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오페라 < 리골렛토(Rigoletto) > One
작성일200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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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리골렛토 >는 베르디의 초기작품에 속하며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상당히 혁신적인 오페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전통적인 풍부히 성악적인 선율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새로운 화성과 관현악법을 사용해서 기분과 분위기의 전달에서 절묘한 효과를 거두었고, 도니제티나 벨리니 류의 구식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보다 훨씬 탄탄한 통합을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다.
오페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으로 시작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볼 수있지만 이 노래가 베르디의 <리골렛토> 제 3막에 나오는 테너의 아리아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오페라의 아리아가 작품과는 상관없이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는 경우인데, 지금까지 널리 불리워 지고 있고 초연 때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오페라의 아리아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작곡가 자신인 베르디가 이 같은 결과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베르디가 1851년, 베니스에서 <리골렛토>를 리허설하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3막의 테너 아리아를 보여주지 않았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베르디는 <리골렛토>가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리허설 중 이 아리아가 새어나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까봐 몹시 불안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개막일 관객들은 이미 익숙한 아리아를 듣게 되면 자신들이 속았다고 생각하고 조소를 보낼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토바 공작 역의 테너(라파엘 미라테)가 3막의 아리아가 없다고 했을 때 베르디는 짐짓 태연하게 "아직 시간이 많이 있으니 걱정 말아요. 곧 넘겨줄 테니까"라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스코어는 주지 않은 채, 두 사람 사이에 같은 대화만 되풀이되었다. 사람들은 베르디가 아직 이 아리아를 작곡하지 않은 것으로 상상했다. 기다리다 못하여 화가 난 테너가 압력을 넣자 드디어 거장께선 스코어를 그에게 넘겨 주면서 맹세코 그는 노래를 부르면 안되고, 다만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연습해야 한다는 것을 엄격히 다짐시켰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케스트라와 모든 가수들, 그리고 극장의 관리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예상 했던 대로 3막의 아리아 '여자의 마음은 잘도 변해(La donna e mobile)'는 <리골렛토>의 초연 직후 삽시간에 대중을 휩쓸어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던 것이다. 이 아리아는 16세기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4행시를 모태로 한 것인데, 원문은 이렇다.
Souvent femme varie, Bien fol est qui s'y fie.
(여자는 잘도 변해, 여자를 믿는 자는 바보.)
Une femme souvent N'est qu'une plume au vent.
(여자는 마치 바람에 날리는 깃털 같다네.)
이것을 대본을 맡은 프란체스코 피아베가 이탈리아어 특유의 울림을 살려 절묘하게 재생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리골렛토>의 내용은 밝고 흥겨운 이 테너의 아리아와는 달리 베르디의 모든 오페라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무겁고 게다가 음산함에 가득 차 있다. 오페라의 줄거리는 1832년, 파리에서 무대에 올리자마자 당국에 의해 공연이 금지된 빅토르 위고의 5막 희곡 <방탕한 왕(Le Roi s'amuse)>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정신 없이 환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군주(프랑수아 1세)를 비롯해서 곱사등이 익살광대와 살인청부업자 및 매춘부가 등장해서 저주와 유괴와 암살 등의 살벌한 이야기를 엮어가는 이 연극 속에서 왕실은 문자 그대로 방탕과 타락의 온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연극이 공서양속(公序良俗)을 해치는 부도덕성에 차 있다는 것이 프랑스 당국이 공연을 금지한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 그것은 단지 구실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정치적인 것으로, 프랑스의 군주를 너무 노골적으로 좋지 않게 묘사한 것이 그들의 비위를 거슬렸던 것이다.
위고는 당국의 조처에 대항해서 자유로운 언론의 권리를 옹호하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사건은 당시의 사회에 굉장한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희곡을 출판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씌워진 [부도덕의 죄]에 대항해서 웅변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격력한 [서문]을 썼다. 주인공인 곱사등이 익살광대 트리불르(오페라에선 리골레토)를 논한 부분은 오늘날까지 이 인물의 복잡한 성격을 분석한 최고의 논설로 남아 있다.
베르디는 1849년(36세) 무렵에 위고의 <방탕한 왕>을 알게 되었는데, 희곡의 격렬한 주제는 그의 어두운 본성에 즉각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1844년에 이미 같은 작가의 작품인 <에르나니>를 피아베의 대본으로 작곡해서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 베르디는 이번에도 피아베에게 리브레토를 부탁했다. 후에 그는 <리골렛토>의 대본은 그에게 제공된 오페라의 대본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에 속했다는 말을 곧잘 했지만, 실로 베르디는 <리골렛토>를 빨리 작곡하고 싶은 욕망에 피아베를 열화같이 몰아대며 대본의 완성을 독촉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페라의 원래 제목은 <저주>였다.
그러나 파리에서 위고의 연극이 당한 재난이 베니스에서라고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프랑스에서 작용한 것과 같은 정치적인 이유로 오스트리아의 검열당국이 쐐기를 박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848년과 49년의 시기는 혁명의 정신이 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휘젓고 있던 때여서 비록 300년 전에 생존하긴 했지만, 그처럼 부정적인 왕의 모습을 이탈리아의 국민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확실히 바람직한 일로 여겨지진 않았던 것이다. 살벌한 검열관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던 베니스의 군사 통치관은 위험한 작품 <저주>를 무대에 올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검열당국은 라 페니체 극장의 지배인에게 작품 올리는 것을 금지시키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한동안 베르디와 대본가들은 계획을 포기해 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베르디는 이 주제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애착하고 있었던지라 베르디에게 애초에 오페라를 위촉했던 극장감독이 제시하는 어떤 다른 텍스트도 완강히 거절했다. 사실 그는 어느 정도는 허가될 것이라 믿고 이미 상당부분의 음악을 작곡한 터였다. 진실로 그가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드라마가 될 것이라 믿었던 <저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살해를 당하는 꼴이 되었으니 그의 실망이 컸었다. 그러나 피아베의 재치있고 교묘한 협상수완과 주변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논쟁을 벌인지 6주 만에 마침내 타협을 보게 되어 <저주>는 <리골렛토>로 제목이 바뀌어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타협의 결과 작품의 무대는 16세기의 파리에서 같은 시대 이탈리아의 만토바로 옮겨졌다. 오페라의 제목은 살벌한 <저주> 대신 <리골렛토>로 고쳤으며, 주요 등장 인물들 역시 모두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다. 즉 트리불르는 리골렛토, 그의 딸 블랑쉬는 질다, 프랑수아 1세는 만토바 공작, 드 생-발리에는 몬테로네 백작, 살인청부업자 살타바딜은 스파라푸칠레, 그의 누이인 매춘부 마구엘론느는 맛달레나 이런 식으로 전부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단순한 방법에 의해 결국 관련된 모든 사람의 체면이 서게 되었다.
< 리골렛토 >中에서 질다의 "그리운 그 이름(Caro n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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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준한(인터파크 공연팀 allan@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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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 -베르디 오페라 < 리골렛토(Rigoletto) >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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