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통렬한 비판을 던지다…<은밀한 기쁨> 연습현장

"슬퍼할 시간 좀 가지면 안 되는 거야?"

시골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아버지가 숨을 거둔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인 가족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애도를 표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업과 결혼, 부동산 등 지극히 현실적인 사안을 두고 저마다 실속을 셈하기 시작한다. 고지식한 둘째 딸은 그런 가족들의 모습에 혼란을 느끼고, 이들의 관계에는 점차 균열이 생겨난다.

가장을 잃은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가는 사회상을 날카롭게 조명한 연극 <은밀한 기쁨>이 국내 첫 공연을 앞두고 있다. 지난 28일, 개막을 9일 앞둔 이 작품의 연습실을 찾았다.

영국 극작가 데이빗 해어(David Hare)가 쓴 <은밀한 기쁨>은 19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가장의 죽음을 맞이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과 세속적인 가치를 셈하며 빠르게 변화에 순응해가는 인물들간의 대립이 세밀히 그려진다. 데비빗 해어의 작품은 2010년 <에이미>, 2011년 <블루룸> 등이 먼저 국내에 소개돼 탄탄한 작품성과 문제의식으로 호평 받은 바 있다.


추상미, 유연수

이번 연극 <은밀한 기쁨>은 <그게 아닌데>의 김광보 연출과 쟁쟁한 배우들의 참여 소식으로 일찍이 기대를 모았다. 그간 출산 및 육아로 활동을 중단했던 추상미가 2009년 <가을소나타> 이후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르며, <스테디 레인>에 출연 중인 이명행이 추상미와 호흡을 맞춘다. 추상미는 죽은 아버지의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후처를 묵묵히 책임지는 둘째 딸 이사벨로, 이명행은 이사벨의 약혼자 어윈으로 분한다.

<트루웨스트><칠수와 만수> 등에서 연출가로도 활동해온 유연수는 첫째 딸 마리온의 남편이자 사업가인 톰을, <터미널>의 우현주와 서정연은 이기적인 첫째 딸 마리온과 죽은 아버지의 후처인 캐서린을 각각 맡았다. 여기에 <목란언니>의 조한나가 마리온의 보좌관인 론다 역으로 출연한다.


(위) 추상미, 서정연
(아래) 우현주, 유연수

이날 연습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이사벨이 언니 마리온을 맞이하는 첫 장면부터 시작됐다. 이사벨에게 아버지의 임종시 모습을 물어보던 마리온은 곧 자신이 고인에게 선물했던 반지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 이기적인 언니를 탓하지 않고 순순히 반지를 돌려주는 이사벨과 그런 동생을 불편해하는 마리온의 삐뚤어진 심리가 이후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위 공무원이기도 한 마리온이 대중과 미디어를 노련하게 다루는 모습은 오늘날 정치인들의 모습을 통렬하게 꼬집는 듯 하다.

아내와 처제의 갈등에 온건히 대처하며 번번이 '주님의 뜻'을 찬양하면서도 사업상으로는 철저히 계산적인 톰, 반듯한 성품의 이사벨을 사랑하지만 세속적인 이익을 거절하지 못하는 어윈의 모습도 섬세하게 그려졌다.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와 정치,사회적 함의가 곳곳에 촘촘히 담겨 있어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위) 이명행, 추상미
(아래) 이명행, 조한나

5년 만의 연극 출연을 앞둔 추상미는 연습 시작 전부터 차분히 앉아 맡은 역할에 집중했다. 다소 부산한 현장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이사벨을 연기해낸 그는 이 작품에 대해 "각 인물의 인생사나 감정이 굉장히 다층적이어서 대본과는 별개로 그 사람 자체를 섬세하게 구축해야 한다. 그런 부분이 참 매력적이면서도 배우로서 어렵고 또 도전이 된다"고 전했다.

이날 김광보 연출은 <은밀한 기쁨>에 대해 "다수당의 집권으로 보편적 선보다는 명분을 따라가던 당시 영국사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금의 우리사회와도 같다고 보면 된다"며 작품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던졌다. 공연은 오는 2월 7일부터 3월 2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펼쳐진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배경훈(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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