서 온다. 과연 ‘지금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자 답이다. 서울시극단의 ‘함익’(10월 1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은 400년 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21세기 대한민국으로 가져와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주인공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꿨다. 아버지와 새엄마가 친엄마를 살해했다고 믿는 연극영화과 교수 함익이 학생들과 ‘햄릿’을 만들며 겪는 심리를 좇는다.

‘함익’이 포착한 것은 복수보다는 개인의 내면. 재벌가·낙하산 교수 등 치열한 탐문이 극작가 김은성의 시대를 꼬집는 차진 대사와 맞물리며 현대인의 어긋난 내면을 근사하면서도 고독하게 묘사한다.

배우들의 호연도 빛난다. 함익 역의 최나라는 캐릭터를 섬세하게 다루며 시대의 자화상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함진 역의 이지연은 함익의 분신으로 재역할을 한다. 연우 역을 맡은 윤나무는 객원으로 왜 이 연극에 합류했는지를 증명해낸다.

연극 ‘산허구리’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연극 ‘함익’의 한 장면(사진=세종문화회관).
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사진=극단 차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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