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나오는 클래식음악 특별공연 - 첫째마당 One

글린카 / 루슬란과 뤼드밀라 서곡 M. Glinka / Overture to “Russlan and Ludmilla” in D major 루슬란과 뤼드밀라는 1842년 작곡된 글린카의 대표적인 오페라인데 그 줄거리나 음악 모두가 러시아의 민속적인 소재로 작곡하였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푸시킨의 서사시에 바탕을 둔 전 5막의 이 오페라 줄거리는, 키에프 태공의 딸 뤼드밀라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겨 버리는데 태공은 자기 딸에게 청혼하는 3명의 귀공자들에게 딸을 구하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노라 약속한다. 결국 그 중에 한 사람인 기사 루슬란 왕자가 악마를 물리치고 태공의 딸과 결혼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서곡은 이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인 루슬란 왕자와 뤼드밀라가 경사스럽게 결혼하는 장면을 소재로 한 밝고 장대한 곡이다. 서곡 프레스토 D장조 2/2박자, 소나타 형식 도입부 없는 힘찬 화음이 반복된 후 쾌활하고 장대한 제1테마가 힘차게 나타난다. 얼마 후 제2테마가 F장조로 저음부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원활하고 느긋한 아름다운 노래 조이다. 이는 제2막에 나오는 루슬란의 아리아의 일부이다. 뒤이어 발전부가 제시되며 재현부에서는 제2테마가 A장조로 나타나 장쾌한 종결부로 들어간다. 이 부분은 오페라 제5막의 마지막곡을 소재로 했는데 악마 체르노몰을 표현한 어둡고 무서운 선율이다. 마지막에 힘차고 화려하게 끝나는 참신한 서곡이다. Glinka, Mikhail Ivanovich(1804.6.1~1857.2.15) 러시아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글린카는 10세 때부터 음악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삼촌의 집에는 러시아의 대부호만이 자랑하는 사설 관현악단을 가지고 있었다. 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18년 페테르스부르크의 귀족 학교에 다녔는데,1818년 페테르TM부르크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J.필드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졸업후인 1822년 작곡을 시작하여 아마추어로서 피아니스트 및 가수로 활동하였다. 1830년 가극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서 벨리니, 도니체티를 알게 되었다. 밀라노에서 작곡가로 인기를 얻었으나 러시아풍의 작곡을 지망, 1833년 귀국중에 베를린에서 덴에게 작곡을 배웠고 부친이 사망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러시아의 국민적 음악의 창조를 강조, 가극 《황제에게 바친 목숨》 등을 작곡하였다. 1842년 에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를 초연하였으나 성공치 못하고 1844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베를리오즈의 지원을 받아 관현악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그 동안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작곡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등의 작품을 공부하였으며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1825년에 피아노 변주곡을 출판하였으며 생애를 통해 이탈리아, 빈, 베를린, 파리, 스페인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고 더구나 스페인에서는 민속 음악을 소재로 한 작품을 시도하였다. 스페인에서 민속음악을 수집하여 그곳에서 《스페인 서곡 제1번》을 작곡하여 성공을 하였다. 만년에는 러시아와 유럽을 여행하며 르네상스시대의 폴리포니를 연구하여 러시아 성가와의 접목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베를린에서 객사하였다. 1833년 에는그는 베를린에서 덴(Dehn 1799~1858)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였으며 음악 예술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겸하여 체득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음악이 서유럽의 음악을 따라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러시아의 국민적인 소재를 사용하였다. 그의 음악은 국민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결합으로 국민주의의 사상으로 성숙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오페라 [이반 수사닌 Ivan Susanin]과 푸슈킨의 서사시에 바탕을 둔 오페라 [루슬란과 뤼드밀라 Rusoan i Lyudmila]를 1842년에 발표하였다. 1848년에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판타지 [카마린스카야 Kamarinskaya] 등의 명작을 냈다. 1856년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은사 덴을 방문하고 고대 악곡의 선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마침내 러시아의 음악을 세계적인 것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성과 예술성을 결합시킴으로써 세계 최초로 국민 음악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는 음악 분야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의 국민의 생활과 역사와 시정을 묘사하여 러시아 음악의 발전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의 창조 활동의 기반을 "음악을 창조하는 것은 국민이며, 작곡가는 그것을 편곡할 뿐이다." 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직접 국민의 소리와 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국민 대중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근대음악의 시조로 불리며, 뒤에 그의 지시에 따라 발라키레프, 세로프 등 젊은 음악가들이 그의 이념을 계승하여 국민음악파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영향권에 있던 러시아의 음악계를 진정한 러시아 음악의 창조를 제창하여 러시아 음악의 방향을 설정하고 민족성을 중시하여 빌리나(Bylina 러시아의 서사시, 민요)로부터 설화 등 민족음악을 전승하였고, 외국의 민족음악을 연구, 고전적 형식과 단순한 화성, 온음계적인 선율 전개에 의해 러시아적 작풍을 완성하였다. 그의 후배로서 이른바 러시아 5인조 외에 러시아 국민주의 작곡가들이 많이 나타났지만 글린카야말로 러시아 음악의 창시자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M. Glinka / Overture to “Russlan and Ludmilla” in D maj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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