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 10년만의 내한공연]
작성일200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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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무소르그스키(Musorgsky Modest Petrovich ;
1839. 3.21~ 1881.3.28)
소지주인 점잖은 집안에서 태어난 무소르그스키는 음악가인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지도를 받았고, 유모로부터는 민화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는 한꺼번에 서구의 음악문화와 러시아의 민족성이라는 두 근원에서 양식을 얻으면서 자란 셈이다. 9세 때 그는 사람들 앞에서 필드의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독일인이 운영하는 페테스부르크의 학교에서 유럽식으로 자란 후 사관학교에 입학, 1856년에 중위로 졸업하고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에 들어갔다.
1853년의 부친의 죽음은 그를 모친과 가까워지게 했다. 큰 음악적 야심을 가지고 고전 음악의 대 작곡가들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얼마 안 되는 곡목(순수음악 몇 곡, 베를리오즈가 편곡한 가곡 몇 편)만을 작곡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자르 큐이, 발라키레프, 그리고 그의 5인조에 추진력과 진언주의적인 시사를 주게 되는 지도자적 존재인 저널리스트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 알게 된다.
당시의 무소르그스키는 미남으로 사교성과 품위가 있고 잘생겨서 여기저기 살롱으로부터 피아노 연주를 초대받는 데가 많은 귀여운 중위였다. 1857년 그가 성악곡과 극장음악의 방향으로 나아갈 주된 계기가 된 최초의 주목할 가곡 ‘별이여, 너는 어디에’ 를 쓰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여름, 우울증인지 알코올 중독인지 간질병인지 알 수 없는 최초의 결정적인 발작을 일으켰다.
1859년 그는 군대를 떠나 음악에 생애를 바칠 결심을 하고, 고골리의 요한제의 밤에 의거한 오페라를 구상, 독일의 고전 음악가들을 연구하면서 우울증과 신비주의의 단계를 경험한다. 이 발작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이 유럽화되어 귀여운 중위라는 사교계적인 껍질을 깨고 우리들이 아는 고뇌하는 무소르크스키가 모습을 나타내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랑하던 여자의 죽음, 간질병, 동성애적 경향 때문일까? 아니면 성적인 불순함을 창조적인 순결이라는 천직으로 승화시킨 것일까? 어쨌든 이때 그는 정상적인 인생에서 하나의 선을 그은 인물로서의 결의를 굳혔던 것이다.
독학이지만 꼼꼼히 그는 서구의 음악(특히 슈만)이나 사상가, 철학가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한 농노 해방 때문에 2년간이나 가정의 일에 분주했고, 게다가 생활을 위한 일을 찾아야만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스타소프의 협력을 얻어 발라키레프, 세자르 큐이, 보로딘,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그 자신으로 이루어진 5인조가 결성되었다.
이 그룹은 세자르 큐이의 필치로 극적인 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적인 음악원에 대항하여 음악학교를 개교, 그 고결한 사상을 퍼뜨렸다. 무소르그스키는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운수통신성의 기술국에 들어갔다.
그는 플로베르의 원작에 의한 오페라 살랑보에 착수한다. 이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소재는 뒤에 보리스 고두노프 등의 작품 속에 남게 된다. 그의 미학이론-대담하고 솔직한 음악어법에 의하여 설사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진실을 전하는 것은 이때 형성되었다. 노래와 피아노를 위한 가곡을 작곡했고 종종 스스로 가사를 썼다. 그래서 그는 말의 목소리의 억양에서 착상을 얻은 가창 형식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독일적인 슈프레히게장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말의 억양을 아주 솔직하게 음악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도 선율적인, 즉 보통보다 음정이 크고 매끄러운 커브를 그리는 이 레치타티보의 착상을 출입하고 있던 살롱의 주인 다르고미슈스키에 의한 이 분야에서의 시도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수행하여 가곡 속에 레치타티보를 짜 넣는 것에 성공하고, 동시에 양자를 격리하는 벽을 제기한 것은 무소르그스키였다.
1865년 모친의 죽음으로 인해 무소르그스키는 집안의 재산의 소유권을 상실하고, 이전보다도 더욱 고독한 생활을 하게 된다. 1868년 블라디미르 니콜스키 Vladimir Nikolskii는 그에게 푸시킨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오페라로 작곡할 것을 제안한다. 가곡을 계속 쓰면서 고골리의 결혼에 기초한 오페라(미완성)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 후, 그는 처음으로 대규모의 작품을 완성했다. 1868년부터 1870년에 걸친 이 다산(多産)의 시기에 그는 창조력의 폭발을 이용하여 동시에 또 하나의 오페라 [가난한 농부]에 착수하고, 가곡집 [어린이의 방]도 썼다. 이 어린이의 방은 외국에까지 평판이 미친 최초의 작품으로, 특히 리스트를 감탄시켰다. 리스트를 크게 칭찬하고 있던 무소르그스키는 1873년에 스타소프로부터 리스트를 만나러 유럽으로 여행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아마도 마음이 위축되어서인지 그 제안을 거절했다. 1870년 페테스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은 제1고(稿)를 맡겨두고 있던 보리스 고두노프의 상연을 여성에게 중요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고 음악의 형식이 너무 현대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한편, 5인조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생활을 바꾸고, 림스키 코르사코프(무소르그스키는 1871년에 그와 가구가 딸린 방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아카데미화했다. 그리고 무소르그스키는 알콜중독과 고독에 빠졌고, 관청 일을 하면서 그 와중에도 [보리스]를 고쳐 썼다. 그는 이 오페라에 마리나라는 등장인물과 폴란드의 막을 덧붙였다. 몇 번 고치게 되고 추고된 [보리스]는 사적인 연주회에서 주요부만의 형태로, 그 후에는 전편이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다시 마린스키 극장으로부터 거부되는데, 어떤 고위의 학예 옹호자의 중개로 마침내 이 극장에 받아들여졌다. 결국 보리스 고두노프는 1874년 2월 8일에 초연되어 상당한 성공을 보았다.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지적했듯이 특히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성공했지만, 비평가들은 종종 이 작품의 결함이나 푸시킨의 원작에 대한 그의 배반을 비난했다.
이따금 알콜중독의 발작을 일으킨 무소르그스키는 점차 환상가로 통하게 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 음악적 자질은 지리멸렬한 구성으로 혼미되어 갔다. 그리고 스타소프에게 주어진 구상하에 정치를 주제로 한 또 하나의 오페라 호반시치나의 거대한 계획에 몰두했다. 이것은 음모와 당파싸움이 뒤얽힌 이야기이다. 무소르그스키 자신이 결코 명확한 전체적 비전을 가지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는 이 작품은, 끊임없이 손질되고 관현악법을 수정했으며 삭제와 단념이 거듭된 끝에 1879년 완성을 보게 되었다.
무소르그스키는 1873년에 시인 아르세니 골레니시체프 쿠투조프 Arsenii Golenishchev Kutuzov와 친교를 맺고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 성실성과 진지함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이 시인의 시에 의거하여 그는 2개의 비관적인 가곡집 햇빛도 없이(1874)와 죽음의 노래와 춤(1875~77)을 작곡했다. 햇빛도 없이는 그 비연속성 때문에 친구들로부터는 이해 받지 못했다.
골레니시체프 쿠투조프가 갑자기 나가자 그는 혼자가 되었다. 관청 일의 잡역에서 물러나 연극회의 피아니스트나 반주자로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결의를 점차 굳혀 마침내 1879년 사직하지만, 영광에 싸이고 돈을 벌 수 있는 음악의 일거리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로 그의 비호자가 되는 여성 가수 다리아 레오노바 Daria Leonova의 성악학교에서 수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고골리에 의한 대중 오페라 소로친스크의 정기 시장을 쓰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 역시 미완성으로 끝나는 운명을 맞는다(그가 약간 고쳐서 이 작품에 삽입하려 한 간주곡은 나중에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편곡하게 된다. [민둥산의 하룻밤]이 된다).
1881년 초, 그는 심장병을 앓아 육군병원에 강제로 입원하게 되고, 친구들이 그를 문병하러 왔다. 회복되고 있었으나 병원 안에서 자기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사실은 생일은 1주일 전에 지났었다. 숨어서 술을 마신 그는 1881년 3월 16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으로 남았는데,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그것을 매우 양심적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을 하고 편곡하게 된다. 그가 없었다면 무소르그스키는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전문가로부터 밖에 평가 받지 못한 채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으로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 [어린이의 방], 가곡 [죽음의 노래와 춤],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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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준한 (인터파크 엔터테인먼트 공연사업부 allan@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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